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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서머스 1~2 세트 - 전2권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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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이 소설, 킬러가 악인을 죽이는 서스펜스가 '주된 스토리'가 아니다.

악인만을 상대해 온 암살자, 운퇴를 앞두고 마지막 의뢰를 수락한다! 라는 한 줄을 읽자마자 머릿속에 떠오르는 핏빛 잔상과 총성, 추격전과 카체이싱은 모조리 지워라.

파워풀한 액션 스토리와 급박한 전개를 기대하고 이 소설의 첫 장을 열었다간 그대로 책장을 덮어버릴지도 모른다.

바로, 필자가 그러했다. 스티븐 킹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초반부가 다소 지루해서 읽다가 몇 번이나 멈췄다. 아, 물론 평생 바보를 연기해 온 암살자 빌리와 그를 찾아온 의뢰인, 수감된 저격 상대를 재판일에 처리하기 위하여 빌리가 해당 법원이 있는 작은 마을에 정착하며 만나게 되는 개개인의 캐릭터와 그들과 맺어가는 관계는 아기자기하고 잘 읽혔다.

스티븐 킹은 서사와 캐릭터를 촘촘하게, 마치 바로 눈앞에 있는 '살아 있는 사람'처럼 그려내는 재주가 있는 작가니까.

문제는 '파워'와 '액션'을 잔뜩 기대했더니 그 기대감에는 미치지 못했다는 데 있다. 그렇게 가려면 빌리가 마지막 의뢰를 수행하기 위하여 작은 마을에 정착할 때 위장 직업으로 '예비 작가'를 삼았어도 안 됐다.

작가란 본디 글쟁이(예비 작가)에겐 터부시 되는 등장인물인데, 작가로 설정해버리는 순간 스토리의 '동적 에너지'가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이다. 대체로 골방에 처박혀서 글을 쓰며 타자기를 두드려대거나 종이를 구기는 게 전부인데, 이 소설에서는 그나마 '암살자'라는 기존의 아이덴티티가 있어서 '동적인 에너지'가 살아 있었다.

허니, 필자는 이 소설을 다시 말하길 "암살을 위해 쓰기 시작한 작가 가면이 점점 본인이 된다. 나는 작가인가, 암살자인가"의 스토리가 될 것이라고 감히 짐작하고 싶다. '감히 짐작'하는 이유는 필자가 이 소설을 1권만 읽었을 뿐이고, 2권이 기대되는 상태여서다.

둘째, 왜 하필 '예비 작가'인 걸까.

암살자와 작가는 어울리지 않는다. 멍청이를 연기하던 암살자가 작가 행새를 한다는 건 더더욱 이상하다. 헌데 스티븐 킹은 굳이 '그 설정'을 만들어냈다. 2권까지 다 보고 나면 이해할 수 있으려나, 애매모호하지만 1권을 다 읽고 나서 짐작컨대 암살자에게 '스스로를 치유해야 하는' 미션이 있어서인 것 같다.

암살자의 과거는 그가 쓰는 글을 통하여서 얼핏 드러난다. 그는 불우한 가정 환경을 가졌고, 바로 그 환경 탓에 '살인자'가 되었다.

뭐, 여기까지는 아주 익숙하다. 우린 뉴스 헤드라인 또는 각종 콘텐츠를 통하여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암살자가 되어버린 무수한 범죄자들을 봐왔으니까. 헌데 본인의 기억들을 소설쓰듯 글로 풀어내는 범죄자는, '바보'를 연기하며 '악인'만을 사냥하는 킬러는 처음 보는 유형이다.

연결되지 않을 것이 연결되어 있다고나 할까. 그 기묘하고 기이한 '간극'이 소설의 페이지를 넘기면 넘길 수록 구체화되면서 어느새 스토리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허나 2권을 보고 나서는 이해가 되었으면 한다. 하고만은 직업군 중에 왜 꼭 '소설가'여야 했는지 설득되길 바란다.

셋째, 스포일러를 막기 위하여 말하지 않겠지만 마지막 장면 그 여자 뭐야?

빌리는 어느 정도 사건이 있었고, 트러블도 겪었지만 본인이 원하는 바대로 계획을 착착 진행하던 와중에 복병을 만난다. 다름 아닌 '여성'이고, 그 '여성'은 처음엔 불우한 피해자처럼 나오다가 마지막엔 '암살자'의 면모를 띈다.

그 여자의 발톱이 탁 드러나는 순간 1권이 끝났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2권을 봐야 하겠다. 서평이라기에 너무도 주절주절하는 글을 써둔 거 같은데 한마디를 남기자면 "잠들거나 포기하지 않았다"이다.

