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8일 남장체험 - 남자로 지낸 여성 저널리스트의 기록
노라 빈센트 지음, 공경희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07년 8월
평점 :
절판


사실 이 책을 도서관에서 책 표지를 처음 봤을때는 이 책이 소설책 인줄 알았어요. '남장체험'이라는 텍스트는 확연하게 눈에 들어왔고 책의 표지도 소설책 같다는 뉘양스를 강하게 풍기고 있었거든요. 소설책에서나 볼법한 텍스트의 서체로 적힌 제목 위에는 작게 고딕체로 "남자로 지낸 여성 저널리스트의 기록"이라고 적혀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을 빌리게 되었습니다. 그냥 남장체험 소설이었다면 지나갔을거에요.

책을 빌린 이유도 솔직히 개인적인 흥미가 동해서 그런거지 이 책을 읽으면서 남성의 삶과 고통을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은 전혀 없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그들의 고통이 여성과 매한가지로 억압받는 고통이라 한들 여성으로서의 삶의 안에서 경험한 것들의 고통이 더 크게 느껴지기 때문에 그들의 어떠한지 알아야겠다는 목적보다는 그들이 누리는 젠더계급을 기반한것들은 어떤것들을 당연하게 누리고 성취감을 얻고 앞으로 나아가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특히나 최근에 저의 이슈는 과거의 저 자신이 받았던 피드백들이 저 개인에게 문제가 있는것이 아니라 성차적인가 아닌가에 열을 올리고 있었기에 이 책이 우리에게 던지는 어려움과 불편함은... 복잡 다양했습니다. 아 뭐라고 말해야할지.......... 한마디로 정리하기 어려웠습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머리로는 이해하는걸 마음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고 해야하나요? 남성또한 가부장적 사회의 기반아래에서 요구받고 억압받는 것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어요. 지금까지는 전 그걸 그냥 머리로 이해하는 쪽에 가까웠던거 같아요. 뭐 암튼 그렇습니다. 오늘 도서관의 반납일이라서 서둘러서 책을 끝까지 읽고나서 이 책을 통하여 뭔가가 많이 남았는데 그것들을 정리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거 같아요. 


으음. 좀더 노골적으로 솔직하자면 후반 어느부분까지는 저자의 흐름에 공감하며 따라갔지만, 전 여전히 그녀처럼 전적으로 혹은 완전하게 -제가 느껴지기엔- 공감하기 힘들었던거 같아요. 마지막 파트의 남성 집단에서의 체험 부분은 더더욱 그러했습니다. 누군가를 해하고 싶은 마음을 고백하는 부분이 특히 그러했어요. 자신의 배우자너 반대쪽 성의 부모를 칼로 난자하고 싶다던가... 그래서 이 부분을 읽을때는 특히나 더 힘들었습니다. 처음 그녀가 그랬던것 처럼 그들의 그말은 위협적으로 다가왔거든요. 그런데 그녀는 그런 그들의 고백을 불편해 여기다가 갑자기 어느 시점에 시공간을 이동해서 다른곳에서 그들의 입장을 공감하고 있었어요. 분명 여기에 같이 있었던 저자는 저 멀리 가버리더군요. 그것도 순식간에. 그들안에서 나약한 모습을 발견하고 그리고 커보이기만 하는 모습은 실제의 자신을 크게 띄워서 평가를 받기 위함이라는 것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받아들이는거 같았어요. 

저자도 지적했지만, 이 집단에서 만난 대부분의 남성들은 그들의 어머나와는 멀어지기를 희망하며 아버지와는 화해하기를 희망한다는 설명에 저는 <남자가 하고 싶은 말>의 저자 테리 리얼이 떠올랐습니다. 


