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평화 대작전 1
오구라 아카네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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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단편으로 시작했다가 연재로 넘어가게 된 작품이었어요. 그런것 치고는 굉장히 매끄러웠어요. 작가의 역량이 느껴졌습니다. 기본 라인은 역시 너무 사랑하는 공주와 왕자님의 이야기에요. 전 이런 이야기는 쓰려지죠. 그냥 무조건 고고인겁니다. 하하하! 세간에는 너무나 좋아서 약혼한걸로 되어있지만, 이쪽도 정략적인 만남이었어요. 전쟁을 계속하는 두 나라의 왕자와 공주가 전쟁을 종결시키기 위해서 두사람은 너무너무 사랑하고 있으니 전쟁을 관두어 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두나라는 오랜시간동안 계속되던 전쟁을 멈추고 평화협정을 체결하게되요. 사실 이런 설정은 정말 망상에 가깝다고 생각하지만, 이번에 월드컵의 유명한 선수 중에서 내전을 중단 시킨 그 선수 생각이 나서 보면서 여러가지 생각들이 들었습니다.
사실 이분은 전작인 <마드모아젤 버터플라이>에서도 2차 대전 시절의 일본에서 살고 있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그렸거든요. 대부분 다른 작품에서 느끼던 피해자 입장의 그 감각이 그다지 느껴지지 않았어요. 자신이 속한 국가에서 집영영장을 발부한다면 그걸 자신의 소신으로 거부 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침략 전쟁을 옹호하는 것은 아닙니다. 더더욱 전쟁에 적극적이던 소극적이던 동의를 했던 그 시절의 모든 사람의 입장을 대변하거나 옹호하는 것도 아니에요. 그건 분명 잘못된 것이지만, 다만 저 자신이 그 위치에 있었다면 어떠했을까 한번 생각하게 되었을 따름이에요. 분명 그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에는 양심적인 병역거부자들이 있었어요. 현재의 이 나라에 있는 병역거부자들을 바라보는 대부분의 시각들이 어떠함을 상상했을때 그 시절은 그 넘어의 우주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분들의 말로는 굉장히 참담했다고 들었습니다. 시대를 바라보는 눈이 있고 자신의 양심이나 신념이 있어도 국가 앞에서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선택치는 굉장히 협소해 져버립니다.
주인공인 그는 임신한 그녀를 뒤로 한 채로 전쟁터를 가는 모습과 통지서를 받고 낯빛이 되어버린 그 표정이 가끔 생각이 납니다. 전쟁터에서도 그는 전쟁을 하는 상대방의 국가에도 똑같이 아이가 살고 있고 아파하고 있는 것을 바라보는 장면이 나왔었어요. 그래서 그랬나봐요. 사람은 어디에나 있고 모두 붉은 피가 흐르는 같은 인간이죠. 다만 그걸 인지하거나 그렇지 못하거나 그걸 알고 있음에도 다른 가치를 더 중요히 여기는 것이 문제가 아닐련지.
이야기가 삼천포로 나갔네요. ^^;; 여튼 사이가 좋지 못한 두사람은 언론앞에서는 굉장히 정열적으로(?) 잉코커플 연기를 하지만, 그 상황이 아닌 곳에서는 서로 난투극을... 그가 올린 손을 무는 그녀!! 그를 향해서 킥을 날리는 그녀!! 그를 던지는 그녀!!! 그녀는 그녀의 왕국에서 환자들만 간호하고 의술 공부만 했다는데요. 아닌것 같아요. 작품에서는 킥이 아주 그냥 수준급입니다. ㄱ-b
이 커플이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해서 모두를 속일(?)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굉장히 궁금해졌는데, 그 이유는 항상 사람들을 치료하면서 어두운 표정인 그녀를 보고 그녀를 웃게 만들고 싶다는 그의 마음에서 시작된 것이었어요. 저는 그도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서 어쩔수 없어서 그렇게 된거라고 생각했는데, 티비에 나온 그녀에게 반한거더라구요. 킥을 날리는 아가씨는 너무 순진하고 그의 스킨십에 놀라고 두근두근하고 괴로워해서 그를 멀리하면서도 말을 하고 싶으면 종이 비행기를 날리는 귀여운 처자입니다. 그래서 이 커플의 모습이 귀여웠습니다.
