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나는 페미니스트가 되고 싶어
카르멘 G. 데 라 쿠에바 지음, 말로타 그림, 최이슬기 옮김 / 을유문화사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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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국에서 페미니즘 열풍이 불기 시작한 계기는 아마도 ‘강남역 사건’이었을 것이다. 그때 20대 초반의 수많은 어린 여성들이 거리로 나와 “나는 운이 좋아 지금까지 살아 남았다”는 구호를 외치며 성별로 인한 차별과 폭력에 대해 강력하게 규탄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하는 육아라는 낯선 삶에 적응하느라 뉴스들을 거의 못보고 살았다. 그리고 여전히 내 머릿속에는 여성주의자들은 유별난 사람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가족을 건사해야 하는 책임을 가진 남성의 삶이 더 힘들어 보인다는 생각도 있었다.

내게 페미니즘이라는 단어가 현실로 다가온 것은 일과 육아와 가사 등 엄마라는 꼬리표가 붙은 일들 속에서 허우적거리다 쓰러지기 일보직전의 상황에서다. 매일 12시 1시까지 집안일을 마무리하고, 24개월 넘어서까지 새벽에 한 두번씩 깨는 아들을 돌보며 다크써클은 한없이 내려오고 내 신체는 활기를 잃은 채 진이 빠지고 있었다. 나는 잘해낼 수 있을 거라고, 일을 할 수 있어서 너무 좋다고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던 나는 어느새 남편을 원망하고 있었고, 언제나 다툼은 이혼직전까지 갔다.

불타는 사명감도, 연대의식도 아닌 나는 내 몸이 죽을만큼 힘들었을 때 ‘도대체 내가 왜 이러고 살아야 하는지’ 원망하다 페미니즘을 접하게 됐다. 좋게 말하면 절박했던 거고, 툭 까놓고 말하면 내 필요에 의해서였다. 우리 부부가 싸우고 내가 힘든게 남편이 나빠서도 아니고, 내가 유별나서도 아니다. 아주 오랜 시간 뿌리박힌 성별간 역할에 대한 인식 차이다. 세상은 변했는데, 사람들은 아직도 자기 편할 대로 해석한다. 누군가가 많은 것을 포기하고 희생하고 있다는 것은 짐짓 모른체하고.

그때는 내 생활에서 어렴풋이 느끼는 뭔지 모를 부당함과 억울함, 억하심정에 대해 풀어줄 이론적 토대가 없었다. 그저 오랫동안 내려온 관습적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페미니즘이다 정도였다. 이건 아닌데 싶지만 그게 왜 그런지 자신있게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엄마, 나는 페미니스트가 되고 싶어’는 페미니즘에 대해 쉽게 설명하고 심화주제로 가는 길목을 안내한다. 저자 카르멘 G 데 라 쿠에바가 소개하는 고전들은 어디선가 한번쯤은 들어본 책들이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을 페미니즘의 세계로 안내한 책들일 것이다.

저자는 자신의 삶의 이정표가 됐던 순간들을 책과 함께 소개한다. 유년시절, 예쁘게 치마를 차려입고 얌전히 인형놀이를 하는 고정관념에서 탈피한 말괄량이 자유분방 소녀 삐삐에게 끌린다. 청소년 시절, 신체의 변화와 성에 대한 궁금증이 일어날 때 남성의 시선으로 정의된 여성의 신체를 다시 한번 바라본다.

분개한 나는 엄마에게 나의 생식기 혹은 그 부위를 부르는 더 많은 단어를 알려 달라고 부탁했다. 보지, 난자, 잔소, 아기집, 나팔관. 나는 백과사전 8권을 샅샅이 뒤졌지만, 이런 단어는 단 하나도 찾지 못했다.

‘아니 도대체 왜, 양도 해파리도 코뿔소도 자기 페이지를 가지고 있는데 내 생식기는 없지?’

