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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양이로소이다 - 합본
나쓰메 소세키 지음, 김상수 옮김, 배미정 그림 / 신세계북스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일본 근대문학사를 대표하는 작가 나쓰메소세키의 처녀작이자 출세작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미국에서 고양이를 잠깐 키우면서 갖게된 고양이에 대한 애정으로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전지적 관찰자이자 주인공인 고양이의 눈으로 교사인 주인(구샤미)과 그를 둘러싼 인간군상을 이야기한다.

 

원래 내 생각대로 한다면 저 허공은 만물을 덮기 위해, 이 땅은 만물을 싣기 위해 생겨난 것이니 아무리 집요한 논리를 좋아하는 인간도 이 사실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이 하늘과 대지를 만들기 위해 인간이라는 것들이 얼마만큼 노력했느냐 하면 손톱만큼도 노력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자신이 만들지 않은 물건을 자기 것으로 정할 수는 없는 법이다. 자기 소유로 인정하는 것까지는 상관없겠지만 다른 이가 드나드는 것까지 금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넓은 땅에 약삭빠르게 울타리를 치고, 말뚝을 세우고, 모모의 소유지 등으로 나눠 가르는 일은 마치 하늘에 새끼줄을 치고, 여기는 내 하늘이고 저기는 네 하늘이라고 하는 것과 똑같다.

만약 토지를 잘라내 한 평에 얼마 하고 소유권을 팔고 산하면 우리가 호흡하는 공기를 한 자 입방으로 나누어 팔아도 좋을 것이다. 공기를 팔 수 없고 하늘에 새끼줄을 칠 수 없다면 토지도 마찬가지 아닌가?(p.167)

 

이렇게 인간의 땅에 대한, 그리고 더 나아가 세상 만물에 대한 욕심을 비판한다.

서울 강남에서 땅놀이 하시는 분들이 아로새겨 들어야 할 말이다.

그리고 나쓰메소세키의 영특한 고양이는 실천은 않고 말만 많은 인간들에게도 일침을 가한다.

 

인생의 목적은 말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실천하는 데 있는 것이다. 자기 생각대로 착착 일이 진행된다면 인생의 목적은 달성된다. 수고와 걱정과 말다툼 없이 일이 진행된다면 인생의 목적은 편하게 달성될 것이다.(p.203)

 

이 책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부분은 고양이군의 신에 대한 고찰이다.

 

고대의 신은 전지전능하여 숭배되어 왔다. 그 중에서도 기독교의 신은 20세기인 오늘날까지도 그 전지전능의 탈을 쓰고 있다. 그러나 세인들이 생각하는 전지전능은 무지무능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분명히 역설이다. 그런데 이 역설을 끝까지 모두 깨달은 자는 천지가 개벽한 이후에 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대단한 고양이다. 내 생각을 굳이 여기에 밝혀 고양이를 얕보면 안 된다는 것을 오만한 인간들에게 알려주고 싶다.

천지만물은 신이 만들었다고 한다. 당연히 인간도 신께서 만들었을 것이다. <성경>이라는 책에 그렇게 씌여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인간 자신이 이 인간을 수천 년 동안 관찰해 오면서 인간을 대한히 깊고 미묘한 존재로 여기고 있다. 그러는 동시에 더욱더 신의 전지전능함을 인정하게 된 것도 사실이다.

그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세상에 이렇게도 많은 인간이 우글거리고 살고 있는데 똑같은 얼굴을 한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만 봐도 그렇다. 얼굴 구도도 뻔하고 크기도 거의 비슷비슷하지 않은가.