국가를 위해서 모두를 위해서 연기한다고 생각했는데 어느덧 그에게 끌리는 걸 발견한 자신에게 소스라치게 놀라는 그녀! 아아 귀여워요. 사랑을 하는 아가씨들은요. 그리고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바보 단순무식한 느낌의 왕자님도 귀엽습니다. 사랑의 힘은 위대한가봐요. 그녀를 위해서 이것 저것 참고... 하지만 그 말투는 좀 고쳐주셨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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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정말 하고 싶은 말 - 그 말을 하는 순간, 내 속이 뚫렸다
테리 리얼 지음, 안기순 옮김 / Y브릭로드(웅진)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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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예전에 교보문고에서 발행하는 월간지에서 심리학 관련해서 책을 추천하는 코너가 있었는데 거기에 <남자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이 주목할만한 신간으로 소개되었었다. 당시에는 그냥 뭐 읽어보고 싶다는 마음은 좀 있었지만, 선뜻 사고 싶은 마음이 들지는 않았었다. 근래에 발행한 꽤 많은 남성의 시점으로 심리학을 이야기한 책들이 헛소리 수준은 책을 좀 봐서... 뭐랄까 제목에 대한 거리감도 있었고 출판사 이름도 생소했기에 그냥 뒤로 넘겼었다.(알고보니 여기는 웅진 계열;;)
이번달에 책을 몰아서 사면서 이 책도 고민하다가 질렀는데 책의 띄지에 있는 추천 멘트중에서 무려 <상처받은 내면아이 치유>의 저자인 존 브래드쇼의 추천사가 있는걸 보고 깜짝 놀랐음. 그 내용은 "우울증에 빠진 남자들에게 의미심장한 통찰력을 주고, 그 남성을 사랑하는 여자들을 위로하는 책이다"라고 되어 있었다. "흠.."이라고 생각하며 페이지를 넘겼고 <뉴욕타임즈>가 이 책에 내린 찬사는 "남성 운동이 한 발짝 전진하는 계기를 마련하면서 여성 심리학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이었다. 존 브레드쇼의 추천사와 <뉴욕타임즈>의 찬사로 구입한 책중에서 이 책은 가장 먼저 읽어야 하는 순서로 올라왔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본문 페이지를 하나씩 넘기기 시작했다.

책의 서문에서 저자와 아버지의 관계가 어떤 관계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고, 이 사람도 이 길을 가게 된 이유가 개인적인 비중이 굉장히 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와 아버지가 나누었던 대화는 나를 충분히 눈물짓게 만들었다. "물에 빠진 사람은 건드리지 마라. 너까지 끌고 들어가니까."가 아버지가 그에게 했던 말.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충고는 틀렸다. 나는 아버지한테 휩쓸려 어두운 소용돌이속으로 끌려들어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나를 움켜줄 때 외면하지도 않았다." 그는 아버지를 외면하지 않았고, 아버지를 아버지가 자신에게 했던 행동과 아버지라는 사람 자체를 분리해서 바라보고자 노력했고 그리고 한 인간으로써 아버지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위로해줬다. 그런 그가 있었기에 그의 아버지는 임종의 순간에 그와 그의 동생에게 축복을 내려주셨던건 아닐까 싶다. 세대를 거슬러 올라가서 그는 자신 뿐만 아니라 그의 아버지에게도 손을 내밀고 그리고 그 고통스럽고 벗어나기 힘든 유산들을 자신의 자식들에게는 상속하지 않았다. 다만 아쉬운 점이라면 그는 그의 어머니와는 그런 연결고리가 거의 없었다는 것. 뭐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이 책의 제목은 <남자가 정말 하고 싶은 말>보다는 좀더 공격적인 제목이 더 어울렸을것 같다는 개인적인 생각이 들었다. 책의 모든 부분에서 '젠더의 정의'에 대해서 끊임없이 질문하고 있었다. "성별은 타고 나는것이 아니라 그렇게 길러지는 것이다"라는 주장의 증거를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었다. 여자는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자로 길러지는 것과 매한가지로, 남자 또한 남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남자로 길러진다는 것. 이건 정말 분명한 사실이었다. 남자가 남자로 길어지면서 받는 그 이중적인 고통에 대해서 좀더 많이 알게되었고, 굉장히 많이 반성하게 되었다. 의식하고 있는데도 그래도 무의식속에서 가끔씩 나오는 한마디 들은 사회에서 규정한 젠더의 규정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이 없는 것이 현실이기에. 스스로도 그 한마디에 깜짝 놀라곤 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부정. 허허허허.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스스로 감당하기 힘들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현실을 느끼기 전에 부정이라는 회피를 언제나 선택하고 만다. 그래서 남는 건 별로 없는데도 말이다. 습관적인 거라는 건 정말 무서운 거다. 살아온 세월만큼 그 깊이도 더 깊어졌을테니.