-본문 중-

생기대나 탐폰 광고에서 여자들은 모든 것이 하얗고 순수하고 무취한 세계에서 춤추고 실내 수영장에서 헤엄쳐 다닌다. 게다가 심지어 다른 어떤 날보다 행복해 보이기까지 한다. 내가 이러한 모습에 동일시할 수 없는 이유는 내 허벅지 굵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날에는 해변에서 춤을 춘다거나 물속에서 성큼성큼 팔 젖기를 할 기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날의 나는 쓸모없고 추한 만신창이가 된 것처럼 느껴진다.

-본문 중-

오랜 시간동안 사람들은 성과 관련된 것은 입밖으로 말하지 않았다. 요즘처럼 야동이 흔하고 인터넷으로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게 되기 전까지는, 혹은 영상으로 행위를 담아내기 전까지는 혼자 상상하거나 기껏해야 상상력을 글로 쓰거나 농담처럼 툭 내뱉는 것이 성에 대한 최대한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입밖으로 함부로 낼 수 없는 개념은 상대방에게 모욕을 주는 욕으로, 상황을 비꼬는 위트로 포장된 농담으로 형태를 드러냈다. 그러다보니 성과 관련한 것은 은밀하고 불법적으로 숨어 버렸다. 청소년들은 야동을 통해 잘못된 성 개념을 배우고, 2차 성징으로 신체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에 대해 또래 안에서 해결하려고 든다.

대부분 여성들은 평생 살면서 자신의 생식기를 제대로 본 적이 없다. 나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남성들이 더 잘 알고 있을 수도 있다;;;

저자는 성을 이제 밖으로 적나라하게 펼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남녀의 생식기 모두 신비롭다거나 비밀스러운 곳이 아니다. 생식기와 관련한 단어들을 입밖으로 거침없이 내뱉을 만큼, 손과 발같은 신체 부위 중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생리를 마법이라 포장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볼 필요가 있다.

서로를 못생겼다고, 길을 잃었다고 느끼는 열셋, 열다섯, 스무 살의 수천 아이들과 연결되는 가느다란 실을 볼 수 있었다. 그녀의 책을 읽으며 나는 한 여자아이가 몸 때문에 자신을 증오하다 못해 파괴하고 싶을 정도가 되려면, 도대체 그 사회에 무슨 일이 있어야 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본문 중-

나는 수많은 밤을 침대에서 허벅지와 배의 살을 움켜잡고 꽉 쥐어짜며 사라지기를 기도하면서 보냈다. 내가 누르고 또 누르다 보면 한순간에 내가 가진 필요 이상의 살이 증발하기라도 한다는 듯. 하지만 뚱뚱하다는 사실이 주는 고통과 답답함에 대해서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눈 적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청소년기에는 사람들의 수근거림으로 겪는 고통에 대해 공개적으로 불평하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지 수없이 자문했다. 내가 뚱뚱한 건 아무 상관없고 나의 가장 큰 문제는 욕설과 끝없는 무시였다고 세상을 향해 외치려면 어떤 목소리가 어울렸을까? 얼마나 많은 여자아이가 나처럼 침대에 누워 아무에게도 말 못하고 끔찍하게 혼자인 기분을 느끼고 있었을까?

-본문 중-

많은 여성들이 스스로가 추구하는 미가 정말 자신이 예쁘다고 생각하는 아름다움일까? 대중매체를 통해, 혹은 남성작가들이 규정해놓은 뻔한 아름다움 아닐까?

남성들이 좋아하는 청순가련형의 베이비페이스의 글래머러스한 몸매, 선이 가늘지만 건강한 몸매, 날씬한 몸매… 몸매, 몸매, 몸매…

남성들의 미의 기준을 충족시키기 위해 수많은 여성들이 식욕을 참고, 방법도 모르면서 운동기구 앞에서 서성거리는 것이 현실이다. 내가 추구하는 미가 날씬한 몸매일 수도 있다. 그래서 개인의 선택에 의해, 즉 나 자신의 의지로 다이어트를 하는 것은 그럴 만하다. 하지만 날씬한 몸매가 사회 기준이 되어 버려 조금의 여백의 살이 허용하지 않는 사회라면, 그것은 문제다. 모든 여성이 사회가 만족하는 기준에 도달하지 못했다며 먹을 때마다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 문제인 것.