달리 말하면 사람들은 모두 똑같은 재료로 만들어졌다. 똑같은 재료로 만들어졌는데도 똑같은 사람이 하나도 없다. 어쩌면 그러헥 간단한 재료로 이렇게 이상하고 다양한 얼굴들을 생각해 낼 수 있는지 창조자의 능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웬만큼 독창적인 상상력 없이는 이런 변화무쌍한 작품은 불가능한 것이다. 평생 그림에만 매달리는 화가가 온 정력을 쏟아 얼굴의 변화를 추구한다 해도 열두세가지 이상은 만들어낼 수 없는 걸로 미루어보아, 인간을 만드는 일을 한 손에 떠맡은 신의 솜씨에 경탄할 수밖에 없다. 도저히 인간 세계에서는 볼 수 없는 경지에 이른 능력이어서 '전능한' 기량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인간은 이런 점에서 신께 크게 황공해하고 있는 것 같다. 하긴 인간의 관점으로 말하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고양이의 관점에서 보면 이 같은 사실은 오히려 신의 무능을 증명하고 있따고 볼 수 있다. 아주 무능한 것은 아니라고 해도 인간 이상의 능력을 가졌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신이 인간의 수만큼 많은 얼굴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원래 마음 속에서 그만큼 많은 생각이 있어서 그렇게 무수한 변화를 창작해 낸 것인지, 아니면 고양이고 뭐고 다 똑같은 얼굴로 만들려고 작정하고 만들기 시작했는데 도저히 뜻대로 되지 않아 만들어내는 족족 망치는 바람에 복잡한 상황으로 빠져든 것인지 아무도 모를 일이라는거다.

따라서 인간의 얼굴 구조는 신이 성공한 기념물로 볼 수 있는 동시에 실패한 흔적으로도 볼 수 있다. 전능일 수도 있지만 무능일 수도 있는 것이다.

게다가 인간의 눈은 평면으로 두 개가 나란이 있기 때문에 좌우를 한꺼번에 볼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물의 반쪽밖엔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은 정말로 가엾은 일이다. 이렇게 단순한 사실이 그들 사회에 밤낮으로 일어나고 있는데도 정작 본인들은 신이 들려 있으므로 깨달을 턱이 없다.

 

......

 

인간이 사용하는 국어는 전적으로 모방에 의해 전래되고 학습되는 것이다. 그들 인간이 어미로부터, 유모로부터, 타인으로부터 실제 생활에 쓰이는 언어를 배울 때도 단지 들은 그대로를 되풀이하는 것말고 다른 야심은 털끝만큼도 없는 것이다. 능력껏 힘을 다해 남의 흉내를 내는 것이다. 이렇게 남의 흉내로 이어져 내려오던 국어가 10년, 20년이 지나서 자연스럽게 발음이 변한다는 것은 인간들에게는 완벽한 모방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순수한 모방은 이와 같이 아주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신이 모두 소인으로 찍어낸 가면처럼 인간을 구별할 수 없도록 만들어냇다면 신의 전능함을 말할 수 있겠지만, 오늘날같이 제멋대로 생긴 얼굴들을 백일하에 드러내는 눈이 핑핑 돌 지경의 변화는 신의 무능함만 만천하에 알리고 있는 것이다.(p.212)

 

인간의 역사를 '의복의 역사'라고 정의 내리며 의복이 지닌 허구성을 비판한다.

 

인간의 역사는 고기의 역사가 아니요, 뼈의 역사도 아니며, 피의 역사마저 아니요, 오로지 의복의 역사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그러므로 의복을 걸치지 않은 인간을 보면 인간답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심지어는 괴물을 만난 느낌이다. 괴물이라고 해도 전체가 약속하다시피 모두 괴물이 된다면 괴물이란 말이 사라지겠지만, 정말 그렇게 되다면 인간이란 존재 자체가 와해되고 말 것이다.

그 옛날에 대자연은 인간을 평등한 존재로 만들어 이 세상에 내던졌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인간이든 태어날 땐 분명히 핏덩이였다. 만약 인가의 본성이 '평등'에 만족한다면 이 핏덩이 상태로 그대로 성장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 핏덩이 하나가 말하기를, '이렇게 누구나 모두 똑같다면 공부한 보람이 없다. 애쓴 결과가 안 보인다. 부디 바라건대 나는 나다. 누가 봐도 나라는 존재가 눈에 띄었으면 좋겠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이든 남이 봐서 크게 놀랄 만한 것을 알아내고 싶다'라고 말하면서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 하고 10년을 생각한 끝에, 가까스로 팬티라는 걸 발명해 당장 이것을 입고는 '어때, 놀랐지?' 하고 뽐내면서 마구 돌아다녔다.

