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은 노래한다 7
타카야 나츠키 글.그림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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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데가 그런 모습으로 힘들게 일어나려고 하는 그 이유를 알게되는 권이었습니다. 아 보면서 정말 진심으로 카나데의 부모에게 분노가 치밀더군요. 누구는 이런 말을 할지도 모르겠어요. 현실이 아닌 이야기에 그렇게 고군분투하면서 보는 이유가 뭐냐고. 저 아이의 이야기는 이야기속의 이야기지만, 분명 현실이기도 하니까요. 저자인 타카야 나츠키씨에 대해서 그 양반의 그런 여러가지 패턴에 대해서 자가 복제 성향이 강하다던가 아니면 항상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한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그건 반복할 수 밖에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뭐 작가라면 누구나 자기의 이야기를 패턴을 조금씩 바꿔가면서 반복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다만 이런 무거운 주제의 이야기는 이 양반이 평생을 걸처 작품에 나타나도 비난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는 생각입니다. 그만큼 굉장히 힘들고 고된 작업이니까요. 극복이라는 말은 아에 존재하지 않으며 그건 다만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것 그리고 앞으로 그런 일들이 더이상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것 이외에 달리 뭐가 있을까요? 저자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이야기를 그려나가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는 모르지만, 작품의 캐릭터들을 보면서 저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어떤 이야기일까에 대해서는조금씩 인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 스스로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얼마나 힘을 내는지 그리고 그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작업인지 보여주는 것 그자체가 전 참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어디선가 그런 상황으로 고통받는 누군가에게 힘을 줄수 있으니까요. 분명 그녀의 메세지는 그 누군가에게 도달하리라고 믿습니다. 
카나데에게 저는 앨리스 밀러 여사님이 자신의 수많은 책에서 했던 이야기인 "부모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은 아동이 해야할 일 또는 의무가 아니라는 것"에 대해서 말해주고 싶습니다. 칼 로저스에 의하면 있는 그대로 존중해야 하는 긍정적 존중에 '가치'라는 어른들이 내세우는 조건이 붙으면서 인간(유기체)의 '실현 경향성'에 '왜곡'이 일어나서 여러가지 문제가 생긴다고 하더군요. 부모가 만들어낸 혹자는 심어버린 이상적인 자기는 자신이 자신을 위해서 온전히 형성된 현실적 자기와 충돌하여 많은 문제점을 야기하고 이상적 자기와 현실적 자기의 충돌에 의해서 그 개인은 많은 문제로 버거워 한다고... 
카나데가 앞으로 나감에 있어서 그 부모들이 그에게 만들어준 그런 배경들은 얼마나 많은 시간동안 그를 잡고 늘어질지 아무도 모르겠죠. 그 자신도 모르고, 그 부모도 모르고... 그래도 그는 용기 있는 아이니까 그리고 함께 나아갈 사람도 있으니까 결코 포기하지 않을거라고 믿습니다. 언젠가는 그런것들이 극복된게 아니지만, 그래도 그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있고 그런 부모가 되지 않겠다고 덤덤하게 이야기하는 모습이 되기를 소망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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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수놓이는 소리 4 - 완결
진 토리코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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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권이에요. 우리의 현실과 아주 부합한 엔딩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경계를 넘어가서 만들어진 세계에서는 가능할지도 모르는 초월적인 이상이나 꿈은 없었어요. 엔딩조차 잔혹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어서 뭐라고 말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종의 개체로서 살아있는 이유에 대해서 알게되어 구원 받은 - 구원이라는 단어가 애매할지도 모르지만, 환경에 의해서 보통(보통이라고 정의되기도 애매하지만)의 혹자는 이상적인 인간이라면 알고 있어야 할 인간의 따스함을 알게 된 부분- 존재는 체리이더군요. 그런 의미에서는 이건 역시 만들어진 이야기 일지도 모르겠어요. 현실세상에서 그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으니까요. 전 그런걸 두고 '기적'이라고 한다고 어딘가에서 본 것 같아요.
