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너는 우연한 고양이 ㅣ 문지 에크리
이광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7월
평점 :

1. ‘너’라는 무궁한 단수에게: 어느 비평가의 연서戀書
문지에크리는 ‘친애하는 것들에 대한 미지의 글쓰기’라는 문구와 함께 문학과지성사에서 새롭게 선보이는 산문 시리즈.
이광호 문학평론가가 택한 ‘친애하는’ 대상은 바로 고양이이다. 반려묘인 ‘보리’와 ‘일다’, 혹은 세상의 모든 고양이들, 그리고 그들이 존재하는 도처와 순간들에 대한 묘사와 은유가 풍요롭게 쏟아진다. 비평과 글쓰기가 특기(?)인 이가 집사가 되어야만 나올 수 있는 글들의 아름다움이란.
스스로조차 사랑하기 힘든 도시에서 사랑하는 존재에 대해 백삼십육 페이지나 써내려갈 수 있다는 것은, 어찌나 무진한 마음이고 대상인지.
2. 영원과 영원 사이, 순간을 거니는 고양이
빛과 각도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고양이의 눈으로 시간을 짐작했었다는 속설이 있다. 이집트인들은 고양이가 석양의 햇빛을 아침까지 눈 속에 담아둔다고 믿었다고 한다. 꽤나 매력적인 이야기들이지만 정작 고양이는 인간이 돈이고 금이라 여기는 ‘시간’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듯하다. 고양이는 종속되기보다는 다만 존재하고, 추억하기보다는 다만 “자신에 대해 비밀”이 된다.
길 고양이는 가장 불안한 공간에서 가장 안정적인 존재가, 집 고양이는 가장 안정적인 공간에서 가장 불안한 존재가 된다. 이집트인들의 낮과 밤을 겹겹이 지나, 우리의 안과 길에도 여전히 고양이들이 살고 ‘있다’. 인간의 유한성과 불안을 가뿐히 망각하며 고양이는 있고도 ‘없다’.
*)
약하다고 여겨지는 존재들(김혜순, <여자짐승아시아하기>)과 실제로 유약한 것(김소연, <사랑에는 사랑이 없다>)에 대한 다른 산문집들이 있고, 앞으로 이제니·나희덕 시인의 산문집들도 나온다니 이 시리즈를 빠짐없이 다 읽어보고 싶다 !
너의 ‘있음’은 너의 ‘없음’들과 다르지 않다. 조금 잘려 나간 너의 오른쪽 귀는 결핍에 해당하지만, 그런 귀를 가진 고양이는 거의 없기 때문에 그것은 너의 ‘있음’이다. 바닥을 드러낸 저수지처럼 지금 없음이 네가 ‘있다’는 시간을 비춘다. - P58
너는 한때 고양이가 자신의 유령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하지만 너는 우연히 깨닫는다. 자신이 고양이의 유령이라는 것을. 너는 너 자신에 대해 동의한 적이 없다. - P116
너는 마치 사후의 걸음걸이처럼 그 빛 사이로 걸어 다닌다. 두 마리의 고양이와 그 고양이와 함께 살았던 사람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너는 이번 생을 생각하지 않는다. 너는 시간을 생각하지 않는다. 너는 도처에 있다는 것을 느낀다. 너는 너 자신에 대해 비밀이 된다.
나는 고양이 이후의 생이다. - P13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