한편으로는 리치가 이야기하듯, 여성 문학의 유산은 평가절하 당하고, 지워지고, 파편화되었다. 선구적인 여성들을 재발견하는 것은 핵심적인 일이다. 그녀들의 이야기를 복원하고, 우리의 이야기와 연결하는 것은 권력을 가지는 하나의 방법이다. 권력은 어떤 이야기를 할지 결정하는 것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본문 중-

이제 우리 여자들이 펜을 가진 이상-대학에 더 많이 가는 것도, 더 많이 읽는 것도 우리들이다-권위를 가지고, “나”로부터 시작하는 이야기가 민망하더라도 우리의 삶을 서사화해야만 한다. 일인칭으로 쓰는 우리들의 경험으로부터 출발하는 것만이 우리가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사실을 이야기하기 위한 가장 좋은 길이다. 여전히 월경과 성적 괴롭힘과 젠더 폭력과 살찐 몸과 모성에 대한 훨씬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다.

-본문 중-

이 책이 특히 좋았던 부분은 마지막 여성의 삶을 사회적으로 풀어내야 한다는 작가의 권고다. 여성의 힘든 삶이 내 선택이 아니고 오랜 시간 많은 여성의 희생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면 그것을 이야기함으로써 모두가 공감하고 문제점을 인식해야 한다. 그것은 내 이야기, 우리 엄마와 할머니의 이야기,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내 딸들의 이야기다. 내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이 힘을 가지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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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찾아서 창비시선 438
정호승 지음 / 창비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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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를 싫어한다. 가슴을 후벼파는 명문장 한 두 줄은 좋아하지만 알아듣지 못하게 난해한 말들의 조합으로 이뤄놓은 시들은 싫어한다. 그것을 주저리주저리 읽고 있는 것도 싫어한다.

얼마 전 우리 마을학교에서 시쓰기 수업이 있었다. 그래도 한때 시 비슷한 걸 좋아했던 사람으로서 들어는 봐야지. 들어만 볼 요량이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나는 매주 한편씩 시를 쓰고 있었다. 시를 쓰고 있는 나를 신기해 하면서 간략하게 압축한 말의 묘미를 알아가고 있었다.

여전히 기성작가의 시를 읽는 것은 두렵다. 한눈에 알아먹지 못할 문장들에 기가 죽거나 혹은 공감안되는 한가로운 소리에 화가 나거나 너무 뻔해서 유치해 보이거나 여튼, 시를 읽는 것은 나에게 두려운 행위다. 그럼에도 용기를 내봤다. 나는 이제 시 한번 써본 사람이니까. ㅎㅎ

그리고 정호승 시인의 유명세를 믿었다.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내 20대 오랜 동안 회자된 시를 쓴 사람이니까.



편안해서 읽기가 좋다. 우물가에서 쌀을 씻다가도 쌀보다 별을 찾는 시인의 감성이 좋다.

정호승 시인의 시에는 새, 꽃, 별, 하늘 등의 단어들이 많이 등장한다. 갈수록 기본 유지 비용이 많이 드는 시대, 삶이 점점 팍팍해져 꽃과 바람과 하늘과 별을 제대로 바라보기 힘든 시대 그것을 있는 그대로 예쁘게 바라보는 사람도 있어야 할 것이다.