그는 인간으로서 고독한 삶으로 끝나지 않았어요. 삶의 고독했던 그에게 살아있는 인간의 온기는 오직 아저씨 뿐 이었지만, 아저씨의 마음에는 체리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수 많은 다른 존재들이 있었어요. 그런 아저씨를 보는 걸 그는 괴로워하더군요. 마음속에는 하나의 존재만 있어야 하고 그 가치를 인정받는것은 오직 하나의 존재라고 생각하는 걸로 보여졌습니다. 자신이 선택받지 못했다는 분노와 자신이 그런 버림을 받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분노하고 그리고 그 분노를 그들의 대표적 존재에게 토해내고 있었습니다. 체리는 보는 눈이 있는것 같습니다. 아저씨나-, 족장님이나- 모두 그런 그의 부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줬으니까요. 살아있는 존재로서 고독하게 살아왔던 그의 삶을 그는 그것을 지나치게 괴로워 하는 것이 아니라 슬퍼하며 정면으로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의 괴로움도... 그의 분노도... 포장이나 확대도 없이 그저 그것을 온전하게 바라보고 있었어요.
인간으로서 고독했던 그에게 빛은 내려왔습니다. 아저씨는 그의 마지막 말을 듣고싶다고 말했고, 구스타가 그에게 왔고 그리고 그녀가 그를 향해서 날아왔습니다. 자신의 고독과 그 두려움을 알아주는 그녀가 그에게 왔습니다. 구스타와 함께... 그리고 구스타는 아저씨에게 그가 결코 고독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려주고 다시 그들을 향해서 갑니다. 이번에는 그와 함께 있어주기 위해서요.

종으로서 멸망을 눈앞에 바라보고 있는 그 위기에서도 헬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원으로 그 상황을 포지티브한 상황으로 해석합니다. 그리고 일족의 재앙을 생각하며 두려워 하며 이런 비통한 현실에 괴로워하는 그의 소중한 친구에게 희망의 메세지를 전합니다. 그리고 일족의 마지막 예언자인 리버는 그들에게 그들이 종으로서 고독한 존재가 아니라는 메세지를 전합니다. 절멸의 위기는 그들을 살짝 빗겨간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혼은 소중한 존재인 폭스를 가슴에 묻게됩니다. 작가는 이야기의 끝에서 그 위기에서 살아남은 그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대해서는 이야기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일족의 마지막 예언자가 자신을 희생해서 교환한 그 노력은 어딘가에 있는 소수민들의 힘이 되어주는 것은 실패했다는 사실은 분명하게 (사실 저는 '냉정하게'라고 적고싶습니다) 보여주더군요.
리버는 예언자의 마지막 힘을 쓰면서 인간이 종으로서 살아남기 위해서 했던 취사선택안에서 그들의 버리고 가야 했던 것들을 보고... 그리고 그들이 그것을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슬퍼하는 부분도 있었다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그러나 로드가 리버가 이해한 그런 것들을 모두 이해했고 그가 그들을 위해서 대안을 내려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들-인간-이 살아가는 그 공간에서 소수자의 위치를 지켜주는 것에는 한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현실이고 지금도 여전히 반복 재현되고 있는 누군가에게는 절망적인 현실입니다. 그가 그런 부족한 부분들을 받아들이고 그것들을 어떻게 수정해서 앞으로 나아갈지는 인간으로서 그들-그와 그외의 인간들-의 전망에 따라 다르겠지요. 이것이 참혹하다고 제가 생각하는 현실입니다.

한편으로 종으로서 고독하지 않았다고 예언한 리버의 예언은 그들의 종은 공룡에서 새라는 존재로 이어저 내려오고 있고... 어딘가에는 다른 새종족을 찾아서 혼자서 여행을 하고 있는 그 아이의 모습도 그리고 어딘가에서 부락을 이루고 다시 그들의 깃털을 기르고 살아가는 그들을 예견하고 말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리버는 로드와 등가교환법칙에 의해서 소수자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그런 대안 혹은 최악의 상황을 대비한 장치 아니면 예비책을 마련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들의 일족들이 그 오지에서 살아남아서 개체성을 이어간다면 그들은 이전에 그들이 생각했던 그런 온전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을 선택하지는 않을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의 고유성을 어느정도는 놓아두겠지만, 중요한 부분은 아마도 구전되는 방식이던지 아니면 그들의 신화로 남아있는 방식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혹자는 그들의 생활 습관에 일부로 남아 있는 방식이겠지요.
