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에 대한 얕지 않은 지식 - 정신분석학부터 사회학까지 다양한 학문으로 바라본 성
이인 지음 / 을유문화사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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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 칼로. 멕시코 화가. 평생 서른 번이 넘는 수술을 견디고 늘 한 사람 디에고 리베라를 마음에 담은 그녀. 아이도 낳을 수도 없고 한 여성으로서. 아내로서, 딸로서 누리는 삶을 제대로 살 수 없었던 그녀에게 그림은 그녀 그 자체였다.

책장을 넘기며 눈에 익은 그림을 보고는 반가움이 먼저 툭, 튀어 나왔다. 프리다 칼로의 그림 뿌리였다. 자신의 온 몸을 기반으로 줄기가 뻗쳐나가고 그 끝마다 대롱대롱 잎사귀가 매달렸다. 사고로 온전하지 않은 그녀의 다리는 긴 드레스에 가려져 인어처럼 나풀나풀 거린다.

여성이 사회에 두 발을 내딛고 서게 된 날은 언제부터일까. 성해방의 투쟁으로 얻은 여성의 지위는 지금 만족스러운가. 현재, 여성과 남성의 두 성이 평등하게 대등하게 마주보고 있는가. 진정으로 여성답다는 것은 무엇일까.

성해방 앞에서 끊임없이 질문이 쏟아진다. 우리나라는 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이 많다. 불결하거나 금기시 되는 의 개념은 늘 감춰지고 부끄러운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성행위는 인간의 행동 중 가장 아름다운 행위이며 그 행동으로 인해 자기만족뿐만 아니라 주변까지 다르게 보인다. 책속의 말처럼 자기 정체성의 근간인 것이다.

프로이드의 심리성적 5단계에서 남근기에는 초자아가 형성 되는 시기로 리비도가 성기로 옮겨가는 시기이다. 오이디프컴플렉스나 엘렉트라 콤플렉스의 시기를 겪으면서 자신에 대해 더 이해하고 부모에 대한 집착과 선망 그리고 콤플렉스 극복을 통해 자아를 현성해 나가는 시기이다. 리비도의 흐름에 따라 성은 가장 자연스러운 장난감이며 자기를 이해하는 도구가 된다. 단지, 쾌락을 통한 만족이 아닌 본능 그 자체로서의 자아인 것이다. 리비도를 통한 관찰과 경험은 가장 원초적인 쾌락을 자기 안으로 끌어들여 성장에서 성숙으로의 문을 열어준다.

우리나라는 교육만 주입식 교육이 아니라 여성과 남성의 관계도 늘 주입식이었다. 남성은 하늘, 여성은 땅이라는 말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남존여비 사상은 옛 시대를 넘어 지금까지 뿌리깊이 자리하고 있는 현실이다. ‘여자라서혹은 여자답게를 강요하는 사회인 것이다. 급격하게 변화하는 사회 안에서 남·녀 평등이 더디게 가는 것은 아마도 여성과 남성의 성역할이 규격화되어 뿌리 깊게 박혀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남자만 공부하고 남자만 높은 직급에 올라가고 여자는 아이 낳고 살림하고 여자는 늘 남자의 뒤에 서 있는 그림자처럼 여기던 모습이 아직 사회 곳곳에 남아 있다.

보는 방법에 대한 투쟁

우리는 얼마만큼의 시야로 성을 보려고 하는가. 성은 어둡고 나쁜 것이 아니다. 성은 그 자체로 즐기고 받아들이고 함께함을 통해 배려와 관계의 심리학을 배운다. 혼자서 할 수 없는 혹은 혼자서 할 수 있더라도 그 자체는 나와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깔려있다. 행위 그 자체가 아닌 행위를 통한 배려와 만족 그리고 이해가 필요한 또 다른 대화 방식이다. 물론 그 이면에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녹아져 있어야 한다.