사랑은 사람의 마음을 이리저리 헤집는다. 하루에도 수십 번 천국과 지옥을 오가고 미움과 연민이 교차한다. 그냥 내가 먼저 숙일까. 좋은게 좋은걸로 잘 지내면 되지 않을까.
실망이 쌓이고 미움이 쌓여 끝내 이별을 결심하고 나서도 마음은 다시 흔들린다. 다시 돌아갈까. 좋았던 때도 있었는데. 아니야. 확실히 잊을거야.
독한 말들로 크게 다짐할수록 마음은 정 반대라는 것을 안다. 시인은 거친 급류가 휩쓰는 사랑의 감정을 한발짝 떨어져 편안하게 바라보며 절벽 끝에 홀로 앉아 차를 마실 거라고 하지만 그것은 이뤄지지 않을 다짐으로 보인다. 시인의 마음 속에 아직도 감정이 용솟음치고 거칠게 돌진하는 소년이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서슬퍼런 박근혜 정부 아래서 우리는 다들 ‘이건 아닌데’ 하면서도 말로 내뱉지 못하고 거의 포기할 때쯤 분노는 터졌고 사람들은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왔다. 기대하지도 않았을 때, 기대하지 않았을 때 봄은 온다. 유난히 포근했던 겨울, 주말마다 광화문 광장을 찾았던 사람들은 다음 선거까지 기다리지 않고도 봄을 쟁취해 냈다. 
지금도 많은 미디어들은 쓴소리하는 사람들에게 이성적이지 못하고 이기적인 존재라는 프레임을 씌어 어떤 말이든 해보려는 시도를 막으려 든다. 하지만 언젠가 기회가 맞을 때가 있다. ‘허옇게 속살까지 드러난 분노의 상처를 결코 부끄러워 하지 않아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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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진 시절 소설Q
금희 지음 / 창비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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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느낌의 책 정말 좋다. 책의 마지막장을 덮고 난 후 여운이 꽤 오래 간다.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지만 사회와 현실을 깨달으며 점점 무너지고 무뎌지는 20대, 그리고 힘든 상황에서도 서로를 지탱할 수 있게 해주는 사랑. 고향을 떠나 천진에서의 열정과 혼란으로 뒤덮인 상아의 20대를 단숨에 읽었다. 그리고 나의 20대를 바라보았다.

주인공 상아는 연인인 무군과 함께 고향을 떠나 천진에 자리잡은 조선족 여성이다. 일자리를 찾아 대도시로 한 명 두 명 떠나며 고향 마을엔 젊은이가 너댓 명 밖에 남지 않았다. 상아와 무군은 그 너댓 명에 속한 젊은이들이었다. 무군이 천진시에서 일하는 누나로부터 일하러 오라는 연락을 받고 상아와 함께 고향을 떠났다.

여기서 천진시는 상해에서 약간 떨어진, 한국의 OEM 생산을 위한 공장들이 밀집하기 시작한 중소도시였다. 중국어와 한국어가 모두 가능한 조선족들은 한국인 기업인들에게는 최적의 파트너였고, 그렇게 조선족을 끌어모아 공장들을 가동했다.

무군과 상아도 한국인이 차린 인테리어 자제 공장에 취직했고, 공장기숙사에 살림집을 차리고 살았다. 고향에서 16시간이나 기차를 타고 와 낯설고 두려운 도시에서 경제활동을 시작한 상아는 사랑하는 무군이 곁에 있기에 잘 견딜 수 있었다. 그리고 같은 고향 출신의 비슷한 처지인 정숙과 그의 연인 희철과도 금방 친해져 네 사람이 함께 어울리며 잘 지냈다.

적은 월급이지만 묵묵히 일하는 연인과 함께 언젠가 결혼도 하고, 아파트에 들어가 자식도 낳고 남들처럼 행복해 보이는 삶은 살 거라는 기대는 금방 깨졌다. 사장이 타고 다니는 자동차는 월급을 10년이나 모아야 겨우 살 수 있었고, 석양을 뒤로하고 황금빛으로 빛나는 화려한 아파트는 평생 살아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다. 어렴풋이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을 때 고향친구 춘란을 만난다.

화려한 복장의 춘란은 중학교를 다 마치지 않고 고향을 떠났다. 그간의 삶을 설명하며 지금은 돈 많은 남성과의 관계를 통해 원하는 것을 얻고 있다고 솔직히 말한다.