......

그러고 보니 이런 심리 속에 큰 걸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다른 게 아니다. 대자연이 공기가 없는 상태를 못 견디는 것처럼 인간은 평등을 못 견딘다는 사실이다. 평등한 게 싫어서 어쩔 수 없이 의복을 뼈와 살처럼 걸치고 둘러쓰고 하는 오늘날 이미 본질의 한 부분이 되어버린 의복들을 내팽개치고 도로아미타불인 평등한 시대로 돌아가자고 하는 것은 미친짓이다. 아무리 미친 짓이란 소리를 감수한다고 해도 결코 다시는 돌아갈 수는 없다. 일부 돌아간 자들은 다른 사람의 눈으로 보면 괴물이다.(p.319)

 

이외에도 나쓰메소세키의 영특한 고양이는 인간군상에 대해 날카로운 혀를 낼름거리며 비판하고 꼬집으며

이야기를 전개해나간다.

 

예술은 시대를 반영하는 거울이라고 한다. 문학작품이든, 영화든 간에 당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이야기가 없다면 우리들의 마음을(자본주의적인 표현으로는 '우리들의 돈을')빼앗아 갈 수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나쓰메소세키의 소설은 시대정신을 적절하게, 그리고 재치있게 반영한 걸작임이 분명하다.

 

이 책을 통해 고전의 존재이유에 대해서 다시 한번 절실하게 깨달았다.

100여년 전에 쓰여진 글이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마음 속에 깊은 울림으로 남는다.

세월이 지나도 변치 않는 진리란 것이 분명히 존재함을 깨닫는다.

 

혹 스포일러가 될지 않을까 싶어 결말 부분은 생략한다. 내 블로그지만 그래도 가끔씩 이 누추한 곳을 들려주는 고마운 나그네들이 있기 때문이다.

 

-촌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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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은 왼쪽에 있음을 기억하라 - 정운영의 마지막 칼럼집
정운영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9월
평점 :
품절


 

서점에서 이 책을 집어든건 순전히 책 제목 때문이었다.

제목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빨간(?)아우라가 내 온 몸을 휘감았다.

정운영은 1980년대 말부터 10년 동안 서울대학교와 고려대학교에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강의했고,

"나는 인간을 믿는다"로 시작해 "인간의 심장은 왼쪽에 있음을 기억하라"라는 말로 끝마쳤던 그의 강의는

당시 학생들에게는 암묵적인 필수과목이었다고 한다.

 

<심장은 왼쪽에 있음을 기억하라>는 그의 아홉번째 칼럼집으로서 2005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중앙일보에 실렸던 칼럼을 묶은 책이다.

이 책에 실린 칼럼은 주로 2003년부터 2005년까지를 배경으로 한다.

MB정부가 들어서면서 부터 좌파정부로 매도되는 김대중, 노무현정부 시기에 쓰여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너무나 큰 혼란에 빠져 시간을 넘나드는 타임머신을 탄 듯한 착각에 빠졌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배고픈 것은 참아도 배 아픈 것은 못 참는다. 그 야유가 상징하는 바가 무엇이든, 혁명이 빈곤에서 폭발하지 않고 불평등에서 폭발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1997년 외환 위기를 고비로 빈곤과 불평등이 심해진 것은 사실이나 그것이 전천후 변명이 돼서는 안된다. 환란 극복 선언부터 5년, 국제통화기금 졸업 선언부터 3년이 지났다. 그런데도 빈곤과 불평등 추세가 여전하다면 위기 극복이나 졸업 따위의 자부가 턱도 없거나 그 뒤의 대응이 엉망이었다는 얘기가 된다. 정권이 바뀌고 한 해가 흘렀으나 아직은 분발의 흔적도, 개선의 전망도 보이지 않는다.(p.154)

 

이 글에서 연도 수만 조금 바꾸면 현 정권에 대한 얘긴지, 지난 정권에 대한 얘긴지 분간이 안 된다.