상대방을 보는 방법이 내 기준이 아닌 또는 나를 보는 방법이 상대방의 기준이 아닌 우리 자신의 프레임에 대한 투쟁 안에서 온전한 받아들임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 누구도 혼자 살 수 없다. 우리는 누군가와의 관계를 통해 희로애락을 느끼고 그 안에서 나 다움을 발견하고 정진해 나간다. 그 발걸음에는 멈추지 않는 투쟁이 필요하다. 그 어떤 것도 정답은 없다. ‘함께라는 말 안에도 수많은 번뇌와 양보와 나눔이 필요한 것이다. 그 누구의 희생도 아닌 서로에 대한 배려만이 온전한 한 사람으로서 서로를 마주볼 수 있다. 지금, 내 곁에 있는 그 누구도 없이는 만날 수 없는 사람이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어떤 위치에 있든, 어떤 사고방식을 가졌든지, 어떤 환경에 놓이든.... 모두 상관없이 그 사람 그 자체로 빛나는 하나의 덕이다.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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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용기는 없다

 

사노요코는 말한다. 그 누구도 용기는 없다고 말이다. ‘러브 호텔 건설 반대에 서명할 사람 혹은 선뜻 나서서 용기를 보여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저 대중이라는 이름 앞에서, 다수의 사람 앞에서 나를 숨기로 우리를 내세울 뿐이다.

우리의 삶은 어떠한가. 그저 대중이라는 이름에 나를 숨기고 너를 저버리고 우리로만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정치적 소신도 잊고 경제적 가치를 모른 채 하며 시민의식을 땅에 묻고 더 많이 가지려고 더 많이 소유하려고 욕심의 무게추만 기울이고 살고 있는 것이 아닌지 생각이 든다. 그렇게 앞만 보고 달려오다 보니, 지금의 현실 사태가 참 무겁고 먹먹하다.

우리라는 가면을 쓴 우리의 주체인 나는 어디에 있는지 묻고 싶다.

전쟁을 겪은 사노요코의 부모님과 사노요코의 세대들에게 귀한 것은 그저 살아낸다는 것 자체가 아닐까 한다. 어떤 좋은 음식도 아니고 어떤 좋은 옷도 아니고 그저 내 몸 누울 수 있는 공간만이 그들에게 전부가 아닐까. 그래서 사노요코는 방의 다다미 크기가 아닌 여러 가지 모양의 집을 꿈꾼다. 실용과 미학이 아닌 그저 누울 수 있고 괜찮은 화장실이 딸린 그런 공간을 원한다. 요즘의 우리가 방의 구조며 가구며 세세한 인테리어에 신경을 쓰는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온전하게 살기 위해’ , 내 몸 쉴 그 공간만이 유일한 집의 자리인 것이다.

지금 내 몸 쉴 공간을 나는 가지고 있는지 생각해 본다. 그저 잠을 자고 일상을 녹아내는 공간이 아닌, 내 마음 편히 쉴 나만의 아지트가 있는지 말이다. 그 아지트에는 형식도 없고 예의도 없고 걱정도 없는 오로지 온전한 나 자신으로 스며드는 공간이어야 한다. 살포시 떠오르는 장소에 이내, 마음이 따스해 진다.

이번 책은 1980년대에 쓴 에세이가 많다. 30~40여년 전의 일이 소소하고 가볍지 않게 와 닿는 이유는 산다는 건 어느 시대나, 어느 모습이거나 비슷한 모양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 다른 장소, 다른 이유로 생기는 일이 모두 다르지만 우리는 모두 비슷한 무게의 삶을 살고 있다.