시스템 안에서 그들 또한 희상자라는 것을 머리로만 인식하고 있었다는 걸 많이 느꼈던거 같아요. 그리고 동시에 그들에게 요구되고 강요된 것들이 많지만, 그만큼 누리는 것들도 많기 때문에 솔직히 그들의 고통이 와닿는건 아니었습니다. 근육질 남자이기에 받는 대상화에 대한 어떤 남성의 고통스러워하는 고백을 보았음에도 저는 여전히 한편으로는 섬세하고 민감한쪽이 아닌 남성은 타고난 그런것들을 충분히 즐기고 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만난 사람중에서 그런 사람은 한명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구요. 현실에 없는지 있는지 모르는데 어떤 이미지를 만들어서 시스템 안에서 보장하는 것을 철저하게 누리는 사람들이 분명 존재할꺼라고 믿고 싶어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저 자신으로 부터요. 네. 저는 화를 내고 싶은거 같아요. 과거의 경험에 대해서. 그리고 여전히 성차를 적용하며 받는 것들에 대해서요. 

그녀가 말했듯이 가부장제는 한쪽만이 일방적으로 강요한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그 역할을 나눈 것이기도 하다는 말은 인정하기가 어려웠습니다만, 저 자신이 이 시스템에서 보호받고 누리는 것들이 떠오르더군요. 그런것들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제가 누리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갈망만 키운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었지만, 그보다는 그런식으로 사회화 되고 사회화 시키는 우리에 대해서 그리고 그런것들에 대해서 한치의 의문이 없는 점이 더 화가나는거 같아요. 그게 왜 당연한건지... 그건 이상한건데 말이죠. 언제나 의문을 제기했지만, 그거에 대해서 제가 아이와 청소년 시절에 어른들에게 받은 피드백은 대부분 싸가지가 없다는 말 이었던거 같아요. 성차가 당연한 거라면 그거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설명을 해줬으면 차라리 좋았을텐데 말이에요. 그 논리가 모순적일지라도요.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기 때문에 받는 기대가 다르고-성차에 따라서 요구받고 기대받는 것이 다르다는 것- 그에 따라서 강하게 비난받는 것이라는 걸 어릴때 알았다면, 그때 받았던 고통의 종류는 분명 달랐을거 같거든요. 제가 아둔한 아이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게 성차에 따라서 다르다는 인식이 매우 낮았어요. 그리고 그분들이 던지는 메세지는 언제나 동일했습니다. 평등하고 공평하게 양육하고 있다고요. 

다 성장한 저는 여전히 그 이유에 물려서 모든것들을 그런 프레임으로 바라보고 그렇지 못했을때 크게 분노하고 좌절하는 편입니다. 공평하다는 건 환상이라는 걸 심리학 개론책에서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여전히 공평한 세상을 기대하고 그리고 그런 대우를 받기를 희망하기에 여전히 그 이슈에 민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모든것은 제가 문제라고 설명하고 있었고 그건 시스템을 유지하고 보호하는 주양육자로 부터 매일매일 지겨울 정도로 받는 피드백 이었기 때문에 그 안에서 할 수 있는것은 별로 많지 않았어요. 자기 혐오나 부정으로 흘러갈 뿐이죠. 분노를 허용받는 남성의 입장이었다면, 그런 사회회에 대해서 분노하고 폭발했겠지만-그들은 분노를 표출하는 것에 대해서 사회적으로 비난받는건 없으니까요-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더 안으로 안으로 곪아 갔던거 같습니다. 물론 분노를 표출하는 입장이 더 건강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에요. 

그래서 가부장제를 동의했다고 하는 그녀의 주장은 매우 불편하게 다가오더군요. 그건 온전하게 동의한게 아니었어요. 강요받고 강요받고 또 강요받아서 결국에 동의하게 된 구조에 가까운거죠. 그걸 어떻게 적극적으로 동의했다고 할 수 있나요? 그건 어떤 의미에서는 엄연한 폭력이었습니다. 가치관과 프레임을 소유하고 있는 어른들에 의한. 


