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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의 이웃 - 허지웅 산문집
허지웅 지음 / 김영사 / 2022년 8월
평점 :
중학생 때 저자의 에세이 한 권인지 두 권인지를 나름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당시 읽었던 글이 기억나는 건 아니지만 오랜만에 보는 저자명이 반가웠고, 많은 시간이 흐른 작가, 마찬가지로 많은 시간이 흐른 독자의 관계라 궁금했다.
최소한의 이웃
저자
허지웅
출판
김영사
발매
2022.08.22.
흰 우유와 초코 우유
가장 인상 깊었던 구절은 꽤 초반에 등장한다.
p.72
이 세상은 내가 가진 가장 빼어나고 훌륭한 것을 다음 세대에게 전수하고 싶은 마음으로 지탱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려주고 싶은 가장 빼어난 것으로 돈 이외에 다른 것을 상상할 수 없는 사람의 마음은 누구보다 가난합니다. 다음 세대에게 정말 건네줘야 할 것이 무엇인지 다시 고민해 봅니다.
제일 좋은 것, 제일 소중한 것을 물려준다는 말이 와닿는다(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불현듯 생각나는 바람에 씁쓸함이 들기도 했지만,,). 이 말은 한 사람이 나고 죽거나 그에 준하는 긴 세대뿐만 아니라 짧은 몇 년 차이의 세대에도, 아니 위아래가 있지 않아도 어느 관계에서나 적용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초등학교를 다닐 때는 우유 급식이 있었다. 내가 저학년일 때는 무조건 흰 우유였는데, 학교를 졸업할 즈음, 초코우유나 딸기 우유도 나오는 것에 대한 찬반 설문 같은 걸 진행했다. 우리 학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점차 변화 중인 시절이었던 것 같다. 그때 내 친구들은 우리는 어차피 졸업하니 찬성해 봤자 소용도 없는데, 후배들만 맛있는 우유를 먹는 것이 싫어서 그냥 반대하고 싶다고 했다. 그게 특이한 경우도 아니고 그런 아이들이 꽤 많았다.
그때는 반쯤 우스갯소리라고 생각했는데 살다 보면 그런 사람들을, 그런 사회를 꽤 많이 보고 듣고 접하고 살아간다. 자신이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걸 준다고 해서 자신에게 해가 되는 것도 아닌데 그걸 끝까지 놓지 않고 도리어 좋지 않은 걸 두고 간다. 사실 그 심정이 전혀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라 그런 행동과 생각이 가능하게 내버려 둔 사회가 기이하게 보이기도 한다.
좋은 것, 소중한 것을 물려주는 마음이 들기 위해서는 그 상대가 좋고 소중해야 한다. 상대가 내 자리를 빼앗는, 혹은 빼앗을 수 있는 경쟁자 따위가 아니고 같은 편이란 걸 아는 게 중요하다.
p.7 작가의 말
이웃을 향한 분노와 불신을 거두고 나 또한 최소한의 이웃이 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기 위해 책을 펴냅니다.
나보다 어린 사람에게 아첨하기
책의 마지막 챕터에는 국정감사에서 있었던 반말 논란과 함께 어린 사람에게 자연스레 말을 놓는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최근 서빙 알바를 하면서 내게 말을 놓는 어른들을 많이 만난 터라 더 공감이 갔다. 솔직히 어른들이 나를 존중하는 태도로, 정말 예뻐하는 마음으로 반말하는 경우는 나도 신경 쓰지 않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가 생각보다 참 많다.
저자는 아이작 아시모프의 소설 '파운데이션'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한다. "젊은 사람을 다루는 데에는 아첨이 필요하지 않은가. 그렇게 할 책임이 없는 경우에는 더욱더 그렇지." 속이 시원했던 부분인 게, 이게 내가 손님으로 오는 어린아이들에게도 꼬박꼬박 높임말을 하고 더 쉬운 말을 사용할지언정 어른에게 하는 것과 똑같은 안내를 하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들을 동등하게 대할 때 그들도 어른스럽게 굴고 싶어 한다.
아첨이란 말이 부정적인 단어임을 부정할 생각은 없지만, 윗사람에게는 그렇게 잘하면서 아랫사람에게는 못할 게 뭐가 있느냐는 의문은 든다. 누구에게 하든 아첨은 적절히만 하면 내 편을 만드는 행위다.
동의와 비판의 과정
크게는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그래서 한 권의 책으로 나왔지만) 한두 페이지의 짧은 글로 세부적인 논쟁거리를 여러 개 말하는 책이다. 위에는 내가 동의하는 부분을 위주로, 그래서 내 생각이 더 길게 이어지는 부분을 적어놓았지만, 저자와 뜻을 모두 같이하지는 않았다. 나와 정반대라 생각되는 의견도 있었고, 내가 전에는 생각해 보지 않았던 영역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부분을 내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거나, 괜히 읽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마저도 독서의 일부고 내 생각을 확장시켜줄 양식이다.
p.290
지혜란 책 속의 정보 값에서 얻어지는 게 아닙니다. 저자의 아이디어와 내 생각이 만나 동의와 비판의 과정을 거치면서 생기는 겁니다. 사유라는 말이 어렵게 느껴지지만 고전을 붙잡고 낑낑대야만 사유를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만화책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가장 깊고 넓은 생각의 끝에 닿을 수 있습니다.
양식. 책을 표현할 때 흔히 쓰는 표현이다, 마음의 양식. 그건 단순히 읽기만 해서 소화되는 건 아니다. 곱씹어 보면서 나와 맞는 부분은 내 것으로 만들고, 맞지 않는 부분은 타산지석 삼아 내 것을 다시 만들고. 그렇게 해야 양식을 든든하게 먹은 마음이 성장할 수 있다. 진짜 신체의(ㅋㅋㅋ) 양식을 먹을 때도 꿀떡꿀떡 삼켜버리면 안 되고 천천히 씹어가며 먹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 아닐까. 그래서 책을 읽은 후 생각을 확장하고 공유하고 정리하는 단계가 소중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그럴 여지가 많이 남아 유익하다. 이 글의 처음에 마지막으로 저자의 책을 읽은 게 중학교에서라고 했다. 5년이 더 넘는 시간이었고 나는 성장기를 거쳤고 저자는 투병을 겪었다(그리고 개인적인 상황을 치워두고서라도 그 기간이 사회적으로도 좀 다이내믹하지 않았나.....?ㅋㅋㅋㅋㅋㅋㅋ). 저자가 같을 뿐 다른 책을 읽은 것이지만, 어린 시절의 나는 저자와 얼마나 동의하고 얼마나 달리 생각했을지 궁금하다. 또 앞으로의, 5년 후의 나는 어떨까. 이 후기가 있으니 그때는 내 과거의 기록과 비교해 볼 수 있겠다.
※ 이 서평은 김영사 대학생 서포터즈 활동의 일환으로 김영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