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이 칼럼을 읽는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09&aid=0003983656&sid1=001

[문화프리즘] 2017년의 청춘소설

"하지만 이 소설의 1200쪽을 독파하면서 '나'에게도, 그의 친구나 아내에게도 일상의 고단함 따위는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일본 작가는 40여 년째 반복해서 청춘의 삶을 그리고 있지만, 그곳에는 기묘한 모험과 초현실적인 이야기의 즐거움이 있을 뿐 우리 삶을 돌아보게 만드는 생생한 감각은 거세되어 있었다."




하루키에 대한 기자의 평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쓴건, 하루키의 소설에 일상의 고단함이 들어나지 않는다는, 삶을 돌아보게 만드는 생생한 감각은 거세되어 있다는 '하루키 월드'에 대해서 말했기 때문이다.

물론, 하루키 소설에 등장하는 이들은 하루하루의 먹고살기에 대해 걱정하지 않고, 공무원시험 합격이나 명문대 입학, 치열한 취업 경쟁등에 치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에게 일상의 고단함이 없다고 할 순 없다. 하루키 세계의 인물들은 거의 대부분 커다란 상실감을 전제하고 있으며, 허무함과 죄책감을 지니고 있는 경우도 많다. 이들은 세상과 고립되어 이러한 감정에 무기력하게 떠밀리거나 분투하며 살아가는데, 어찌보면 이들이 맥주나 와인이나 클래식이나 자동차의 이름과 특성에 집착하고 자유로운 성행위를 즐기는 것은 이러한 무력감과 상실감 혹은 죄책감으로부터의 고단한 도피행위일 것이다. (삶에 이렇다할 목표나 의미가 없고 목숨걸고 지켜야 할것도 없다. 그렇기에 이들에겐 그저 살아있는게 고단하며 하루키의 소설속 주인공들은 그래서 종종 자살을 택한다)

물론 하루키의 소설의 사람들은 돈걱정을 거의 하지 않으며 고양이가 말을 걸든, 그림속의 캐릭터가 나와서 말을 걸든, 여러가지 '마술적' 상황을 덤덤하게 받아들이곤 하는데, 어떤 면에서 하루키 소설은 20세기에 주변부 국가들에서 유행하는 '환상적 리얼리즘' 소설로 분류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신비하고 마술적인(하지만 얼핏 매우 일상적으로 보이는 류의) 서술을 통해서 하루키는 일본의 과거사 (가령 태엽감는 새에서 노몬한 전투, 1Q84에서 전공투와 옴진리교사건, 그리고 이번 기사단장 죽이기에서는 난징대학살)를 간접적으로 하지만 예민하게 건드리는데, 이를 국제적인 수상을 노린 전략이라고 할수도 있고 세련된 방식으로 역사에 대해 말하기라 칭찬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건 하루키는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소설을 쓰지는 않는다.

반드시 공시생의 치열한 분투기를 그리거나(김애란) 댓망진창으로 싸우며 한국을 떠나거나(장강명), 여러가지 통계 수치를 드러내며 여성인권에 대해 말하거나(82년생 김지영) 해야 문제적 소설이며 청춘소설은 아닌것이다. 세상엔 젊은 나이에 가해국의 병사로 징병되어 남의 나라 민간인을 죽이고 그 죄책감에 자살을 선택하고 그로 인해 죄책감과 무력감과 상실감으로 살아가는 노인들에 대한 청춘소설, 혹은 리얼리즘소설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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