개인적으로 받았던 느낌은 이정도로 하고, 책으로 넘어가보면 이 책은 총 8개의 파트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녀가 남장을 해서 남성만의 세계에 뛰어들게 된 계기와 남성으로 보이기 위해서 노력하는 모습들이 파트 1에. 그리고 나머지 파트들은 그녀의 남장의 생활을 그린 '남자의 우정', '남자의 성욕', '남자의 사랑', '남자의 삶', '남자의 일', '남성의 자아 찾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우정 파트에서는 육체노동을 하는 남성들이 애용하는 당구클럽의 회원으로 성욕 파트에서는 스트립바에서 보고 경험한 것들. 사랑에서는 남성으로서 이성과의 데이트를 하는 여려움과 좌절과 그리고 여성들(?)의 극과 극을 향하는 남성에 대해서 기대하는 이미지에 대해서. 일 파트에서는 레드볼 영업사원으로 경험했던 것들. 그리고 마지막이 문제의 남성으로만 구성되어 있는 집단 체험. 마지막이 다시 여성으로 돌아오기 위한 여정이 담겨 있었습니다. 


남자의 사랑의 파트에서는 저의 동생이 연애를 하면서 어렵고 혼란스럽게 느끼던 지점에 대해서 저자도 말하고 있었습니다. 평등하기를 원하면서 한편으로는 남자가 리드해주기를 원하는 여자들에 대한 서술이 그러했어요. 그녀의 설명은 솔직히 여자들을 일방적으로 탓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사회화 되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이 공기같은 시스템 안에서 자유롭기 힘들다고 생각하거든요. 의식하던 의식하지 못하던 많은 부분을 영향받고 영향끼치고 있으니까요. 점차 바뀌어 가는 과정의 연속선상에서 우리가 존재하지만, 과거-더 근본주의적인 시스템이라고 말해봅니다-는 여전히 존재하고 그리고 그것들은 여전히 문득 문득 주변에서 그리고 저 자신의 안에서도 느끼고 있습니다. 근데 이런 여자들의 남성에 대한 기대는 강요받는 기대와도 비슷합니다. 사회적 성공과 그리고 여성적인 삶을 동시에 기대하는... 그건 솔직히 지금의 시스템에서 공존하기 힘든데 말이에요. 그리고 그런 사회적 성공안에서 여성적인 삶을 반드시 영위해야 한다는 건 솔직히 그건 시스템 안에서 살아가이 위해서 가지고 있는 환상이 아니고 뭘까요? 그건 그들이 혹은 우리가 기대하는 시스템 안에서는 불가능 한데 말이에요. 


마지막 파트에서는 그녀가 너무나 혼란스러워 하는 상황에서 다시금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정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우울증인지 소잔인지 자아 분열인지 솔직히 저는 잘 모르겠지만, 그녀는 한동안 상당한 피해망상에 시달리고 있었고 이를 치료하기 위해서 병동에 입원하기도 하고 자가 격리를 하기도 합니다. 그녀가 어딘가로 흘러가고 있다는 걸 느낀건 마지막 파트의 자아체험에서 학대를 해달라고 다른 집단원에게 부탁하는 장면에서부터 받았었습니다. 그녀가 이 프로젝트를 실행하면서 받는 것들이 어느정도일지 상상하기 어렵지만, 그렇게 하면 그런것들로 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정도로 그녀는 자책하고 있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여성으로서 돌아오고 나서 자신이 자신을 어떻게 인지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사람들이 어떤 성으로 보게 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구요. 결국 삶이란 스스로 어떤 생각을 하고 느끼는지 알아차리는 것이 동시에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알아차리게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책을 다 읽고 계속 그 자아 체험에서 그들이 말했던 타인에게 위해를 가하고 싶은 구체적인 것들을 고백하는 부분이 계속 머리에서 떠오르고 있습니다. 이 체험은 멜라니 클라인의 <아동의 정신분석>을 읽고나서랑 상당히 비슷한거 같아요. 아동이 자신의 부모를 살해하고 싶어한다는 걸 그들의 놀이의 상징화를 통해서 그리고 있다는 클라인의 해석은 매우 위협적 이었습니다. 