춘란의 방문은 나와 정숙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우리 둘 다 자신들이 겸연쩍거나 수치스럽게 생각했던 사람들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무군의 손길이 반갑지 않았고 몸도 쉬이 열리지 않았다. 나는 삶의 어떤 변화, 질적으로 더 나은 변화를 원하고 있었다. 내 욕망이 정당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욕망은 꿈이 아니었지만 최소하느 그때는 두가지가 결국 같은 것이라고 각했다. 그걸 위해서 사는 삶이라면 오히려 춘란이나 미스 신이 나보다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소한 그녀들은 욕망 앞에서 정직하고 그것을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는가.

하루종일 열심히 일하지만, 자신들의 월급으론 ‘적당히’ ‘구색맞게’ 산다는 것이 힘든 현실을 알아간 상아와 정숙. 그녀들의 눈에는 큰 욕심 없이 회사에서 주는 월급을 받으며 묵묵히 일하는 연인들이 답답해지기 시작한다. 더구나 고향에 남겨진 가난한 가족들에게는 자꾸만 돈이 필요해진다.

-나쁘고 좋고가 어딨니? 그게 다 운이고 능력이지. 난 이제 알았어. 지금은 그저 돈 없는 사람이 나쁜 사람이란 걸. 선한 마음만 있으면 뭐 해? 그거 가지고는 아무도 도울 수 없는데.

급기야 정숙은 ‘가난이 나쁘다’는 결론을 내리고 희철에게 이별을 고한다. 상아 역시 무군에게 이별을 고하고 회사를 옮긴다. 다급하게 찾아온 무군을 모질게 내쫓고 미스신이나 춘란처럼 남자에게 도움받는 삶에 조금 가까워질 뻔 하기도 했다. 하지만 상아는 다시 고향으로 향하고, 그 이후로 정숙을 한번도 만나지 못했다.

이야기의 시작은 정숙을 만나기로 약속을 하면서 천진에서의 생활을 회상해 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가장 순수했지만 세상에 눈을 뜨면서 욕망으로 순수가 깨져가는 그 격랑과 혼돈의 시기의 이야기다.

영화 첨밀밀의 분위기도 조금씩 풍겨나는데, 차이점은 첨밀밀의 두 사람은 노력하면 적당히 살 수 있지만 천진에서 사는 젊은이들은 노력해도 영원히 밑바닥 가난과 노동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금색의 햇빛을 가닥가닥 사방으로 반사하는 그건물 아래를 지나다보면 기하급수적으로 커져가는 그 도시의 풍요로움이 내 앞에도 한몫 차려질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물론 그것은 착각이었다.

내가 사는 도시는 커져가는데 내 삶은 그대로다. 곳곳에서 공사를 해대더니, 어느순간 아파트들이 쑥쑥 올라가는데 그 어느 곳에도 내가 살 곳은 없다. 그 도시에 속해 나 역시 그 도시의 이미지처럼 살 것 같지만 현실은 언제나 아둥바둥이다.

욕망이 자라 사랑을 버렸던 그녀들은 그래서 다른 선택을 하고, 또다른 삶을 살고 있을까. 결말은 책에서 확인하길 바란다.

*이 글은 출판사의 이벤트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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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뒤쫓는 소년 창비청소년문고 30
설흔 지음 / 창비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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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구성이 재미있는 책이다. 상징적이고 중의적인 표현이 여러 곳에서 등장한다.

책은 제목처럼 책을 쓰기 위해 제국의 마을들을 돌아다니는 소년의 이야기다. 각 마을에서 일어나는 기상천외한 일들을 읽다보면 결국엔 책을 뒤쫓는 소년이 독자인 내가 된다.

책에는 책과 관련한 다양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시를 쓰지만 아무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시인, 책을 좋아하지만 읽기보다 수집에 더 관심많은 재상, 경전보다 소설을 너무 좋아하지만 아버지에게 혼난 뒤로 정신이 이상해진 소년 등등.