그런식으로도 다른 개체의 문명과 함께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그들은 종으로서의 몰락될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이 생겼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는 저의 모습을 보고 몹시 슬퍼졌습니다. 개체로서의 고유성을 그대로 유지한다면, 그들은 그들로서 이전의 방식으로는 그대로 살아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또다시 인간의 존재 - 스스로가 완벽한 혹자는 중심인 문명을 이루고 있다고 주장하는 - 에 의해서 그들은 세상에 재발견 되는 날이 필연적으로 오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는 철저하게 박물관화가 이루어지며 유린당하고 그리고 그들-인간-의 시선으로 해석되고 소비되겠지요. 오늘날의 많은 소수민족의 언어와 문화가 그러듯이...

무엇을 선택하는 것이 바람직한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살아있는 것 자체로가 의미가 있다면 있는 것이겠지만, 자신의 원형을 유지하지 못한 것에 대한 박탈감은 분명 평생 담고 살아갈것 같습니다. 정체성에 대해서 끊임없이 고민하고 번뇌하고... 그리고 새로운 답을 찾아서 떠나는 형국으로 말이에요. 세상에 나오는 길을 선택하고 그리고 나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나아가는 길은 정녕 없을까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좀더 형평성을 유지한다면 그런 영역의 대안들을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국가에 속해있지 않아도 인간으로서의 개체의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고 그들 스스로의 경향성을 지원받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 고유성에 대해서 서로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하다면요. 양극단을 오고가는 이 세계의 주축이 되는 이 세계관은 어떻게 해야지 극복이 가능할지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전 좀 네가티브한 면이 있어서 '살아있다'라는 것 만으로 충족되는 사람은 아닌가 봅니다. '살아있다'라는 그 텍스트는 여러방향으로 연결이 되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숨을 쉬는 것 뿐만 아니라 나라는 고유한 개체가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그 공간에서 개인의 고유성을 존중받고 그리고 내가 앞으로 나아가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양극단을 오가는 논리로 비난받고 결박당하는 일이 없어서...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 온전하게 인간으로서 개체로서 살아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현실적으로 불가능 하다더라도... 살아있다라는 느낌을 조금이라도 느끼기 위해서는 환상이 필요한겁니다. 지금의 이 논리와는 다른 방향으로 공존 할 수 있는 길이 반드시 있다는 환상... 그 환상은 지금의 저를 서있게 하는 가장 큰 힘이에요.
사실 마지막에 잭이 우는 장면에서... 그가 모두에게 그가 보고 듣고 체험한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그것이 만들어진 이야기로만 받아들여 지고 그리고 그들의 살아가기 위한 경향성을 충족하기 위해서 자신들의 나름의 필터링으로 걸러내서 듣는 현실이 그에게는 굉장히 고통스러운 부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분명 그에게는 가슴속에 살아있는 사실이고 그의 소중한 마음인데 그것이 그냥 그것이 아니라고 받아들여 진다는 사실이요. 인간은 얼마나 자기가 보고 싶어하는 면을 볼려고 애쓰고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부던히도 스스로를 세뇌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에게 이 불합리하고 고통스러운 세계를 살아가면서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위에서 말하는 그 이상이라면, 그들에게는 잭이 말해주는 이야기 - 잭에게는 사실 - 가 필요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서두에서 잭이 했던 걱정은 그냥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자기 관점적인 걱정일 뿐. 그런 일은 현실에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진심으로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잭의 최악의 상황이 온게 아니라서 다행일지... 아닐지. 나탈리가 그가 말한 진실을 진실이 아닌 그녀를 위한 이야기로 받아들였다는 사실 말입니다. 아 인간에게는 멋진 방어기제가 있어서 이런 세상에서 살아남기에 충분한 것 같아요. 그들(조인)은 이것을 알았을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잔혹한 공간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필요한 충족조건이죠. 어떤이는 '낭만'이라고 부를지도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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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 Piece 4
아시하라 히나코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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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미의 엄마는 뭔가가 굉장히 많이 - 중첩되는 표현이지만 그래도 강조하기 위해서 사용해봅니다 - 결핍된 사람이었어요. 전권에서도 그런 사람인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이정도의 막장일줄이야. '막장'이라는 단어의 선택하는데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어요. 그런 가학적인 어른에게는 그 단어는 그 사람을 인간으로서 대우 해주는 가장 예의바른 표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무리 그사람이 어린시절이 결핍되어 있었고 그리고 그 문제들이 여러가지 양상으로 나타나서 지금에 이르렀다고 하더라고 해도요. 그 사람은 성인이고 그리고 본인이 아이를 낳아서 키우는 것까지 선택한 입장이고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부분인데 본인이 그부분에 대해서 돈을 처발라서 공부를 했는데도 그모양이라는 사실을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습니다.
