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지니아 - 전면개정판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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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이라는 건 뭘까요. (...) 아무한테도 알려지지 않으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하고 똑같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기록되면서 처음으로 어떤 일이 일어났다고 인정을 받는 겁니다(p.305)."


해당 문장과 비슷하면서 다른 문장이 뒤에서 다시 등장한다.


보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으면 보이는 사람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p.397).


 

 

유지니아

저자

온다 리쿠

출판

김영사

발매

2021.12.10.

나의 중학교 시절을 잘 알고 있는 친구라면 온다 리쿠라는 이름이 익숙할지도 모른다. 당시 작은 교내 도서관에 있던 온다 리쿠의 책을 다 읽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게 처음 온다 리쿠를 알려준 책이 이 책이다, 유지니아.


개정판이 나왔길래 눈독을 들이고 있다가 기회가 와 기쁘게 읽었다. 이야기의 큰 틀은 기억하고 있다 생각했는데, 역시 큰 틀만 아는 건 모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ㅋㅋㅋ). 줄거리가 기억남에도 불구하고 처음 듣는 이야기, 처음 보는 문장을 읽는 심정으로 책장을 넘겼다.




여러 입을 빌린다는 것


독특한 형식이 큰 매력이다. 모두의 존경을 받는 가문의 파티에서 열일곱명이 독살 당한다. 그곳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눈먼 딸 하나. 범인은 곧 밝혀지지만 이 사건은 수년이 흘러, 사건 당시 어린아이였던 동네 아이가 대학생이 되어 사건을 재조사하고 쓴 책 '잊혀진 축제'로 세상에 다시 나온다. 


그리고 이 책은 거기서 시간이 또 한 번 흘러, 책을 쓴 대학생과 편집자, 사건 당사자들과 담당 형사 등을 인터뷰하는 내용을 담는다. 외에 인터뷰 외에 전지적 작가나 1인칭 시점의 단문들도 종종 등장한다. 그래서 각 챕터마다 관점이 바뀌고, 서술 방식이 바뀐다.



누군가의 시점으로 전해지는 이야기 형식은 이래서 흥미롭다. 여러 입을 빌린다는 것은 여러 눈을 빌린다는 뜻이다. 모두 진실을 보았는지 알 수 없다. 독자가 끊임없이 이게 사실인지 의심해야 한다. 화자가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할 때도 있고, 자각 없이 사실을 왜곡하기도 한다. 후자의 경우라면 본인이 거짓말을 한다는 자각이 없기 때문에 진위를 파악하기 더욱 어렵다. 전자의 경우에는 치밀해서 또 어렵다. 이러나저러나 사실을 꿰뚫어보기는 쉽지 않다는 뜻이다.  


이 책을 읽고 있으면 눈먼 자들이 설명하는 코끼리를 그리고 있는 기분이 든다. 가장 마지막에 가서야 내가 그린 코끼리가 맞는지 아닌지 점수를 매겨볼 수 있다. 그나마도 정확한 해설은 주어지지 않고 그냥 내 최종 성적만 확인하는 기분이다. 틀린 건 알겠는데... 어디서 어떻게 틀린 거죠?




끝나지 않는 그해 여름


상술한 책의 특징 탓에, 모호함을 싫어하는 독자라면 이 책이 썩 끌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실은 나도 모호하기보다는 분명하게 알려주는 책을 좋아하는데, 애매모호함의 끝을 달리는 듯한 온다의 책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 몰입도에 있다.


 


책마다 다양한 방법으로 몰입을 시키는데, 여기서는 계절감이 크나큰 영향을 끼친다. 책의 시점이 다양하니 시기도 여럿이지만, 대부분 사건 당시, 책 '잊혀진 축제' 제작 당시, 그리고 현재 시점을 이야기한다. 우연하게도, 이 세 가지 시점 모두 여름을 배경으로 한다. 사실 우연이 아니라 온다의 계략(ㅋㅋㅋㅋ)이지만. 그리고 이건 정말 우연하게도 나 또한 후덥지근 한 여름에 책을 읽고 있어 더욱 빠져드는 기분이었다(이것도 출판사의 계략일까?). 난 분명 에어컨 밑에 있는데도 메밀꽃 필 무렵의 첫 문장이 떠오르도록 더위가 들이닥친다.



내가 당장 마주한 여름과 다른 점은, 우리의 여름은 한두 달 후에 끝나겠지만 이 책 속의 여름은 좀처럼 끝나질 않는다는 거다. 다들 그 찌는 더위에서 한 해를, 또 다음 해를 보내는 듯하다. 


p.32


하지만 그해 여름은 그때부터가 길었어요. 그날 때문에 우리도, 이곳 사람들도 여름을 좀처럼 끝낼 수 없었어요.




어렸을 때 좋아했던 책이나 영화, 드라마를 다시 보는 건 굉장히 설레는 일이지만 동시에 두렵다. 예전만큼 즐기지 못하면 그걸 즐기던 과거의 기억도 오염되는 기분이다. 그래서 이 책을 다시 펼칠 때도 약간 고민됐다. 온다 리쿠의 책을 읽은 지 꽤 됐기에 더 그랬다. 그런데 책을 펼치면서는 그런 걱정을 싹 읽고 한순간에 책에 빠져들었다. 책을 다 읽은 지금은 다시 읽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든다.


노스탤지어의 마법사, 온다의 수식어. 보편적인 향수를 어떻게인지 불러내는 온다의 능력 탓에 붙은 별명이지만, 내게는 나만이 경험한 향수까지 불러다 준다.




※ 이 서평은 김영사 대학생 서포터즈 활동의 일환으로 김영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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