추리소설이나 무협지를 보듯 강한 흡입력으로 슬 읽다보면 책과 관련해 공감가는 부분이 꽤 많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황제가 불태워 그 재까지 갈아마셨지만 불에 탄 흔적까지 그대로 20년 마다 다시 세상에 등장하는 책 '빛과 어둠의 제국'. 그 사연도 재미있는데 그 책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서재를 주인공에게 공개하는 재상 편이 제일 재미있었다.

재상이 세상에서 사라졌다가 몇 년 마다 한번씩 등장하는 그 책을 읽는 동안 주인공들은 서재에 감옥처럼 갇혀 있던 책들을 탈출시킨다. 책을 읽지는 않고 수집하고 모으는 것만 좋아하는 재상이다. 그 모습이딱 나같아서 많이 찔렸다.

탈출한 책들은 저마다 알아서 바람에 날려 세상으로 흩어진다. 나 역시 책을 소유하고 싶다는 내 욕망만 생각해 봤지, 읽히지도 못하고 활용되지도 못하고 책장에만 꽂혀 낡아만 가는 책의 입장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책과 관련한 이야기의 구성과 상상력이 굉장히 흥미로울 것이다.



*이 글은 출판사의 서평 이벤트에 당첨돼 책을 읽고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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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 -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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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하면 글씨 잘쓰는 우리 조상 쯤으로 알고 살았다. 자격증이나 취업을 위해 역사 시험을 준비할 때 역사 문제에서 금석학을 조금 들었다. 고증을 중시하는 학문이라던데 추사 김정희가 유명하다더라... 이런 이야기다. 

김정희? 김정호?
글씨 잘쓰는 사람인지, 지도 그렸던 사람인지조차 헷갈릴 정도로 무지했다. 다만 언젠가 한 번 TV에서 그가 그렸던 ‘세한도’를 보고는 엄청 감동을 받았다. 소나무 한 그루에서 느껴지던 말할 수 없는 쓸쓸함. 작은 지면에 큰 감정을 만들어낸 그의 작품에 마음이 뺏겨 한참동안 들여다 봤었다. 아 그림까지 잘 그리는 사람이었구나.

그러다 한참 후에 공부를 그렇게 잘했고, 국제적으로 교류가 활발했다는 얘기를 얼핏 들었다. 그래서 김정희하면 떠오르는 것은 글씨를 잘쓰고 하여튼 대단한 사람.

이 책은 유흥준 작가의 쉽고 담담한 문체로 추사 김정희의 일생과 그를 둘러싼 뒷이야기를 상세하게 전하고 있다. 담담한 듯 하지만 사실, 그가 김정희의 흔적을 찾으며 순간순간 느꼈던 감동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김정희는 김노경과 기계 유씨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증조 할아버지가 월성위 김한신으로, 영조의 딸 화순옹주와 결혼했다. 키가 크고 인물이 준수했으며 재주가 많고 총명하였다고 한다. 특히 글씨를 잘 썼다고 알려져 있다. 이른 나이에 후손 없이 사망하면서 조카 김이주(김정희의 할아버지)가 양자로 들어가 대를 이었다. 김정희의 아버지인 김노경 역시 글씨를 잘 써 ‘신라경순왕전비’ ‘신의왕후탄강구묘비’ 등의 글씨가 전한다.

김정희의 외가 쪽도 만만치 않다.
추사의 외가인 기계 유씨는 노론계 명문으로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지수재 유척기가 이 집안의 간판 명사이며, 외증조할아버지 유한소는 문과에 급제하여 함경도 관찰사를 지낸 분이고, 정조 때 문장으로 이름을 날린 저암 유한준, 서예가로 예서에 능했던 기원 유한지 등과는 4촌, 6촌 형제간이다. 그래서 기계 유씨 쪽 사람들은 반은 농으로 추사가 외탁한 덕에 글씨를 잘 썼다고 말하곤 한다.
친가 외가 집안 대대로 글씨를 잘 쓰는 집안이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글씨는 그의 학문이 발현된 하나의 형태일 뿐이다. 그는 그림과 시와 산문 등 예술적 면모에서 금석학에 이르기까지 학자이자 예술가로서 다양한 재능을 가졌으며 스스로 발전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이 책을 통해 추사 김정희라는 인물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게 되면서 가장 감동적인 부분이 그것이다. 스스로 절제하고 노력하는 것. 그리고 조금씩 이뤄가는 것.