굳이 자신의 아이들에게 그런 실험을 해야 할 당위성이 있었을지 저는 그게 계속 머리에 남아있었습니다. 아니 이건 뭐... 행동주의이론이 초기에 등장해서 사람을 대상으로 조건형성에 대해서 이론을 정립하는 그 호랑이 담배피던 그 시절도 아니고 수많은 연구자들이 연구해서 그 타당성을 근거로 인간에게 필요한 것들에 대해서 굉장히 광범위하게 나와 있는 이 시점에 말이에요. 자신의 아이의 인권은 어디로 보내셨나요? 그녀는 의료인으로서도 그리고 엄마로서도 '인간실격'이었습니다. 자신의 행위에 분명 당위적인(스스로 합리화를 하기 위한) 근거가 있었을 텐데 그저 단순하게 학문적 호기심이라고 대답한 그녀의 대답은 저에게 아무것도 채워주지 않더군요.  

나루미네 가정부 아주머니와 고용인과 고용자의 관계 이전에 의사와 환자의 관계에서 이미 의존적 관계를 형성해서 자신의 목적에 그녀를 이용했다는 사실도 가히 충격적이었습니다. 환자(내담자)를 자신에게 그렇게 의존적으로 만들어도 된다는건 자신이 배운 지식의 어디에도 적혀있지 않을텐데 말이에요. 뭐 배운대로 그 정확한 가이드 라인을 그대로 준수하며 의료를 행하는 의사가 대부분이라면 불만제로에 나오는 어의없는 의료계의 위생개념이 전혀 없는 그런 보도들은 나올리가 없겠지만요. 덕분에 저는 정신적인 부분을 담당하는 의사에게는 다른 의사들보다 더 큰것들을 기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한 아이에게는 애착대상을 계속 탈락시켜버리고 다른 아이에게는 그 반대방향으로 양육하여 얻으려고 했던 결과는 뭘지 궁금해졌습니다. 분명 그 안에는 자신이 생각한 시나리오가 있을거 아니에요. 어떤걸 기대하니까 어느 아이에게는 그것을 탈락시키고 어느 아이에게는 그것을 과잉 공급했을테니까요. 불행중 다행인지 불행중 더 불행인지 그 두아이는 연결고리가 생겨버려서 그녀가 예상하는 그런 결과가 나오지는 않았지만요. 그녀 자신은 그녀가 상황을 만들어서 선택하게 만든 그 환자이자 나루미의 가정부가 두아이의 연결고리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지 저는 그게 가장 궁금해졌습니다.

미즈호가 불안해져서 생각이 1에서 10로 점프하고 그로 인하여 아무것도 못하는데 그런 그녀를 상황을 그대로 바라보고 그리고 그 지금 크게 올라오는 감정(2차감정) 아래에 있는 감정(1차 감정)을 찾도록 도와주는 나나오 아줌마를 보면서 그래도 이 만화의 엔딩은 그렇게까지 절망적이지는 않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주머니는 알고 있으셨어요. 다른 한편으로는 히로와 히카루는 서로 만남으로서 서로에게 어떤 영향들을 미쳤을지 상상하게 되면 다음권을 펼치기가 두려워 지지만요. 전 그래도 작가분을 믿어보고 싶습니다. 굉장히 절망적인 부분도 있지만, 그래도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부분도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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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파리 공주 1
히가시무라 아키코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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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님 블로그에서 일본 현재 판매 순위와 그 인기 단행본에 대한 소개를 보고... 보게되었습니다만, 중요한건 그것보다 다른게 더 포인트이더군요. 그분의 소개에서는 '일러스트레이터를 꿈꾸며 상경한 오타쿠 소녀'가 만난 '여장남자'라는 소개에 뒤에 더해진 중요한 포인트는 '그 여장남자 총각의 집이 사실 정계 유명인사 집'이라는 설정이라는 부분이었습니다만, 저는 이쪽 설정보다는 다른 설정들에 정말 깨알같이 웃었습니다. 일단 크게 웃어보겠습니다. 으하하하하하!!!!
