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진심 - 산상수훈을 통해 듣는
스카이 제서니 지음, 정성묵 옮김 / 두란노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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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자도의 본질은 무엇인가?

“20세기 중반 이후의 기독교는 대체로 실패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오늘날 예수님의 제자들이 전혀 예수님의 제자들이 전혀 예수님의 제자답게 행동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서구 기독교를 평가하는 결론이다. 미국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받는 한국교회는 어떨까? 과연 제자도 수행평가에 합격점을 받을 수 있을까?

산상수훈을 통해 듣는 <예수님의 진심>이라는 책이 출간되었다. 저자인 스카이 제서니(Skye Jethani)는 미국 기독교 잡지인 <크리스채너티 투데이>에서 다년간 섬겼으며, 지역 교회에서도 현장 목회를 경험한 목사이기도 했다. 그는 관심은 본질에 있다. 이전에 출간된 <종교에 죽고 예수와 살다>, <부르심의 자리>, <마음 순례>, <하나님의 도시>, <With>, <하나님을 팝니다>등의 저작들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찾아나서는 일종의 미국 복음주의의 개혁이기도 했다. 동일한 맥락에서 <예수님의 진심>은 제자도의 본질을 외치고 있다.

예수님의 주옥같은 가르침을 담은 산상수훈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신앙생활을 진행한 신자만이 아니라 불신자들 역시 한 번 정도는 들어봤을 법한 예수의 교훈이다. 이는 기독교 신앙의 황금률로 불리기도 하며, 그리스도교 윤리, 하나님 백성의 삶을 규정하는 잣대로 일컬어 지기도 한다.

2. 모든 그리스도인 제자로 부름 받았다.

한국교회사에서는 이수정이 산상 팔복 말씀을 통해 기독교 신앙에 입문하게 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일본에서 행해진 조선인 최초의 세례 교인이었다. 그후 이수정은 성경을 번역하는 일에 몰두하였고, 그가 번역한 마가복음은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에 아펜젤러와 언더우드에 의해 조선 땅을 밟게 되었다.

<예수님의 진심>을 소개하며 한국교회사를 들먹이는 이유가 있다. 잘 알고 있듯이 조선의 초창기 선교는 미진했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 인구에 비하면 소수점에 불과한 숫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의 성경 사랑은 매우 강력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황해도 소래에서 서울 정동까지 나무 십자가를 메고 온 교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세례를 받기 위해 언더우드 선교사를 찾아온 것이었다. 또한 강화에 살고 있는 종순일이라는 성도는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에 감복하여 전 재산을 봉헌하고 평생 전도자로 사는 일도 있었다.

이와 같은 믿음의 선배들을 향하여 우리는 무지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성경의 문법적 역사적 신학적 배경을 모르는 문자주의자 혹은 극단적 근본주의자라고 폄훼할 수 있을까? 그들의 성경 사랑을 우리의 그것과 사뭇과 다르다. 우리는 이해하기 위해 성경을 읽는다면 저들은 행하기 위해 성경을 읽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마주하는 우리 역시 동일하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종교적 엘리트들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다. 본 회퍼의 말처럼 모든 그리스도인은 헌신된 제자에로 부르심을 받았다.

3.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가치

스카이 제서니는 제자도의 가르침을 산상 팔복으로부터 시작한다. 그가 말하듯이 팔복은 복을 받기 위해 추구하는 목록이 아니다. 오히려 좋은 소식들의 목록이다. 즉 예수님은 그분의 나라가 옴으로써 가장 큰 혜택을 받는 사람들에 관해 기술하신 것이다(22-23). 따라서 복을 받은 사람들은 세상의 기준과는 전혀 다른 사람들이다. 동시에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 나라 역시 다름을 밝힌다.