추천사나 해설에서도 '남자'들이 읽으면 크게 공감하거나 깜짝 놀라는 책이라고 말했지만, 내 남자를 이해하기 위한 책이라기 보다는 나 스스로를 이해하기 위한 책에 가까웠다. 이건 뭐 개인적인 경험을 기반으로 내담자들의 에피소드들을 느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여튼간 나는 그랬다. 서구는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국가는 승자와 패자로 극단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이라서 사례에서 이야기 되었던 내담자들의 이야기는 남자던 여자던 그 크기에는 차이가 있을지는 몰라도 가지고 있는 부담감은 모두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 책을 읽으면서 공감하는 여자분들도 많으리라고 생각한다.
임상 사례와 이론적인 설명이 굉장히 조화를 이루고 있었고 번역도 잘 되어 있었기에 접는 페이지들이 많았다. 읽다가 기억하고 싶어서 페이지를 접었던 시기는 심리학 관련 책을 처음 접했을 때 정도 이었는데 말이다. 그런걸 생각하면, 이 책은 많은 것들을 전달하는 굉장한 책이 아닐까 싶다. 심리적인 문제를 떠나서 젠더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준 고마운 책.
EBS에서 나온 모 책을 보면서 빡올랐던 기억이 나면서 이 책을 그 제작진들에게 보내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을 '젠더'로 규정하고 그것들을 젠더를 규정하는 단어와 연계해서 만들지 말아주기를 바라지만, 사실 그 방법이 굉장히 쉽게 갈 수 있는 방법인건 부정하지 않겠다. 다만 그렇게 했을 경우에 우리에게 모르게 가해지는 위해들을 다시 한번 생각해주길 바랄 따름. 당신은 남자인가 여자인가? 아니면 다른 무엇인가?
나는 여자라는 성별이 주어져서 태어났고, 그리고 여자로 길러지기 위해서 많은 것들이 잘려나갔고 그 기준에 의거해서 옳고 그름을 판단 당했다. 나라는 인간이 그것을 좋아하는데 그것은 '여성'이라는 성의 안에서는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고 배워왔다. 그런 기준안에서 이율배반적으로 느껴졌던 또 다른 이중적인 승자와 패자의 논리. 그것들을 쟁취하면서 스스로가 어른들이 규정한 여성으로 남는 길이 과연 있을것인가? 적어도 내가 나의 2세를 출산해서 키운다면 그런것들로 부터 자유롭게 키우고 싶다고 항상 생각해왔기에 그런 사람들에게 가장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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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게 말걸기
대니얼 고틀립 지음, 노지양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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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자폐증 손자에게 쓴 <샘에게 보내는 편지>로 유명한 대니얼 고클립의 책이지만, 저는 대니얼 고틀립의 책은 처음 만나는 관계로 굉장히 남달랐습니다. 우선 그의 이력에 주목했고, 그리고 그가 자신을 어떻게 돌보려고 노력했고 그리고 자신을 어떤 방식으로 긍정하게 되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33살 전도유망한 그는 불의의 교통사고로 척추손상을 입어서 전신마비가 되었습니다. 자신의 신체적 능력의 상실에 대해서 그가 어떤 식으로 느끼는지 그리고 그에 대한 주위사람들의 반응에 대해서도 새로운 부분을 알게되었고, 그래서 좀 많은 생각들이 들었습니다.