이 책에서는 영정조 이후 조선 말기, 이와 기를 외치며 멸망한 명나라를 대신해 소중화론까지 외치는 고답한 성리학자들에 맞서, 실학이 태동한 사회적 분위기를 상세하게 알려주고 있다. 단순히 조선후기 실사구시에 의거한 실학이 탄생했다는 교과서 한 줄 문장보다 훨씬 많은 이야기가 있었다. 실학자들이 학문에 진지하게 임했던 자세와  혼자 만족하지 않고 여러 사람들과 토론하고 공유하면서 함께 공부해 나갔던 모습이 존경스럽다. 뜻이 통하는 학문적 동지를 만났을 때의 기쁨과 따뜻한 교우는 부럽기까지 하다. 이 책에서 언급한 홍대용이 청나라 항주에서 만난 선비 엄성과 나눈 우정도 감동적이다.

추사 김정희 연구의 일인자로 손꼽히는 후지쓰카 지바시와 그의 아들 아키나오 이야기도 큰 울림을 준다. 일제시대 경성대 교수로 재직하던 후지쓰카 지카시는 청조학을 연구하던 중 우연히 추사 김정희를 알게 되고 이후 광팬이 되어 김정희에 대한 자료를 모으게 된다. 김정희를 연구하면서 내린 결론이 “청조학 연구의 제일인자는 추사 김정희이다”라는 문장이다.

그는 자신이 모은 자료들이 다시 조선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들 아키나오에게 죽기 직전 ‘조선의 유물은 조선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 선친의 뜻을 이은 아키나오는 2006년 자료를 모두 한국에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당시 문화재정장이었던 작가는 즉시 후지쓰카 아키나오에게 문화훈장 목련장을, 최중수 원장에서 포장을 수여할 것을 상신했고, 2006년 5월18일 아키나오는 병상에서 이 훈장을 받았다. 그리고 두 달 뒤 후지쓰카 아키나오는 향년 94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 기증 유물을 토대로 건립된 것이 오날날 과천 과지초당의 추사 박물관이며 추사 김정희의 친필 서간 23점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44호로 지정되었다.


아래는 김정희에 대한 작가의 평이다.

당시 청나라에 대해서는 오랑캐라는 멸시와 그들에게 당했다는 적개심 때문에 북벌론과 소중화사상같은 민족주의적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것은 조선 후기 진경산수가 상징하는 바와 같이 나름대로 민족적인 문화를 이루는 성과를 낳았다.
조선의 실학자들은 청나라 고증학에서 사상적 동질성을 발견하고 깊은 자극을 받았다. 박제가는 이런 사상적 경향을 스스로 ‘북학’이라고 했다. 북학이란 맹자에 나오는 표현으로, 이상보다는 현실, 관념보다는 사실을 더 중요시한다는 뜻이다. 그 북학파의 선봉에 담헌 홍대용과 연암 박지원이 있었고 그 뒤를 초정 박제가를 비롯한 사검서가 이어가고 있었으며, 이것을 청나라와의 긴밀한 교류 속에서 더 높은 차원으로 완성한 분이 바로 추사 김정희였던 것이다.



*공부가 지겨운 사람 혹은 함께하는 공부에 목마른 사람
*조선 후기 꿈틀거리는 새 시대를 향한 변화에 대한 열망과 활발하고 역동적인 움직임을 보고 싶은 사람
*그저 공부와 벗이 좋은 사람
*죽을 때까지 공부하는 것이 꿈인 사람

공부가 좋은 사람들이 읽으면 좋겠다. 언제 한 번 과천에 있다는 추사 박물관에 다녀와야겠다.



*이 글은 출판사의 서평 이벤트로 지원받아 작성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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