이 양반 센스가 정말 탁월해서 보는 내내 굴러다녔어요. 설정도 설정이지만, 이 만화의 백미는 작가의 후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 만화는 설정을 보면서 묘하게 리얼리티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부분에서... 리얼리티가... "..." 줄임표 부분은 후기를 보시면 알게되실거에요. ^_^ 싱긋~  함께 단행본을 본 친구 녀석도 작가분이 학창시절에 그리셨다고 한 마그리트풍의 해파리 그림을 정말 보고 싶어 했습니다. 전 후기를 보면서 들었던 생각은 만약 이 양반이 미국에서 태어났으면 해파리 일러스트로 전위적이라고 평가를 받는 화가가 되어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상상을 잠시했습니다. ^^;; 그래서 다행이에요. 일본에서 태어나시어 저희들에게 큰웃음을 주는 만화를 그리시니까요. 만약 이 양반이 화보집을 내시면 해파리 화보집이 되겠지요. ㅎㅎ 덕분에 왕년에 보고 충격받았던 <절애> 작가의 세미 누드가 포함된 화보집이 떠올랐습니다. -_=;;  

간단하게 스토리를 소개하자면, 엄마와의 해파리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을 가지고 있는 그녀는 그 덕분인지 해파리를 너무 좋아하게 되어서 모든 일러스트란 일러스트는 해파리를 그리며 버닝하는 아가씨가 되었습니다. 일러스트레이터의 꿈을 가지고 동경에 상경한 해파리 아가씨 츠키미는 '아마미즈칸' 이라는 공동 아파트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이 아파트는 모두 분야는 다르지만 자기의 장르에서 한가닥(?)씩 하고 있는 여성 오덕 동지들이 모여서 사는 아파트로, 번역에서는 '동인녀'라고 소개하고 그 후에 '한 가닥 하는 오타쿠녀'라고도 소개했는데... '동인녀'와는 굉장히 거리가 있는 편인지라 '오타쿠'라고 명명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라고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암튼 스스로를 '아마즈(여승)'이라고 부르는 그녀들이 가장 두려워 하는 사람들은 멋쟁이들 이었습니다. 그런 츠키미 앞에 어느날 멋쟁이 아가씨와 말을 섞을 일이 생겼습니다. 게다가 그 아가씨는 위기에 빠진 해파리짱을 구하는데 큰 도움을 주기까지!!! 그러나 그녀인줄 알았던 멋쟁이 아가씨는... 멋쟁이 아가씨가 아니라 멋쟁이 청년이었습니다. >_<;; 그의 취미는 여장하기. 그리고 타인을 꾸며주는 것도 좋아하는 특이한 청년으로 사실 그의 집안은 굉장히 유명한 정치가 집안이었습니다. 그와 자꾸 엮이는 그녀! 그리고 그는 그녀를 멋쟁이로 새롭게 변신을 시켜주고... 그 멋쟁이 모습을 보고 그의 형이 반하게 됩니다. 그러나 형님은 그녀의 맨얼굴은 못알아 보시더군요. OTL
2권이 굉장히 기다려지는 작품이고 그리고 국내에 작가의 전작이 번역되어 있다는 사실도 알게되었습니다. <해바라기 켄이치 전설>이라는 작품으로 13권으로 완결되었다는 것을 단행본 뒷페이지의 광고로 알게되었습니다. 참으로 적절한 광고더군요. -ㅂ-;; 덕분에 정말 유쾌했습니다. 오랜만에 포복절도하는 당사자 만화라고 생각했어요. 공동 아파트에 사는 동거인들에 대한 세세한 설정도 좋았어요. 보면서 그린우드내의 '체리우드'도 살짝 생각나서 ... 그래서 더 웃었던것 같기도 했습니다. 앞으로 계속 볼 예정이고 이 양반의 전작들도 찾아볼 예정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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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은 노래한다 1
타카야 나츠키 글.그림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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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라는 존재는 과연 무엇일까에 대해서 언제나 화두를 던지는 타카야 나츠키 선생은 사실 <날개의 전설>때부터 좋아했었다. 과거형인 이유는 <후르츠 바스켓>을 중도에 포기했기 때문. <날개~>때와 매한가지로 여전히 힘든 상황에서도 미소를 잃어버리지 않고 모두의 아픈 부분을 보듬어주는 토오루가 있었고 그리고 토오루와 고양이군을 응원했지만, <후르츠 바스켓>작품내의 특유의 음습한 분위기와 그리고 그 여자의 캐릭터를 견디기가 힘들었었다. 뭔가 단행본이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나락에 빠지는 기분이랄까. 뭐 여튼간 당시에는 그런 기분이 나를 사로잡았었고 그래서 지금도 <후르츠~>의 엔딩은 모른다. 그 후 전개도.