 

어쩌면 매일 일어나는 평범한 일들이 최고의 드라마였을지도 모른다

 

그래,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는 용기만 있다면 아니라고 말하는 게 뭐가 어떻고,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뭐가 어떨까 한다. 그저 온전한 한 사람으로 살고 내 삶에 소소한 즐거움으로 채워나간다면 말이다. 투철한 삶의 의지와 용광로 같은 열정이 아니더라도 내 삶의 철학과 주관을 가지고 산다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나의 삶은 반짝반짝 빛이 난다. 하고 싶은 것 하면서 사는 소소한 삶이 어쩌면 가장 어려운 일일 수도 있으니까. 좋아 좋아, 그렇게만, 그렇게만 나에게 용기를 가지고 말이다.

 

메론 한 조각을 음미하며 , 정말 맛있다라는 말이 사노요코의 글에 그대로 맛깔나게 녹아든다. 그 달큰함이 내 삶에도 살포시 미소로 녹아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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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강, 꽃, 달, 밤 - 당시 낭송, 천 년의 시를 읊다
지영재 편역 / 을유문화사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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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강, , , 을 읽고

 

장안의 봄 저물려 하는데,

왁자지껄 거마들 지나간다.

모란이 필 때라고 말하면서,

서로서로 따라가 꽃을 산다.

 

백거이 꽃을 산다중 일부

 

모란꽃은 꽃의 색이 붉기 때문에 란이라 하였고 종자를 생산하지만 굵은 뿌리 위에서 새싹이 돋아나므로 수컷의 형상이라고 모자를 붙였다. 당나라에서는 모란을 아주 귀중하게 여겼다. 그것도 당나라 초기, 개원 천보 연간에는 다만 진귀한 존재였을 뿐이지만 후기 정원 원화 연간에 와서는 크게 유행하여 도하에 이르는 곳마다 재배하였다.

모란은 예로부터 부귀를 상징으로 여겨왔다. 설총의 화왕계에서도 모란은 꽃들의 왕으로 등장하고 있다. 강희안은 그의 저서 양화소록에서 화목 9등품론이라 하여 꽃을 9품으로 나누고 그 품성을 논할 때, 모란은 부귀를 취하여 2품에 두었다.

신부의 예복인 원삼이나 활옷에는 모란꽃이 수놓아졌고 선비들의 소박한 소망을 담은 책거리 그림에도 부귀와 공명을 염원하는 모란꽃이 그려졌다. 왕비나 공주 같은 귀한 신분의 여인들의 옷에는 모란무늬가 들어갔으며 가정집의 수병풍에도 모란은 빠질 수가 없었다. , 미인을 평함에 있어서도 복스럽고 덕 잇는 미인을 모란꽃과 같다고 평하였다.

위의 시구를 읽으면, 봄날의 풍경화가 한 폭 그려진다. 봄이 무르익을 무렵, 서로 서로 모란꽃을 사려고 서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화려하고 귀품 있는 모란을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가는 이들의 발걸음이 가볍게 나풀댄다. 그들의 얼굴에 내려앉은 미소가 꽃보다 더 붉게 저녁놀을 따라 번져간다.

그네들의 삶에 모란은 귀한 봄 그 자체였을 것이다. 구하기 어려운 꽃, 크고 아름다운 생김새, 한 눈에 들어오는 꽃송이 등등 여러 가지 의미가 그들의 손 안에 품어져 있다.

그런데 나는 이 시를 읽으면서 선덕여왕이 생각이 났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선덕여왕 공주시절 일화로 당나라에서 보내온 모란꽃 그림을 보고 선덕여왕이 꽃은 고우나 그림에 나비가 없으니 반드시 향기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씨앗을 심어 본즉 과연 향기가 없었다. 이 그림에 나비가 없는 것은 선덕여왕이 배우자가 없음을 당 태종이 조롱한 것이라 하여 예민한 반응을 보인 것이다.

그러나 모란꽃에는 분명 향기가 있고 벌과 나비도 날아든다. 중국에서는 당나라 때부터 모란꽃에 나비를 같이 그리지 않는 법식이 있었다. 그것은 모란 그림에 나비를 그려 넣게 되면 모란꽃은 부귀를 뜻하고 나비는 질수(80)를 뜻하기 때문에 부귀질수가 된다. 이는 80세가 되도록 부귀를 누리기를 기원하는 의미인데, 부귀를 누리는 나이를 제한을 두어 함께 그리지 못하게 한 것이다.