병원에서 아픈 환자들을 마주할 때 느꼈던 당황스러운 부분에 대해서 이 분도 이야기 하시더군요. 환자의 절망이나 상실에 대해서 상대방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 것이 서로에게 좋은 것인지에 대해서요. 사실 우리는 이런 것들에 대해서 배운 적이 없기에 저는 죽음을 앞에 두셨던 저의 신랑의 아버지가 하시는 이야기가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저 자신이 어떻게 반응해야지 좋을지 몰라서 당황했었습니다. 그분의 앞에서 웃어야 하는지 울어도 되는지 눈물을 어떻게 감춰야 하는 지. 굉장히 괴로워했습니다. 그분이 그런 이야기를 하실 때 저는 옆에서 그 말을 긍정도 부정도 아닌 애매한 태도를 취하거나, 아니면 그 말들을 부정하며 삶의 동기를 부여해드리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렇지만 이게 좋은 방법인지 확신도 없었기에, 저 자신이 그때 할 수 있었던 최선의 선택은 그 분의 부운 발을 주물러 드리는 것뿐이었습니다. 이 책에는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교수의 저작인 <죽음과 죽어감>과 <상실수업>에서 언급되었던 것들과 비슷한 이야기가 있었고 좀더 다른 면(사실 같을지도 모르지만)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과 자신을 긍정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어떻게 보면 불교적 관점에 가깝다고 느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책을 읽은 저의 지인분도 그런 느낌을 받으셨다고 하시더라고요. 저는 좀 달랐습니다. 그 양반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자신의 되고자 하는 자아를 현재의 자신의 모습과 근접하게 내려서 현실에서 실천할 수 만드는 쪽에 가깝게 만들어야 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전의 자신이 되고 싶은 자아가 너무 높아서 그 높이에 좌절해서 시작조차 하지 못하는 모습이 아니라 지금의 내가 조금만 노력하면 이룰 수 있는 선으로 그 기준을 내려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자는 말의 다른 표현으로 들렸습니다. 이런 식으면 그 사소한 것들을 긍정하고 나를 긍정하고 긍정하고 또 긍정하다보면……. 언젠가는 좋아지겠지요.
모두가 공부를 잘해서 1등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 1등 아래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1등을 해야지 반드시 행복하다'라는 신념은 만들어진 이미지(환상)에 가까울지도 모르겠습니다. 문제는 어떤 내가 아니라 그 상황을 자신이 어떻게 받아들이는 것. 그토록 갈망하던 성공이지만, 그 성공을 거미 쥐어도 불안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승과 열패의 신화 속에서 그 1등을 유지하기 위해서 부단히도 노력해야하고, 그 위치에서 좀 더 내려가는 자신은 견딜 수 없습니다. 자신이 파괴될 것만 같은 공포. 그 공포는 자신이 그 위치를 미칠 듯한 노력으로 유지하고 있어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뭘 견딜 수 없는 걸까요. 1등이 아닌 자신? 1등인데도 이렇게 견디기 힘든 불안감이 올라오는데 그렇지 못하다면……. 이라고 생각하는 환상에 가까운 공포. 그 공포는 환상이 아닐지도 모르고 환상일지도 모릅니다. 체현하지 않는 이상은요.
'반드시 이렇게 해야만 한다.'는 신념이 조금 유연해지면, 나는 좀 더 편해지고 그리고 좀 더 넓은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반드시 그래야 하는 것이 아니니까 나 스스로 자신을 비난하는 기준에서 좀 더 자유로워집니다. 그리고 타인에게도 좀 더 유연해집니다. 수정된 신념은 나를 공격하는 행동들을 줄여갑니다. 반드시 그래야 하는 것이 아니니까 그것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도 사라지고…….  돌고 도네요. 사소한 부분에서 조금 바뀌어도 정말 많은 것들이 바뀐다는 말. 시작은 어려워도. 너무 천천히 시간이 흘러가도. 다시 돌아간 것 같아도. 그건 결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 희망의 끈을 부여잡고 앞으로 걸어 나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좋아지기 마련.