이것 말고도 그의 칼럼을 읽고 있으면 대부분이 현정부에 대한 비판처럼 보이는 경우가 많다.

결국 보수정권이든 진보정권이든 간에 진정 국민을 위한 정부는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예컨대 1861년 4월 시작된 미국의 남북전쟁의 목적과 결과를 '노예해방'으로 믿는 사람들도 많지만,

실제로 남북전쟁에서 링컨은 연방만 유지된다면 노예제도 따위는 문제 삼지 않았을거라는 사실이다.

전 세계적으로 위대한 대통령으로 추앙받는 링컨조차 불평등 문제에 대해서 큰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국민(또는 인민)들이 진정으로 믿고 따를 수 있는 국가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걸까.

톨스토이가 쓴 정치적 에세이 모음인 <국가는 폭력이다>에서 톨스토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들을 돕는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다. 바로 스스로 훌륭한 삶을 사는 것이다. 이런 방법은, 여기서 이익을 얻을 수 없는 사람들이 생각하듯 결코 실현 불가능한 것이 아닐 뿐 아니라 사실 유일하게 현실적인 방법이다. 다른 모든 수단은 환상이다. 대중의 지도자들은 헛된 환상을 심어주어 대중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고 진정으로 올바른 길을 외면하게 만들고 있다.(p.223)

 

 

-촌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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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의 침대
박현욱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작가 박현욱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가 중 한 사람이다. 아마도 사회학이라는 비주류학문을 전공했다는 유대감때문일거다. 최근들어 한국 현대문학 속에서 우리 사회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다는 비판이 많다. 하지만 박현욱은 소설 속에 우리 사회의 다양한 모습들을 비교적 자연스레 녹여낸다.
 
 
조직 사회 속에서 개인의 능력 차이는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는다. 몇몇을 제외하면 고만고만한 사람들뿐이다. 해고의 기준이란 결국 평소의 인간관계라는 얘기다. 자기계발 한답시고 외국어 학원에도 다녀보았고, 운동을 한답시고 헬스클럽에서 딱딱한 쇠붙이들을 붙잡아도 보았지만 다 소용없다. 웰빙이니 뭐니 떠들어대는 얘기는 여유 있는 부르주아의 시간 때우기일 따름이다. 아무 생각 없이 출근해서, 아무 생각 없이 일하다가, 아무 생각 없이 퇴근해서, 아무 생각 없이 티브이를 보다가, 아무 생각없이 잠드는 게 샐러리맨의 웰빙이다.(생명의 전화, p.72)
 
 
그는 이렇게 현재 한국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고용,해고문제에 대해서 매우 현실적으로, 그리고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아무리 효과적으로 잘해낸다 해도 자기합리화는 자기합리화일 뿐이다. 우리가 왜 헤어졌는지 나는 수십 가지의 그럴사한 이유를 댈 수 있다. 온갖 이론들을 갖다 붙여 두툼한 논문이라도 쓸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아무리 세련된 논문을 만들어낸다 해도 내 삶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내 분석이란 사후약방도 못 되는 것이다.
내 일에 대해서도 회의가 생길 때가 많다. 웃자고 하는 말로, 한국 사회는 사회도 아니다. 사회라면 응당 사회학적 잣대로 분석이 되어야 할 텐데 도대체 분석이 되지 않는다. 웃자고 하는 말이 아닌 말로, 내가 하는 연구라는 것도 실상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일이다.(연체, p.150)
 
 
진정한 근대화에 실패한 시민 없는 시민사회인 한국 사회에 대한 비판이다.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는 "시민혁명을 거치지 못한 우리는 국가의 구성원으로서의 책임과 권리를 갖는 시민이라는 자각을 심화시킬 기회를 별로 갖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그러한 "시민혁명의 결여는 이 땅에 개인주의가 발전할 수 있는 토양을 없애버렸다"고 한다. 또한 그는 "우리 사회에는 국가 우위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국민만이 있을 뿐, 국가라 할지라도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자유와 권리의 주체로서의 사람들을 의미하는 인민(people)은 존재하지 않는다"며 보수적인 국가의 폭력성에 대해 비판한다.
 