서로 다른 의미로 해석한 모란꽃은 얼마나 억울했을까. 살아 있는 그 객체를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특히, 말과 그림으로 보여진 객체는 더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그만큼 다르게 해석 될 수도 있다. 이 책에 소개된 여러 편의 시구절도 마찬가지이다. 말로 전해지다가 글로 남게 된 시 구절은 작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읽혔을 수도 있다. 혹은 장난삼아 쓴 언어유희도 있을 수도 있다. 시대나 사람에 따라서도 그 해석이 다른 시도 많다. 한용운의 시에 나오는 이라는 시어처럼 말이다.

이는 글과 그림 분만 아니라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그 사람을 온전하게 바라보고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혜안은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나의 경험이 쌓이고 나의 노력이 더해지고 나의 배려가 삼박자를 이루어야지만 상대방을 조금은 올바르게 보지 않을까 한다.

시간 무르익는 봄 밤, 밤공기를 타고 나의 목소리에서 계절이 녹아든다. 한 구절.. 한 구절.. 계절에서 사람으로 가는 징검다리를 건너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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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해 일한다는 것 - 일의 무게를 덜어 주는 아들러의 조언
기시미 이치로 지음, 전경아 옮김 / 을유문화사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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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것은 그저 사는 것이 아니라 잘 사는 것이다

-플라톤의 크리톤중에서

 

토요일 새벽에 전화기가 울린다. 625, 그 시간에 전화를 하는 분은 가족을 빼놓고는 한 분뿐이다.

홍성에서 학교 밖 아이들을 30년간 키운 삼촌이다. 내가 삼촌이라고 부르면 다들 친척인 줄 안다. 그러나 홍성삼춘은 만인의 삼촌이다. 30년간 결혼도 마다하고 홀로 언덕 위 쪽방에서 아이들을 키운 삼촌. 지금은 12명의 아이들을 키우고 있다.

간이 화장실에, 좁디 좁은 방에서 아이들을 마음으로 키운 삼촌에게 일은 무엇일까,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책 속에 나오는 공헌감이 계속 신경쓰여서 일 것이다.

우리는 먹고 살기 위해서 일을 한다. 의식주를 해결하고 자신의 욕망을 무엇인가 채우려고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먹고 살기 위해서의 의미는 생존을 위해서만 일하려고 하지 말고 잘 살아가는 것을 목적으로 사는 것이다.

아들러는 인생에 세 가지 과제가 있다고 한다. 일의 과제, 교유의 과제, 사랑의 과제가 그것이다. 이 세가지 인생과제는 하나에 치우치지 말고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일 때문에 일에만 치우친다면 그건 진정한 일의 개념이 아니다. 일이라는 벽을 치고 다른 것들을 하지 않으려는 마음과 결단의 문제이다.

삼촌은 학교 밖 아이들을 키우시기도 하지만 봉사활동 단체도 운영하신다. 학교에서 모범생으로 활동하는 단체의 리더로서 늘 솔선수범을 보인다. 술과 담배 그리고 부도덕한 행동을 늘 멀리 두신다. 학교 밖 아이들에게는 아버지로서,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하고 봉사단체 아이들에게는 리더로서의 양 극단의 중심을 잘 잡으신다. 늘 아이들의 안전과 마음의 평화를 위해 궂은 일을 도맡아 하신다. 삼촌에게 일은 사랑 그 자체이다. 아이들이 성장해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마음도 흐뭇함으로 채워진다.