분명히 저의 안에서도 그런것들이 존재하기에 불편하게 다가온건 알고 있습니다만, 구체적인 누군가를 특정해서 어떤식으로 죽이고 싶어하는건 저의 망상속에서는 없었거든요. 자신을 위해하는 상상이 늘 차지했지. 저 자신이 주로 하는 생각은 특정 타인이라기 보다는 과거에는 저자신에게 그 방향이 향했고 그리고 지금은 자신을 포함한 전체-인간이라는 존재-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차이는 무얼까 생각하고 있는거 같아요. 아직 잘 모르겠지만요. 저는 늘 '차이'에 집중하는 타입이라서 방향성의 차이의 유의미함은 저에게는 매우 중요한 포인트인거 같아요. 어떤식으로 흘러가야 거기에 도달하는지에 대한 의문같지만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 홀로 부모를 떠안다 - 고령화와 비혼화가 만난 사회
야마무라 모토키 지음, 이소담 옮김 / 코난북스 / 2015년 7월
평점 :
절판


이전에도 비슷한 주제의 책들-<야마토마치에서 만난 노인들>,<우리는 어떻게 죽음을 맞이해야 하나>-를 읽었기에 이 책에서 크게 데미지를 받을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책을 읽는 동안 저는 '빡쳐있었다'에 가까웠던거 같아요. 누군가만이 부모의 노년을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에요. 저의 지금까지 삶을 관통하는 궤적의 주제인 '평등'이 건드리고 있었던 부분도 크게 작용한거 같아요. 

타인의 삶을 책임지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고 특히나 그 상대방의 죽음으로 가는 여정을 책임지는 건... 너무나도 어렵고 무거우니까요. 본질적으로 양육과 개호가 비슷하다고 할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 차이의 간극이 큰 지점은 희망과 희망 없음의 차이라는 것. 그렇기 때문에 개호가 왜 더 어려운지 알게 되었습니다. 미래의 가능성과 죽음... 그리고 개호자들이 느끼는 고립감. 

죽음으로 가는 여정이 어떻게 하면 더 윤리적이고 서비스를 받는 사람도 만족하고 그리고 그의 가족들도 만족하게 도ㅣ는지에 대해서 그리고 그런 어려운 일을 하는 사람에게 존경과 존중하는 태도를 보내야한다고 생각하기에 그들이 주변인으로부터 그런 피드백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에 크게 화가 났던거 같아요. 저자가 조사한 대부분의 가정에서 특정 한사람만 부모의 노년을 위해서 자신을 갈아 넣고 있었습니다. 다른 형제들은 자신의 삶을 살고 있는데 말이에요. 그리고 그들은 그런 형제를 위해서 (저자가 조사한 대상 한정으로) 대부분 금전, 정서적, 육체적으로 도움을 주는 일은 없었습니다. 허허허허;;

책의 1장은 어느 날 갑자기 부모의 보호자가 된 사람들의 이야기, 2장은 어느 한쪽-자신의 삶과 부모의 개호-도 포기할 수 없어서 애쓰는 사람들의 경험을. 3장은 치매 부모를 돌보는 어려움과 고통을. 4장은 개호를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독신자인 부분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5장은 집에서 개호를 하는 어려움에 대해서. 그리고 부록으로 한국의 사정-통계-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제일 먹먹 했던 파트는 치매 노인을 개호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이었고 가장 빡쳤던 파트는 4장 이었습니다. 그들은 과연 자발적으로 비혼자가 되었는가 아니면 그것은 비자발적인지에 대한 논의는 닭이 먼저인지 계란이 먼저인지 논의랑 비슷하게 다가오더군요. 혼자이기 때문에 당연하게 부모를 책임져야 하고, 그리고 혼자이기 때문에 부모의 죽음 이후의 자신의 삶도 스스로 온전히 책임져야 하는 부분... 후자쪽이야 당연한거겠지만, 전자는 뭐랄까 기혼이라는 것 자체가 면제부 구실을 하는건가 하는 생각이 들을 정도의 느낌을 받았습니다. 