“천국은 초자연적이고 영적인 분위기를 풍기지만 예수님이 실제로 사용하신 단어는 비물질적이고 비가시적이되 하나님이 거하시는 매우 실직적이고도 현재적인 영역을 지칭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나라가 지금 우리 ‘가까이’있다고 선포하셨다… 이제 새로운 삶이 가능하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나라가 아닌 새로운 나라에 속한 자들을 위한 새로운 윤리를 밝히신 것이다.”(30)

예수님의 진심을 이해하는 일에 있어 키워드는 마태복음 5:20절이다.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예수님의 관심은 외적 규칙에 있었던 것이 아니다. 악을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 않는 것을 초월하여 악을 원하지 않는 내적 상태에 진심을 두신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의 의는 마음의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내면이 올바르게 서 있으면 외적인 행동은 자연스럽게 따라오기 때문이다(74). 이에 대해 스카이 제서니는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거룩함을 외적인 상태나 내적인 상태 중 어느 하나로 여기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거룩함은 우리의 의도와 행동이 함께 변하는 것이다.”(101)



4. 죽은 크리스마스트리

산상수훈에는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가 등장한다. 스카이 제서니는 자신의 배경인 미국을 개인주의적인 영성으로 규정한다. 반면 기독교의 영성은 ‘개인’이 아닌 ‘우리’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주기도는 공동체적 영성이다. 그러기에 우리 혹은 교회, 공동체는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가? 그것은 바로, 하늘이 땅에 임하기 위해 구해야 한다. “우리는 이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처럼 질서와 아름다움과 풍요 충만해지기를 갈망해야 한다. 우리는 모든 불의와 죽음과 부족함이 완전히 사라지기를 원해야 한다. 이 소망은 훗날 예수님의 부활 능력이 온 우주를 뒤덮을 때만이 온전히 이루어질 것이다.”(133)

앞에서 언급했듯이 스카이 제서니는 본질을 추구한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속한 미국교회의 상황을 적실히 파악하고 본질적 대안을 제공한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열매에 대한 말씀을 하셨다. 제서니는 열매를 두 부류로 나눈다. 하나는 ‘성과’이다. 즉 힘, 파급력, 영향력, 인기, 시대 부합 등과 같은 외형적 상품을 찍어 내는 것이다. 제서니는 이것을 ‘복음주의 산업 단지’로 명명한다. 그러다보니 교회는 동일한 상품을 만들기 위해 산업 단지로 모여들었고, 십자가라는 이름으로 세속적인 연기를 뿜어내고 있다. 예수님의 진심인 ‘열매’와 ‘성과’를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성과가 아닌 진정한 열매는 인격적이다. 후함, 자비, 정직, 온유, 충성, 겸손과 같은 하나님 나라를 포괄하는 비가시적 열매이다. 따라서 저자인 제서니는 크리스마스트리와 같은 가짜 열매가 아닌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진짜 열매를 가르친다.

“크리스마스트리는 실제 나무에 비해 지나치게 화려한 모습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구한다. 금속 조각과 빛으로 장식되어 있고 반짝거리는 유리 열매들이 달려 있지만 그 모든 장식물은 트리가 죽은 나무라는 기분 나쁜 사실을 감추기 위한 것일 뿐이다…. 너무도 많은 기독교 공동체가 아름답지만 죽은 크리스마스트리로 가득하다….하지만 우리 주님이 바라시는 것은 진짜 열매를 맺는 과수원의 은은한 아름다움이다.”(230-231)

마치며

오늘날 현대 교회는 코로나 19 시대를 살고 있다. 온라인 예배와 비대면 모임, 언택트 사역은 낯섦을 넘어 삶이 되었다. 과거로 돌아가는 일은 미지수이다. 마스크와 거리두기가 일상이 되었듯이 교회가 당면한 생태 역시 익숙해지고 있다. 그렇다. 우리는 익숙함에 익숙하다. 예수님의 진심이 담긴 산상수훈 역시 익숙하고 진부한 가르침으로 치부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래서일까? 책의 저자인 스카이 제서니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을 신선하게 접근한다. 예수님의 티칭 스타일처럼 복잡하지 않고 단순하다. 나와 같은 목회자뿐 아니라 교인들 역시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적절한 다리를 제공해 주었다. 나는 기독교 신앙에 낯선 사람과 익숙한 사람 모두에게 추천한다. 특히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도의 필독서이다. 산상수훈을 통해 듣는 <예수님의 진심>은 제자됨과 교회됨을 올곧게 세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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