그 시점으로 이 양반에 대한 애정을 접고 있다가 현재 출간되고 있는 <별을 노래한다>를 잡았다. 동기는 그냥 최근의 이 양반은 어떤 상태일까에 대한 궁금증에 가까웠다. 백천사 라인쪽에는 좋아하다가 대작이후에 망가져서 다시 볼 용기조차 내기 힘든 작가분들이 많은 관계로 이사람도 그렇게 되었는가 아닌가가 주요 관심사 이었다. 이 양반이 하고 싶은 이야기의 주제는 항상 일괄되게 관통해있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이번 연재작에서 그 부분에서 그 이전보다 굉장히 강렬하게 표현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5권에서 아오이가 치히로의 부모에게 외치던 절규는...
 
" 경찰?! 웃기지 마! 어른은 그렇게 태연하게 짓밟고서도 보호받는거야?
그런데 왜! 이건 너무하잖아. 왜 사쿠라는! 왜 아이들은 지켜주지 않는거야...!!!"

부모로부터 정신적 학대를 받지만 부모에 대한 애정을 포기하지 않았던 사쿠야. 아이는 부모의 애정을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에 부모가 자신을 학대하는 상황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은 굉장히 정상적인 반응이다. 아이들의 마술적 사고안에서는 부모의 그런 학대하는 모든 행동들에는 반드시 어떠한 이유가 있다고 믿는 것이 보통 일반적인 반응으로 알고 있다. 그 이유는 뻔하다.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한다던가. 아니면 자신이 부족해서 그런 행동을 야기한다던가. -_-
학대받는 아이들이 세상에 살아남기 위해서 자기에게 거는 체면이 얼마나 강력한지 생각하면... 나는 달려가서 그 부모를 정말 ... 아 정말 그런 어른들은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렸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고 싶지만, 그 사람들도 그렇게 살고 싶어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아버렸기에 이 분노는 어디로 가야 할 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역시 아이에게 화를 내기보다는 부모에게 화를 내는 것이... 그네들이 자신들이 그렇게 이외에 살수없었다는 당위적인 이유를 대어도 그것이 최선이라고 믿고싶지 않다는 것이 나의 진심이다. 그래서 나는 부모에게 화를 내야겠다. 당신이 성인이 되서도 성인아이로 남아있어서 당신뿐만 아니라 당신의 자식과 배우자에게도 당신의 그 불행을 노래하는 거지같은 사고의 패턴이 침식하고 있으니 책임지라고. 제발 좀 정신좀 차리라고. 솔직히 말하자면, 성인아이인 부모라면 결혼을 했어도 아이를 키우는 것에 대한 무게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자신의 현 상태를 그 주제를 알도록 노력해보라고 말하고 싶지만, 퍽이나 그런게 가능하겠는가. 분명 그들은 자신의 공허함을 메우기 위해서 최선의 선택을 하겠지. 차라리 제도적으로 뭔가 장치가 마련되었면 하는 하는 바램이다. 최소한의 교육이라도. 인간이 인간(아이)을 키우는 무거움에 대해서 말이다. 아이는 당신의 삶의 공허함을 메꾸기 위해서 만드는 존재가 아니라구.

부모에게 애정을 받기 위해서는 부모가 원하는 아이가 되어야 했고 그렇게 되도록 사쿠야는 부던히 노력했지만, 그녀에게 떨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자신의 아이의 고통어린 호소는 들리지 않는 부모. 자신의 삶(이익)이 우선이기에 아이는 도구도 아닌 쓰레기로 취급하고... 존재자체를 부정받는 그 상황에서 아이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치는 거의 없다고 보는것이 답이겠지.
부모로부터 방치와 부모화를 요구받는 자신의 상황에 대해서 표면적으로는 부모에 대한 애정을 포기한 것 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살아남기 위한 한 방법으로 가면을 쓴 아이 치히로. '자신에게 기대하는 것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런 엄마에게 애정을 갈구하고 매달리다가는 자신까지 망가지겠다 싶어서 엄마를 포기했다는 그의 말. 그래서 더더욱 그녀(사쿠야)를 이해하기 힘들다는 그. 굉장히 달라보이지만 결국 똑같은 두아이. 두아이는 그저 살아남기 위해서 조금 다른 선택을 했을 뿐이었던것 뿐.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은 개개인마다 다르니까.