우리와 다른 특이점은 기혼자중의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부모를 개호해야 할때 자신이 부모를 개호하기 위해서 직장을 옮기고 그리고 자산의 부모의 노년을 혼자서 온전히 떠안고 있는 부분이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에서 배우자가 그의 어려움에 공감하거나 현실적으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다는 설명은 없었습니다. 면밀히 말하면 내부모인건 분명하지만 함께 삶을 살아가는 입장에서 배우자가 개호의 주체가 되는건 아니더라도 조력자는 되어주는게 가능할거 같은데 그런것들이 부재한 상황이 좀 의아했습니다. 


책을 끝까지 읽고 받았던 느낌은 결국 자택 개호라는 건 시스템에서 책임지기에는 비용적 문제의 부담이 크기 때문에 결국 개개인의 희생으로 알아서 해결하라는 느낌을 받았고 실제로도 그러했습니다. <야마토마치에서 만난 노인들>에서 해당 지역의 지자체가 누리는 서비스는 그 지자체가 부유했기 때문이고, 지자체마다 복지의 수준이 다르기 때문에 해당 서비스를 누리기 위해서는 해당 지자체로 이사를 가야 한다는 사실. 소득차-거주지차-에 따라서 다르게 받는다는 상황도 헛웃음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책-<야마토마치~>-에서는 주로 복지에 대해서 촛점을 맞추고 있어서 개호를 하는 사람들의 입장의 어려움에 대해서는 산발적으로 서술되었기에 현실적인 어려움에 대해서 크게 체감하지 못했는데 이 책에서는 그런 부분을 정말 정면으로 볼 수 있었기에 '자택개호정책(?)'이 과연 누구를 위한 정책인가 하는 생각을 많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죽음을 맞이해야하는가>에서는 의사인 저자가 사회가 개개인에게 고령화로 인한 것들을 책임져라고 할 수 없다고 말하며 과거에는 노년에 이르는 여정이 짧고 그리고 투병의 기간이 지금처럼 그렇게 길지 못했기에 개인이 어느정도까지 책임지는 것이 가능했지만, 이제는 그런것은 더이상 불가능 하다는 그 선생님의 이야기를 자택개호를 하는 그분들에게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도 그분들이 느끼는 죄책감이 얼마나 줄어들지는 미지수지만. 곡기를 끊어서 죽음을 맞이하는 근대 이전의 전통이라던가. 노화를 죽음의 원인으로 인정하지 못하는 현대 의학계의 현실이라던가...  읽고나서는 일본보다 우리가 더 극심한 고령화 사회로 가고 있고 노인 빈곤율도 굉장히 높은데 우리는 어떠할지 생각하니 아득해졌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것은 썸도 데이트도 섹스도 아니다 - 아는 사람에 의한 강간Acquaintance Rape에 관해 알아야 할 모든 것
로빈 월쇼 지음,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연구소 울림 옮김 / 미디어일다 / 2015년 7월
평점 :
품절


데미지가 굉장히 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는 아니었습니다.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서술이 비교적 안전하게 서술된 느낌-대응 메뉴얼이 있었던 점이 그러했던거 같아요. 지속적인 노력을 담은 부분도 그랬던거 같구요.-을 받았던거 같기도 하고 성폭력 관련 저작을 이전에도 몇권 읽어서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제일 충격적 이었던 책은 <근친 성폭력, 감춰진 진실>이었어요. 그리고 두번째는 아마도 삼인에서 출간되었던 성노동종사자 이었던 분들의 글쓰기 치유책 이었던거 같아요. 솔직히 안전하게 느껴졌던건 저 자신이 트라우마가 없었기 때문에 읽으면서 외상이 재상연 되는 느낌을 받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는 사람에 의한 성추행을 당한 수준이 낮다면 낮은 정도 이었고, 그리고 무엇보다 상대방에게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사과를 받아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근데 그렇게 생각해보면, <근친 성폭력, 감춰진 진실>을 읽을때는 저 자신이 그런 트라우마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적인 데미지가 엄청났었거든요. 멘붕이 되는 수준 이었어요. 그때는. 전철에서 읽다가 울컥하고 한동안 그책을 읽지 못해서 좀 쉬어가면서 읽고 다시 읽어나가고 그랬어요. 

