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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무새 죽이기
하퍼 리 지음, 김욱동 옮김 / 문예출판사 / 201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개인은 어떻게 성장하는가?
사람은 계속 자란다. 자람, 즉 ‘성장’을 구분해보면 신체의 성장으로 대표되는 외면적 성장과 사고력, 이해심 등의 복합적 요소의 합이라 할 수 있는 내면적 성장으로 나눌 수 있다. 외적과 내적인 성장, 그 어느 것이 더 앞서느냐의 문제는 사람이 ‘사회속의 한 개인으로서’ 성장하는 것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정확히 말하면 ‘어떠한 개인’이 되는지에 크게 영향을 주는 것이다. 예컨대, 한 어린 아이가 책장에서 책을 꺼내기 위해 발돋움을 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보자. 아이는 결국 자신의 신장의 한계를 느끼고 포기하게 되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좀 더 나이가 들자 아이는 책장과 바로 마주 할 만큼 자라 책장에서 손쉽게 책을 꺼내 들 수 있게 되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이면 누구나 아이가 성장했다는 것에 동의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질문을 살짝 바꾸어 이 아이의 내면이 성장했는지의 여부를 묻는다면 선뜻 대답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바로 신체의 성장이 내면의 성장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외면은 이미 어른의 모습으로 자랐으나 생각, 즉 내면은 어린아이의 수준으로 멈추어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외면은 아직 어려도 내면은 성숙한 사람이 있다.
위에서 제시했던 예로 돌아가 질문을 하나 던져보자. 과연 책장 앞에 서 있는 아이의 내면은 성장 했을까? 그렇다면 그 기준은 무엇이라 할 수 있는가. 나는 이에 대한 답을 『앵무새 죽이기』(To kill a mockingbird)에서 찾을 수 있었다. 이 소설 속에서 우리는 어린 아이인 한 소녀가 고통스러우며 좌절적인 경험을 통해서 성숙해지는 과정을 봄으로써 개인의 성장의 과정과 성장의 진정한 의미를 도출해 낼 수 있다.
신체적인 성장은 그 나이 대에 걸맞은 충분한 영양이 공급되어야 건강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 만일 계속 자라나는 아이에게 아무런 영양분이 공급되지 않는다면 그 아이는 서서히 말라 결국엔 영원히 정체되어버리고 만다. 내면적 성장 역시 마찬가지다. 내적 성숙을 이룰 수 있는 요인이 없으면 정체되어 버리고 만다. 나는 이 소설을 전체적 서술자이자 주인공인 스카웃(Scout)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봄으로써 본론으로 들어가 개인을 성장시키는 ‘계기’와 성장의 방향을 바르게 인도해줄 수 있는 ‘안내자’의 의미에 대하여 논해보려 한다.
개인을 성장시키는 ‘계기’에 대하여.
사람들은 보통 경험에서 배운다고들 한다. 여태껏 접해 보지 못했거나 인지하고 있던 것과 정 반대의 상황과 마주치게 됨으로써 그에서 느껴지는 바를 ‘계기’로 한 단계 성장하는 것이다.「앵무새 죽이기」는 초반에서 후반에 이르기까지 스카웃이 일련의 경험을 통해서 깨닫고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녀가 성장하게 되는 여러 가지 경험적 계기 중에서 가장 큰 두 가지로써 흑인인 톰 로빈슨(Tom Robinson)의 재판과 부 래들리(Boo Radley)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통한 이해를 들 수 있다.
스카웃은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결백함에도 불구하고 누명을 벗지 못하는 톰 로빈슨의 재판을 경험하면서 심적 좌절감을 느낀다. 톰 로빈슨의 재판을 보고 있는 이들은 모두 재판이 진행됨에 따라 그가 무고함을 명백히 알게 된다. 그러나 그의 피부색에 대한 사람들의 차별적 인식은 결국 인종이 정의 위에 올라서게 만든다. 이는 스카웃에게 무고한 톰과 그를 변호하는 아버지 애티커스 핀치(Atticus Finch)가 주장하는 ‘옳은 사실’에 사람들이 등을 돌리는 모습을 봄으로써 처음으로 옳은 것이 부당하게 꺾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경험은 고통스러운 일이기는 하지만 스카웃이 온전하지만은 않은 세상을 대면하게 됨으로써 성장하게 만드는 계기이다. 스카웃의 이러한 성장은 정의와 윤리 기준이 존재 하나 온전히 정의롭지도, 도덕적이지도 않은 모순이 가득한 사회에 발을 내딛고 설 수 있게 만든다.
성장의 또 하나의 계기인 부 래들리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소설 중 후반부부터 서서히 조짐이 시작 되다가 마지막 부분에 와서야 온전히 변화하게 된다. 이전의 부에 대한 스카웃의 인식의 바탕은 온전히 그를 부정적으로 여기는 주변인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다. 그녀는 부 래들리와의 만남을 통해 그에 대한 메이콤 군민들의 전반적인 인식은 순전히 관용이 부족한 이들의 편견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게 된다. 이를 통해 그녀가 얻는 큰 깨달음은 소설 마지막 부분의 대사로 집약 된다 할 수 있다.