그의 작품에서 등장하는 모든 아이들은 이 사람이 뿌린 다른 장치(주로 개그지만)들로 인해서 처음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굉장히 고통스런 부분을 마음에 담고 살아가는 아이들이 나온다. <날개의 전설>에서도 버려진 아이의 상징으로 나오던 그녀. 그리고 그녀에게 반해서 그녀를 따라다니던 그 또한. <후르츠 바스켓>에서도 상처를 가지고 살아가는 많은 아이들이 등장한다.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원가족에게 버림받았다는 사실은 얼마나 아이에게 치명적인가를 생각해보면 그 아이들은 정말 나름대로 그 나이의 아이로서는 잘 견디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별의 노래한다>에서는 주인공인 시이나와 아오이뿐만 아니라 시이나의 동거인이자 보호자인 카나데도. 그리고 친구인 히지리와 유우리또한 그런 부분들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자식을 방치하는 누나로 부터 조카를 대려와서 함께 사는 아오이의 삼촌에게도 그런 부모가... 그러니 아오이의 엄마는 부모의 죽음에 대해서 그런 방법으로 반응했으리라고 생각한다. 최근 읽는 책에 의하면 자신의 성격의 형성에 영향을 끼치는 세대는 부모 그리고 조부모 또한 자신에게 굉장한 영향을 끼친다고 나와있었다. 치히로의 엄마는 '어떠한 이유에서 그런 삶을 살았을까?' 하고 생각해보면 답은 굉장히 간단하다.

삶을 거의 놓아버린 아오이 앞에 나타난 카나데. 그들은 처음부터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개인적인 생각은 그들의 만남은 고통을 알기에 그 고통에 반응해버린게 아닐까 싶다. 상처가 있는만큼 보인다고 생각한다. 평범하다고 말하는 범주의 삶을 선택받은 아이들은 아래에 내려와도 이해하기 힘든 공감대. 아오이 자신을 위해서 사쿠야를 사쿠라로 보고 말을 했다고 해도, 사쿠야는 구원받았다. 그의 말에. 온전히 자신을 있는 그대로 긍정해주는데 그 사랑스러운 말에 행복해지지 않는 인간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말은 매우 반짝거리는 말들이었다. 그가 그 말을 하게된 이유도 그녀에게 그말이 필요했다는 것을 직감 혹은 본능적으로 알았기 때문이라. 그녀에게 끌리는 이유도 결핍된 부분을 서로가 채워줄 수 있고 그리고 다시금 앞으로 나아가고 싶기 때문이라.
앞으로 나아가더라도 살아감에 있어서 그 구멍은 메워지는 것이 아니니까 또 그 구멍을 다시 만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 구멍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반짝거리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고 고통 받은 자신을 사랑해주는 현재가 있어야지만 가능하리라. 앞으로 나아가는 사쿠야와 카나데. 견딜 수 없는 죄책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치히로는 그녀의 손을 놓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두고 현재를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는데 다행히 그의 과거를 알게된 사쿠야는 여전히 그에게 손을 내밀며 웃고 있었다. 그런 사쿠야를 걱정하는 히지리는 치히로를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 반대하지만, 그녀의 '혼자 두고 가고 싶지 않아'라는 말 한마디에 그녀가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알게되었고 그리고 그것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상처들을 서로 보듬어 주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이들의 미래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다음권을 봐야지 알 수 있겠지만, 그래도 굉장히 걱정하는 마음이 줄어든건 괴로워 하는 치히로를 보듬어 주면서 생각하던 카나데의 독백때문이었다. 힘내렴.
그것들을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것들을 안고 앞으로 함께 나아가는 건 분명히 가능하다고 생각해. 그때 그녀를 위해서 해줄 수 있는 것들은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해. 아마 네가 옆에 없었다면 그만큼도 버티지 못했으리라고 생각하는 건 아마 나만이 아닐꺼야. 그것을 알기에 그녀도 그런 행동을 했던거고. 어른들이 해줘야 할 부분을 그 사람들이 방치해서 그렇게되어버린거야. 원가족과 분리하는 것은 제도권의 시스템과 그리고 원가족의 다른 한 부모가 그 사태를 정확히 알고 개입해야지만 가능한데, 그들은 자신들의 그 구멍을 체우기 위해서 당신들의 딸을 희생한... 그 구멍은 다른것들로 체운다고 해서 체워질 구멍이 아닌데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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