여하튼 각오를 다지고 읽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뚜껑이 열리게 하는 통계 자료를 봐도 그다지 뚜껑이 열리는게 아니었던건 내가 사는 국가도 여성을 향함 범죄 수준이 그러하기에 그런점을 그걸 현실로 직시하고 있어서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그것은 썸도 데이트도 섹스도 아니다>에서는 미국 사회에서는 그런 메세지-남성의 성욕구 표출의 정당화, 데이트 성폭력의 정당화-가 대학내 남성 서클이나 운동부 탈의실과 매체를 통해서 어떤식으로 계승되는지 말하는데 저 자신이 그런것들을 피부로 느꼈던 지점은 중고생 대상으로 하는 일본 순정 만화에서 가장 많이 받았습니다. 남자는 성욕을 조절하는 것이 힘든것이 정상적이며 보통 좋아하는 여자가 생기면 강압적으로 키스하거나 성관계를 강요해서 삽입하는 것이 지극히 보통이라는 메세지를 만화라는 매체를 통해서 줄기차게 던지고 있었고 유감스럽게도 그건 여전히 현재형이라서요. 

혹시 그들-저자-은 실제로 청소년 시절에 그런 데이트를 반복적으로 해왔고 그것이 지극히 당연하다고 생각하기에 그러한 상대방의 행동이 성추행 혹은 폭행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좋아하는 남자라고 해서 늘 오케이인건 아닐텐데 말이에요. 매체속에서 그려지는 아가씨들은 대부분 상대방의 그런 태도에 대해서 허용하지 못한다는 태도를 취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던거 같아요. 뭐랄까 연애를 하면 섹스도 따라오는 의무인 느낌에 가까웠던거 같아요. (저의 기억엔~) 그리고 나를 좋아하는 상대방이 그런 행동을 공개적으로 학교에서 하는데도 자신과 그리고 상대방-나를 좋아한다는- 그리고 주변 학우들 모두 아무도 상대방의 그런 강압적이고 가학적인 행동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다는 게... 꾸어어어...  내가 싫어하는 상대방이 내가 좋다며 그런 행동을 했는데도 말려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이야기자나요. 이런식으로 사회화 되어서 상대가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지극히 정상이라고 학습하고, 내현화 했으니까 현실이 아닌 상상의 공간에서도 이야기가 그런 흐름으로 이어지는 걸까요? 

사실 저 자신만해도 낯선 사람에 의한 성추행은 인지하고 있었지만, (피해자를 좋아한다고 주장하는)아는 사람에 의한 기습 키스나 뽀뽀가 성추행이라는 것을 인지하게 된건 비교적 최근이었습니다.................. 하하하. ㅠㅠ  부끄럽다. 좀더 정확히 말하라면 뭐 걍 아무런 생각이 없었던거 같아요. 내 나이가 몇인데!!!!!!  그냥 그냥 술마시고 한 실수가 아니라 명백한 성추행인데도 말이에요. 좋아서 행동했다는건 상대방의 핑계에 불과한건데도 그 논리를 저도 수긍하고 있었습니다.  