아빠가 정말 옳았다. 언젠가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보지 않고서는 그 사람을 참말로 이해할 수 없다고 하신 적이 있다. 래들리 아저씨네 집 현관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525)
이 인식의 변화는 어린 스카웃의 성장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관용이 부족한 사회에서는 나와 다름은 곧 이해하려 노력하는 대상이 아니라 배척의 대상이 된다. 어느 시대에도 관용적인 사회는 없었다. 다만 일부의 관용적인 사람들이 사회 전체 곳곳에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스카웃의 인식 변화는 그녀의 성장이 관용적, 즉 타자의 입장에 서서 생각 할 수 있는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개인의 성장을 바르게 인도하는 ‘안내자’에 대하여
사회 속에서 개인은 혼자서 성장 할 수는 없다. 특히 어린아이의 경우에는 필연적으로 주변의 영향을 받으며 자랄 수밖에 없는데 이 성장의 과정에서 영향을 미치는 이들은 영향을 받는 대상이 어떠한 방향으로 성장해나갈 지에 대해 ‘안내자’의 역할을 한다. 자의적이든 아니든 안내자의 역할을 맡게 되는 사람은 가족이나 선생님, 친구 등 그 개인의 삶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이가 많다.
「앵무새 죽이기」에서 스카웃의 성장에 영향을 미치는 인물은 여럿이 있다. 그 중에서도 스카웃이 사고관과 세상을 바라보는 기준을 형성하는 데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 인물을 뽑아보자면 대표적으로 아버지 애티커스와 이웃의 모디 아줌마라고 할 수 있다.
스카웃의 아버지 애티커스는 올곧고 선한 인물로 자신의 아이들이 신체적 성장과 더불어 내적 성장 역시 같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지도와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그는 스카웃에게 있어 사회를 옳고 그름으로 바라보는 기준이 되며 단순히 애티커스가 바른 조언을 해준다는 이유만으로 스카웃의 안내자인 것은 아니다. 그는 사회속 수많은 어른들 중에서도 드물게 언행이 일치하는 인물이다. 사회 속에서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기준을 위해서 ‘집단’에 맞서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고 웬만큼 곧은 심지를 가진 인물이 아니라면 일어나기 쉽지 않다. 그러나 애티커스 핀치는 당시에 흑인의 편을 드는 것은 자신이 속한 사회에 맞서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주저 없이 누명을 쓴 톰 로빈슨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 변호를 한다.
스카웃의 이웃인 모디 앳킨스 아줌마는 메이콤에서 합리적이고 바른 인식을 가진 몇 안되는 인물 중 한명이다. 다정한 이웃이자 친구인 그녀는 스카웃이 부 래들리에 대한 주변의 그릇된 인식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도록 도와준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개인적 판단을 사실화 하지 않는 그녀는 스카웃의 인식의 성장이 바른 방향으로 흐르도록 이끌어주는 환경적 바탕이 되어준다.
“난 네가 뒤뜰에 나가 깡통이나 쏘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새들도 쏘게 될 거야. 맞출 수만 있다면 어치 새를 모두 쏘아도 된다. 하지만 앵무새를 죽이는 건 죄가 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어떤 것을 하면 죄가 된다고 아빠가 말씀 하시는 것을 들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래서 모디 아줌마에게 물어보았다.
“너희 아빠 말씀이 옳아.”
아줌마가 말씀하셨다.
“앵무새들은 인간을 위해 노래를 불러줄 뿐이지 사람들의 채소밭에서 무엇을 따먹지도 않고, 옥수수 창고에 둥지를 틀지도 않고, 우리를 위해 마음을 열어놓고 노래를 부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는 게 없지. 그래서 앵무새를 죽이는 건 죄가 되는 거야.”(173)
애티커스의 말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는 스카웃에게 그의 말이 옳은 것임을 알려주는 그녀는 애티커스에 의해 잡혀진 올바른 인식의 방향이 흔들리지 않도록 이끌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리뷰를 마무리하며
사람은 어떠한 계기를 통해서 성장하며 그 성장하는 방향은 안내자에 의해서 치우치거나 흔들리지 않게 잡힐 수 있다. 안내자와 계기, 이 두 가지 요소는 모두 개인의 성장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어린 스카웃이 애티커스와 모디 앳킨스에 의해서 올바른 인식의 방향을 잡지 못했더라면 환경에 팽배해 있는 부정적인 의식에 점거 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랬을 경우 스카웃의 성장은 결코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루어 질 수 없었을 것이다.
성장의 계기가 되는 경험이 긍정적인 것이라면 이상적일 테지만 삶 속의 성장은 긍정적 계기 보다는 부정적이고 씁쓸한 괴로운 경험을 함으로써 이루어지게 된다. 성장의 계기가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모든 성장에는 변화를 인지하고 내면화하기 위해서 성장통이 뒤 따른다. 이때에 곁에 어떠한 안내자가 있는지가 성장의 방향이 올바르게 이루어질지의 여부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 아무도 온전한 ‘어른’이라 주장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진정한 의미의 어른의 기준은 나이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다만 어른이 되어가고 있을 뿐이다. 어른이 되어간다는 것은 한 단계 한 단계 성장을 거쳐나가는 것이다. 이러한 삶의 모든 성장의 단계에는 그 계기가 존재하며 안내자 역시 필요하다. 다만 성장을 거쳐 갈수록 안내자가 이끌어주었던 방향을 스스로 잡을 수 있게 되면서 안내자의 역할이 줄어드는 것뿐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개인은 비로소 자신 역시 누군가의 안내자가 될 수 있다. 이 소설 속의 주인공 스카웃은 성장했으며 앞으로도 성장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누군가에게 애티커스가 되어줄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모디 앳치스가 되어 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