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사회와 그 적들 1 - 이데아총서 13
칼 R.포퍼 지음 / 민음사 / 1998년 2월
평점 :
절판


자본주의가 현재의 모습으로 성장해온 지난 몇 세기, 인간의 삶은 많은 변화를 겪었고 현대에 이르러는 너무나 복잡해져 버렸다. 추상화된 세상에서, 개인은 전체성을 자신 안에 갖지 못하고 존재의 의미를 스스로 찾아 헤매는 불안한 주체가 되었다. 이러한 추상화는 인간이 지구를 지배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인간 개체는 자본주의의 발전으로 인한 풍요의 시대의 개막과 함께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엄청난 양의 개체는 모두 욕망을 가진 주체들이다. 그 욕망이 타자의 것이든 본연의 것이든 그것은 일반화된 욕망이며 욕망이 양이 무한한 만큼 그것은 충족될 수 없는 성질을 가진 것일 거다. 어찌하였건 역사는 이렇게 진행되었기에 과거와는 다른 시대, 다른 인간의 삶의 방식이 요구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포퍼는 이 점을 명확히 인식하였다. 세상의 변화한 지형도에서 그는 출발하였다.

이 변화한 지형도를 부정적으로 인식하였던 맑스와는 달리, 포퍼는 긍정적인 측면을 바라본다. 기존의 유기체적 사회공동체에서, 개인의 삶에 있어 중요한 것은 어떠한 특정한 시공간에서 태어나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대의 풍요가 가져다준 정신과 신체의 자유로움은 우리를 이러한 지반에서 벗어나 주체적 삶이 가능하게끔 해준다.

포퍼는 자유주의에 긍정의 힘을 불어넣었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우리 인간은 이성을 합리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상대적 빈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부의 양극화에 따른 실질적 절대 빈곤의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 이는 닫힌사회 안에서 상업발달과 인간개체의 증가에 따른 열린사회로의 전환을 두려워하던 인간에게 변화를 긍정하자는 말투로 건낸 현실 긍정의 논리였고 그 긍정적 변화를 우리 ‘모두’ ‘과학적으로’ 해나가자는 것이었다. 그 두려웠던 긴장감은 우리가 풍요롭고 합리적인 사회를 맞이하기 위한 대가라고 그는 주장한다. 맑스의 역사주의적 시각에 반대하여, 포퍼는 열린사회에서 자율적인 개인의 역할을 강조한다.

이는 하버마스가 진정 원하던 시민상과 일치할 것이다. 공론의 장에서 중요한 것은 공적영역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고 그것의 긍정적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자율적인 주체들의 참여이다. 그리고 그것의 방향은 자본의 메커니즘에 의해 ‘아래로의 방향’이 아닌 ‘위로의 변화’가 되어야 한다. 반증 가능한 이론을 통한 지속적인 개정, 그를 통해 전체의 지배에서 벗어나 개체들이 그들 사이에서 합리적으로 의사소통을 이끌어 내고 진보를 이끌어 내는 것, 그것이 가능하다고 포퍼는 굳게 믿었다. 전체주의에 대한 반동이라고도 볼 수 있는 이러한 생각은 어찌하였건 하머마스의 ‘모범생 답안’과 어울려 자유의 진보에 대한 무한한 믿음을 확신시켜 주는 것처럼 보인다.

전체론, 역사적 법칙론, 유토피아 주의에 대한 그의 비판과 새로운 합리적 사회상의 제시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자본주의는 거대한 물결로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 그리고 그 지배의 공간엔 인간 개체성의 말살이 함께해 있다. 추상화가 인간의 삶을 개별적이지 못하게 만들고, 개체의 삶의 자신에 의해 전체적으로 운영되지 못하게 한다. 자본주의란 사회는 분명 잘못되었다. 그렇다면 그 방식이 아닌, 정답의 방식은 무엇인가?

수정주의 모델로서 포퍼가 생각한 사회는 끊임없는 변증을 수행해야 한다. 그것은 고여 있기를 거부하는 것이고, 전체가 완성되어 있다는 생각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다. 인간의 삶이 또한 그런 게 아닐까? 우리는 결국 ‘내 삶의 완성’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과정에서의 부단한 반성과 노력이다. 사회라는 추상적인 존재도 그것이 존재하는 한 부단히 이 과정을 수행하는 것만이 폐단을 막고 발전적으로 나아가는 길일 것이다. 이 점에서 볼 때 포퍼의 사상은 분명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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