그는 정말 힘들었던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았고 스스로의 고통을 알아주고 수용하고 그리고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가끔은 뒤로 후진하기도 하지만, 삶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기에. 앞으로 나아가기도 뒤로 조금 물러서기도 하기에. 그러면서 천천히 앞으로 나아갈 것을 알기에. 포기하지 않습니다. 굉장히 감상적이 되어버렸네요. 전문적으로 배운 그와 같은 사람에게도 정말 힘든 일이니까 실패한다고 자신은 불가능하다고 완벽하게 좌절하지는(포기하는) 말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려봅니다. 그러니까 지루한 싸움으로 지쳐서 괴로워하며 울고 있는 어딘가에 있는 당신에게 당신은 지금 힘내서 잘하고 있다고 말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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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받은 내면아이 치유
존 브래드쇼 지음, 오제은 옮김 / 학지사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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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가 좀 많이 울었습니다. 그 부분은 저자인 존 브레드쇼 교수가 자신의 어린시절으로 돌아가서 어린 브레드쇼에게 성인인 브레드쇼가 해주는 말 때문이었습니다. 이 책에서는 다른 책에서 누차 강조하는 방법인 '성인인 내가 어린아이 나를 돌보는 방법'에 대해서 정말 체계적으로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주요 방법은 명상과 자신을 지지해주는 사람과 함께 하는 치유, 자신이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성인인 내가 어린아이인 내게 보내는 편지와 어린아이인 내가 성인인 내게 보내는 편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와 그리고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서 그 사건에 성인인 내가 어린아이인 나의 대변자가 되어서 성인인 아버지에게 이야기하는 것 이었습니다.
사실 명상 쪽은 정신분석이나 최면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만, 저는 이 효과를 체험해본적이 없어서 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가 환상인지 망상인지 진실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성인인 내가 어린 아이인 내가 괴로워했던 상황에 개입해서 나를 대변하는 방식은 정말 효과적이라고 느꼈습니다. 다른 사람이(모르는 타인) 자신의 이야기를 한 텍스트를 보고도 눈물이 저절로 나왔으니까요. 힘들었던 자신의 과거가 생각나기도 했고 이런 식으로 자신을 돌보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기쁨도 있었습니다.
책은 굉장히 세부적으로 어린 시절을 파트로 나누었고, 그 파트마다 그 시절마다 충족되어야 하는 욕구에 대해서 설명하고 그리고 그 욕구들이 충족되지 못하면 성인인 나에게 어떤 악영향을 끼치는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매 파트에서 그 해당 어린 시절에 충족되지 못한 혹은 충족된 욕구에 대해서 테스트 하는 문항이 있고 그 지표를 통해서 내가 어떤 욕구들이 충족되지 못하고 상실되어 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것을 토대로 진도는 나가고 그 시기마다 충족되지 못한 욕구와 상실된 것들을 스스로 돌보는 구체적 방법에 대해서 안내합니다. 방법은 주로 명상을 통해서 스스로를 돌보는 방식을 택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성인에 도달합니다.