인류 문명의 발달이라는 미명하에서 디지털문화는 전 세계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에서도 진지함에 대한 성찰을 빼앗아 갔다. 그로 인해 사회에 대한 진지한 비판과 성찰은 다수의 국민들에게 거부감을 일으키게 되었다. 비교적 사회 비판이 용이한 문학작품 속에서도 우리 사회에대한 진지한 성찰과 비판은 보이지 않는다. 무거운 주제의 문학작품들은 독자들에게 외면당함으로써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의 논리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암울해 보이기만 하는 지금 한국 사회의 미래를 위해 절실히 필요한건, 우리의 몸을 편리하게 만들어주는 테크놀로지도, 그저 억지 말장난과 몸개그가 난무하는 TV프로그램따위도 아니다. 깊이있고 진지한 사고와 논리적이고 세련된 비판인 것이다.  그리고 이를 가능케 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는 우리 사회의 모습이 녹아 있는 다양한 종류의 문학작품과 국가 감시로부터 자유로운 다양한 논조의 언론매체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 대해 깊이 있는 애정을 갖고 세련된 비판을 하는 '시민'들의 노력이 무엇보다 절실하게 필요하다.
 
 
-촌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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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조각들 - 타블로 소설집
타블로 지음 / 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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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타블로라는 가수가, 아니 인간 이선웅이 이토록 외롭고 고독한 삶을 살았는가" 였다.

나이도 나와 비슷한데다, 부유한 집안에서 세계를 돌며 자란 그가 이처럼 외로운 삶을 살았다는 것이 의외였다.

하지만 그의 소설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전혀 의외이지 않았다.

 

무미건조한 도시 속에서 자신의 삶을 지탱해줄 무언가를 찾아 헤매이지만, 아무것도 손에 쥐어질 수 없는 사람들.

처절하게 움켜쥐었지만,

갸날픈 손가락 사이로 스르륵 빠져나가는 모래알을 무기력한 모습으로 바라보는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타블로,아니 작가 이선웅의 글은 이별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돌아서는 한 여인의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

시리도록 차갑지만, 흐르는 눈물은 뜨겁다.

무기력한 모습이지만, 절망하지 않는다.

소설 속 이야기이지만,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다.

 

이열치열이라고 했던가.

우울한 요즘,

책 속에서 더 깊은 우울함과 고독을 느꼈다.

 

우울함을 극복하는 나만의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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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것들에 대하여
조은 지음, 최민식 사진 / 샘터사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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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겨울, 학교 앞 서점에서 우연히 만났던 이 책은 나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의 내가 가지고 있는 사상과 이념 등 모든 사고의 중심에 이 책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 속에는 인간의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생명력이 퍼덕거리는 사진들이 가득했다.

비록 아마추어도 안되는 수준의 사진 실력이지만 어쨌든 나와 사진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50년 넘게 항상 낮은 데를 향해 카메라를 치열하게 움직이셨다는 사진작가 최민식 선생님.

이를 통해 내가 얻은 좌우명이 '꿈은 높은 곳을 향하고, 마음은 낮은 곳으로 흘러라.'이다.

 

선생님의 사진을 통해 내가 얻은 또 다른 한가지는 사회학에 대한 보다 진지한 태도였다.

단 한번도 사회학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본적이 없던 나에게

선생님은 단 몇 점의 사진을 통해 사회학이라는 학문에 대한 진지한 태도를 갖도록 이끌어 주셨다.

 

일흔이 다 된 나이에도 여전히 작품 활동을 하고 계신다는 최민식 선생님.

살아 생전에 단 한번은 반드시 직접 찾아뵙고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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