뭐 그런 망상을 가지고 있고 그걸 매체를 통해서 다양하게 표현하는건 명백한 자유이긴 하지만, 동시에 그 매체를 읽는 대상이 어떤 사람들인지는 인지는 하고 그려야 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최근들어서 좀더 빈번하게 하게되었습니다. 시스템에서 제도적으로 올바른 성교육을 시켜주지 못한다면, 청소년을 대상인 매체에서라도 올바를 데이트 정보를 전달하는것이 바람직한게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을 하기도 하고. 내가 내 망상을 발현하는거일지도 모르지만, 동시에 사회화 된 것들을 재상산 하고 있는거이기도 한데 그거에 대해서 자기 자신은 어떤식으로든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재상산을 표현의 자유 혹은 상상력에 의해서 나왔다고 봐야하는건지 아니면 사회화의 결과물이라고 봐야햐는건지도 고민의 주제중에 하나에요. 그런식으로 행동해야지만 좋아함을 표현하는것라는 공식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방식을 우리가 처음부터 그걸 선호했는지는 알수 없는 부분이니까요. 그런 선호가 있었는지 그렇게 선호하도록 길러졌는지는 모르는 일이니까요. 솔직히 저는 대부분 후자쪽에 가까운게 아닐까하고 생각하는 편이거든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
우에노 지즈코 지음, 나일등 옮김 / 은행나무 / 201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특히 모녀관계와 부녀관계에 대한 파트가 여로모로 저 자신에게 '재의미'를 부여하는 기회가 되었던 책 이었습니다. 몇년만의 여사님의 책인지 정확히 기억하는건 아니지만, 블로그에 있는 포스팅을 찾아보니까 대충 2008-2009년 언저리가 마지막이었던것 같아요. 2000년대 후반에 조한혜정과의 서신집인 <경계에서 말한다>를 읽고 이분에게 흥미를 가지게 되었고 이어서 <결혼제국>를 읽게되었습니다만, 여기서 꽤 강한 데미지 받고 한동안 다시 여사님의 책을 읽는 걸 포기했는데 친구 A양의 지속적인 영업과 최근의 여혐 이슈, 그리고 때마침 도서관에 이 책이 있어서 빌려서 보게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읽게 된걸 만족하고 있습니다.

친구의 말로는 치즈코 여사안에는 두가지 영혼이 공존하고 있다고 도쿄대 첫 여성 사회학 교수인 그녀와 키보드 워리어(우리로 치면 진중권 즈음?)의 그녀가 공존한다는 걸요. <결혼제국>은 그 키보드 워리어의 그녀로서의 저작이고 이번에 잡은 <여성혐오를 혐오한다>는 사회학자 + 키보드워리어가 혼재하지만 전자쪽이 더 강한 느낌의 책 이었습니다. 

근데 이 책이 이전에 읽은 책보다 덜 불편했던건 비난의 화살이 나 자신을 향하는 쪽이 아니라서 그럴지도 모르는다는 생각이 좀 들기는 했습니다. 이분법 구조로 나눈다고 하여도 시스템에 동조하고 사는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저 자신 또한 내부인인건 매한가기라서 건드려 지는 부분이 없다고 말하기는 애매한거 같습니다만. 가장 저의 와 닿던 부분은 '생산재-아들' '소비재-딸'로 프레임을 짜서 보는 부분이었습니다. 모녀관계나 부녀관계 파트도 강하게 각인되긴 했지만요. 전자쪽은 파트를 하나로 할당해서 설명했던 부분은 아니었는데도 그러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차브 - 영국식 잉여 유발사건
오언 존스 지음, 이세영 외 옮김 / 북인더갭 / 2014년 11월
평점 :
절판


사실 이정도 강도인줄은 모르고 잡았습니다만... 초반부터 최근에 봤던 영화 <킹스맨>이 강하게 떠올랐습니다. 읽으면서 영국의 오늘날의 모습에서 우리의 모습이 느껴져서 그래서 읽는게 참 힘들었어요. 그 영화에서 그려지는 차브의 이미지를 아무런 생각없이 소비하던 저의 모습이 보여서 이런 지점도 마음이 편치 못했던거 같아요. 여러모로 이미지를 소비하기만 하는 저 자신의 태도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고 반성하게 되었고, 국가에서 주도하는 계급적 이미지-노동계급을 비하하는-라던가 계급나누기-노동계급간의 갈등을 키우는-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보게 하는 책이었습니다. 

이 책에서 폴라 토인비라는 사람이 많이 인용되는데 어딘가 익숙하다고 생각했더니 <거세된 미래>의 그분 이더군요. 그때도 참 읽으면서 참담하다고 느껴졌는데 그때의 참담함은 양반이었............ ㅠㅠ 

+

대처만 똥인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서 여러가지 의미로 깜놀했던 책이었습니다. 똥은 지천에. 신노동당은 노동당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의 번데기 이었습니다. 느그들이 어디가 노동당이여. (빠직)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