필자를 잘 아는 사람들에게 필자가 이 말만 해도 "그럼 봐볼까?"하고 솔깃하곤 한다. 그만큼 참을성이 좀 떨어지는 편인 필자를 붙잡다니 기대와는 다른 스토리였지만, 스티븐 킹은 역시 스티븐 KING이었다.

처음엔 뭐 이렇게 사족이 긴가 싶었고, (필자는 액션영화를 좋아하고, 설명보다는 장면이나 사건을 내던지는 걸 선호하는 편이라 이 소설은 솔직한 말로 취향은 아니었다) 살짝 졸기도 했는데 중반이 넘어서면서부터 바삐 페이지를 넘기던 끝에 마지막 장에 이르러서는 "어? 벌써 끝?"이라고 아쉬워하는 스스로를 발견한 거다. 아마 여러분도 그러할 테다.

다만, 서스펜스나 액션은 기대하지 말고 초반부의 다소 지루한 설명과 필요한가 싶은 인물 관계도 묘사, 끝까지 나오긴 할 건가 싶은 사람들과 나누는 시답잖은 대화나 스토리도 찬찬하게 참고 봐주길 바란다. 이게 취향인 사람이라면 괜찮겠지만, 아니라고 포기하기엔 뒤에 찾아오는 다디단 열매가 너무도 아쉽다. 꾹 참고 빌리가 어떻게 위장을 해가나 주변 친구를 응원하듯 지켜본다고 생각하면 편할 테다.

무튼, 2권을 봐봐야만 의문이 해소될 이 소설! 처음엔 실망했고, 중간엔 어라? 했으며, 마지막엔 어익후! 했던 이 소설 <빌리 서머스 1권> 아직 보지 않았다면 한번쯤 봐보길 권한다. 이러저러한 설명보다도 한번 딱 읽고 마지막 장을 딱 보고 나면 필자의 모든 말을 이해하게 될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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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하는 자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8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박인원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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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재를 마주하고서 스스로 무너져 내린 베르트하이머와 끝없이 스타인웨이’(피아노) 그 자체가 되길 원했던 글렌 굴드 그리고 관찰자인 나. 이 셋의 이야기로 소설몰락하는 자가 이뤄졌다. 책을 읽은 후 내가 먼저 한 건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듣는 것이었다. 소설 속 세 남자의 입에 끝없이 올랐고, 그들을 파멸로까지 이끄는데 한몫했던 이 곡은 서정적이고 아름다웠다. 차분하다가도 통통 튀는 곡의 리듬은 꽃이 흐드러지게 핀 정원 중앙에 선 듯한 기분을 줬다. 자잘한 풀꽃과 화려한 장미에 이르기까지 나를 둘러싼 꽃들이 바람결에 흩날리는 상큼한 풍경. 그냥 경쟁심 없이 자신의 느낌을 살려서 이 아름다운 곡을 연주를 하는 모습을 셋이 한 번이라도 보였다면 어땠을까. 이상일지도 모르지만 그런 생각을 했다. 동일한 종목의 사람들이 서로에게 경쟁심을 느끼는 당연한 일에서 벗어났다면. 이런 생각이 계속 드는 이유는 책을 덮은 후까지도 계속해서 찝찝하게 남는 이 모든 일이 천재란 수식어 때문에 벌어진 일일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천재나는 그 수식어가 주는 중압감에 대해 상상할 수 조차 없다. 나는 평범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평범한 사람들은 특출난 뭔가를 가진 사람들에게 쉽게 천재란 수식어를 붙이고 우러러 본다. 그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끝없는 자괴감에 빠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타인에 의해 천재가 된 사람들은 어떨까. 내가 소설을 보면서 집중한 것은 베르트하이머가 아닌 글렌 굴드였다. 그가 이렇게 말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난 언젠가는 바흐와 스타인웨이 사이에 끼어서 마모되고 말 거야, 오직 바흐를 위한 글렌 스타인웨이, 스타인웨이 글렌. 자신이 사라지고 그냥 피아노가 되길 바랐던 그는 끝없는 강박에 시달린다. 나는 그것이 사람들이 무심코 붙인 천재란 수식어 때문일지 모른단 생각을 했다. 물론 그 이전에도 대가가 되길 바랐겠지만 천재는 그 천재란 범주 안에 벗어났을 때 상실감이나 충격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대가가 된 후에 글렌 굴드가 콘서트를 피하고 스튜디오 녹음을 고집했던 것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스타인웨이에서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연주하다 뇌졸증으로 자연사한다. 죽는 순간까지도 이러한 굴레에서 그는 벗어나지 못했다.