힘들었던 나의 과거를 스스로 알아주고 돌보려 하고 자신의 감정을 긍정하는 것은 많은 자원들을 불러오는 것 같습니다. 아이는 살아남기 위해서 가학적인 부모에게 의지해야 합니다. 그런 아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나의 부모가 나에게 하는 행동은 나를 위해서 하는 최선의 행동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겠지요. 나의 부모가 자신의 성장하지 못한 내면 아이로 인해서 그 고통을 나에게 대물림 한다는 것을 어린아이가 어떻게 받아들이겠습니까? 그건 성인이 되어도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인이 되어도 그 사람의 행동과 그 사람 자체를 분리하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그 행동에 대해서 먼가 용서와 비슷한 제스처를 취하면, 그 무언가가 무너질 것 같은 공포. 나의 과거가 부정되는 것 같은 느낌. 그런 것들은 극복하기는 너무나 어려우니까요. 그래도 우리는 굉장히 구체적인 지침을 얻었습니다. 나에게 편지를 써 봅니다. 힘들었던 그 시절의 나에게. 나를 지지하는 말들을요. 그 말들은 부모로부터 가장 듣고 싶은 말이겠지요. 그 말들은 자원이 되어서 지금 힘들어 하는 내면의 아이를 가지고 있는 성인인 나에게 삶을 지지하는 힘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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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 받은 아이들
장-폴 피카페르, 루드비히 노르츠 지음, 강주헌 외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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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때 점령군인 독일군과 프랑스 여인들 사이에서 아이들이 태어났다
책은 크게 3부로 나뉘어서 1부에서는 프랑스내에서 '독일놈의 자식'이라고 불리어지며 각종 종류별(말그대로 그야말로) 학대를 받던 아이들(지금은 중년이 된)의 증언이었다. 그들은 지금 현재에도 그들의 뿌리에 대해서 말하는데 큰 어려움들이 있었고 여전히 크게 망설이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태어난 아이들이 무슨 잘못이 있던가. 그들은 전쟁의 피해자일 뿐이었으나 그들의 엄마와 함께 낙인을 부여 받고 살아왔다.  평생 따라다니는 꼬리표가 그것이었고 그들은 그들의 다른 뿌리를 찾아서 떠난 여정에서도 많은 어려움들이 있었다.
2부와 3부에서는 제2차대전 시기의 프랑스인 여성과 독일인 군인간에 태어난 20만명의 혼혈아들이 태어난 그 이유에 대해서 추척하고 있었다. 점령기 시기의 독일군이 취했던 태도나, 프랑스 여인들과 독일군 사이에서 결혼을 금지한 이유 등등 여러가지들을 알 수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우리네의 사정 두가지가 떠올랐다. 일본인 위안부와 전에 했던 모 다큐. 한국군인과 베트남 여성들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 2세들에 대한 이야기. 그들은 그들의 뿌리를 찾아서 한국을 찾아왔으나 대부분 부모에게 거부당하고 있다는 이야기. 프랑스에서 독일까지 그들의 다른 뿌리를 찾아 떠난 그들은 그들의 다른 부모의 재산의 상속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의 부모가 살아 계시다면 어머니와의 이야기를, 돌아가셨다면 부모의 사진을 그리고 이복 형제와 자신의 비슷한 부분이라던가 그런것들을 보고 싶어했다.
그들을 잊어버리고 있었던 대부분의 아버지들은 그들이 '유산'에 대한 권리를 요구 할 줄 알고 거부하는 일도 많았다고 되어 있었다. 그러나 독일에서는 사생아에 대해서는 유산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는 것. 아버지들은 이 사실을 알았을까? 물론 그 법이 지금은 수정되었다고 하지만...
전쟁에는 승자도 패배자도 없었다. 그들의 어머니는 침실 부역(그들의 주장에 의거하면)을 행사한 국가에 대한 대역죄인들 이었을까? 그들은 그들의 어머니와 함께 낙인을 받을 만큼 잘못했던가는 두고두고 생각해봐야 할 문제인것 같다. 인간이 인간에 대해서 정의 내리고 처벌할 권리는 어디까지인가. 국가적 테두리에서 생각한다면 그들(혼혈아의 어머니들 아버지들)은 국가의 존속(전쟁시기의)을 위험하는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개인적인 테두리로 넘어와서 생각해본다면 사람이 사람에게 애정을 가진다는 것이 그렇게 죄악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전쟁 당시 그로 인하여 국가에 미친 위해는 거의 미미했던 것으로 느껴졌다. 다만 여성의 몸을 통해서 전쟁을 상징화하는 부분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이전에는 전후 그들이 부역한 자들에 대해서 처벌하는 태도에 대해서 매우 모범사례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 크게 수정을 해야할 것 같다. 생활형 부역은 분명 어느정도 선까지는 구분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도외적인 책임에 대해서 해방된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지식인이라고 칭해지는 자들의 부역과 그들의 부역에 대한 무게는 분명 구분되어야 하는 것 같다는 것. '알아야 할 권리'를 어디까지 두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개개인의 입장을 생각해본다면 살아남는 것이 최우선이 아닌가. 누가 그들을 비난해야하 할까? 그 부분에 대해서 자유로운 사람이 얼마나 될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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