 여기서 롤모델을 갖는 것의 위험성’으로 생각을 확장해봤다. 사람들은 자신의 분야에서 특이한 자신만의 위치를 형성한 사람을 목표로 삼곤 한다. 여기선 대가의 반열에 오른 사람들이 그 대상이 되겠다. 글렌 굴드는 바흐를, 베르트하이머는 글렌 굴드를 롤모델로 생각했다. 둘의 다른 점이 있다면 글렌 굴드는 계속해서 자신의 시도를 했지만 베르트하이머는 글렌 굴드는 천재다는 생각에 얽매어 자신의 길을 중도 포기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베르트하이머는 불우해 보인다. 피아노를 팔았지만 거기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고, 자학하다가 죽기 전엔 마지막 불꽃을 불살라보듯 바흐와 헨델을 미친 듯이 연주했기 때문이다. 마지막의 그 피아노는 글렌 굴드의 스타인웨이 발끝도 못 따라갈 아마추어용 에르바르 피아노였다. 그러나 나는 베르트하이머가 불쌍하지 않다. ‘자신과의 싸움을 거듭하며 자신의 능력을 키워간 것이 아니라, 포기했고 글렌 굴드가 되길 원하며 그를 질투하기만 했기 때문이다. 되고자 하는 라이벌 대상을 정해놓고 그에 닿기 위해 나아가는 것은 끝없는 자괴를 낳을 뿐이다. 예술의 경우는 다른 종류의 것들보다 더 심하다. 노력해도 타고난 재능엔 다가갈 수 없다는, 비판적 명제를 머릿속에서 계속 재생산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미 대가에 반열에 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는 것보다 비슷한 위치에 있지만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자신과 비교할 때 그 정도는 더 심한데 이런 비교를 계속하던 베르트하이머가 대가가 된 글렌 굴드를 마주했을 땐 이루 말할 수 없는 상실감과 자괴감에 빠졌을 것이다.

 나는 어떠한 일을 하든, 그 분야의 대가를 자신의 롤모델로 삼고 그 사람처럼만 되기 위해 노력하는 방법은 그 사람의 아류밖에 될 수 없다는, 자신만의 것을 창조해낼 수 없다는 큰 단점을 낳는다고 생각한다. 이 단점은 베르트하이머와 천재라 칭했던 글렌 굴드에게서도 반복됐다. 글렌 굴드는 자신만의 시도를 계속해서 대가란 명칭을 얻은 후에도 자신만의 길을 창조하기 보단 바흐와 스타인웨이에 다가가길 바랐던 것 같다. 죽는 순간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연주하고 있었다는 것에서 이렇게 추론해봤다. 결국, 두 사람을 파멸로 이끈 건 천재란 수식어와 롤모델에의 끝없는 갈망때문이었던 것이다. 소설의 끝장을 덮고서 나는 롤모델로 삼을 만한 대가들이 있다면 그들의 방식을 관찰하고 분석한 후에 좋은 장점을 떼어와 자신에게 가져오는 것, 그리하여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탄생시키려 노력하는 것이 자신을 진정한 대가의 길로 이끄는 좋은 방법이 아닐까 생각했다.

 이렇게 긴 시간 생각을 하고 골몰할 수 있었던 것은 나 역시 작가라는 길을 꿈꾸는 문학도이기 때문일 것이다. 음악과는 조금 다른 범주에 속해있긴 하지만 문학이란 장르 역시 끝없는 경쟁의 장르고 천재이길 바랄 수 밖에 없게 만드는 장르다. 글을 쓰면서 왜 이것밖에 되지 않나는 끝없는 자괴에 시달렸고, 잘 쓰는 또래 사람들을 보며 분개하기도 했다. 그러나 혼자 여러 생각을 해보면서 또 이 소설을 읽으면서 그러한 모든 것에 초연해질 필요가 있단 생각을 했다. 대가에게서 장점은 가져 오되, 자신을 발전시키는 자기만의 싸움을 하라는 것. 이것이 혹시 베른하르트가 전달하고자 했던 숨은 메시지는 아니었을까. 이 책을 읽으면서 사람들이, 자신들이 나아가고 있는 길과 그 방향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었으면 한다. 또 한 가지 더 추천하는 것은 책을 읽으면서 혹은 읽은 후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들어보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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