토요일 새벽에 울린 전화는 삼촌의 안부전화도 아니고 당장 대전으로 온다는 연락이었다. 한 시간 뒤 나는 삼촌과 함께 보문산 보리밥집에서 맛있게 밥을 먹고 있었다. 그리고 홍성으로 가기 전에 삼촌이 마지막으로 들른 곳에서 아들러가 말한 세 가지 과제의 조화를 삼촌 얼굴에서 들여다 볼 수 있었다. 20년 전에 자신의 봉사단체에서 활동하던 소녀가 여자가 되어 삼촌의 머리를 깎는 두 사람의 표정에 공헌감이 살포시 내려앉았다. 흐뭇하게 그 소녀를 바라보던 눈동자의 떨림과 삼촌의 머리카락을 다듬는 손의 떨림이 마주친 그 순간.

그 순간은 영원처럼 빛이 났다.

일은 삶을 영위하는 행위 중 하나이다. 그 행위는 힘들거나 아프거나 괴로우면 안 된다. 즐거움과 자기만족과 기쁨으로 가득차야 공헌감을 느낄 수 있다. 나를 위한 채움은 흘러 넘쳐서 다른 이들을 위한 채움으로 나눔이 된다. 일 그 자체가 경제적인 저울질이 아닌 마음의 양식인 것이다.

우리는 사는 것 그 자체에서 삶의 가치를 더 나아가 나의 가치를 알아야 한다. 가치 있는 삶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서 찾고 내 안에서 그 리듬감을 가져야 한다.

공자가 말한 인의 마지막 경지인 음악이 그러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인의 마지막은 살신성인이다. 다른 이들을 위해 나를 놓아버리는 것 혹은 다른 이들을 두루 살피는 것이다. 여기서 나를 놓는다는 것은 자신을 버리는 것이 아니다. 인의 처음은 나와 나의 주변을 살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공부를 해야 한다. 공부는 단기간이 아닌 인생 전반에 걸쳐서 이루어진다. 나를 살피고 부모님을 살피고 주변을 살피는 단계를 같이 밟으면서 말이다. 그 공부가 물이 오르면 절로 음악이 생긴다. 삶의 리듬감이 다른 이들에게 전해지는 것이다.

결국 나를 위해 일한다는 것은 내가 좋아하고 즐길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자신이 하는 일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어 나 자신이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느끼게 되는 것을 말한다.

삼촌의 어깨가 늘 가벼워 보이는 것은 이러한 이유가 아닐까 한다. 그 모든 일이 나를 위해 일하는 것 즉, 나의 마음을 채우는 일이기 때문이다. 삼촌의 공헌감은 그 어려운 일을 하면서도 늘 따뜻한 가슴으로 남을 보살피고 관심을 줄 수 있는 에너지의 근원이 샘물처럼 솟아난다. 그 공헌감에 감사를 드리며 나도 닮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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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하는 힘, 스피노자 인문학 - 처음 만나는 에티카의 감정 수업
심강현 지음 / 을유문화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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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자신이 사랑하는 것의 가치를 믿으십시오,

 

리는 어떤 일을 할 때, 누군가의 눈치를 본다. 나의 가치관이 아닌 사회의 기준에, 사람들의 시선에 나를 맞춘다.

ECD 국가 중 한국의 자살률은 3년 내내 1위다. 청소년의 자살의 이유는 당연 입시제도 때문이다. 공부 위주의 교육방식이 아이들에게 주는 압박은 삶의 꽃을 피우기도 전에 죽음의 문에 그들을 데려다 놓는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이 극찬을 하던 우리의 교육방식. 그 밑바닥에는 뿌리 없는 무성한 가지뿐인 나무인 것이다. 교육의 본질도 의미도 없는 밑바탕은 현시대를 살아가는 학생들에게 외면 받고 그들 스스로를 외톨이로 만든다.

현재의 교육 입시제도는 산업화의 산물이다. 공장에서 필요한 인력 구성을 위한 획일화된 사람의 교육. 단순노동에 최적화된 교육이 지금의 교육방식이다.

자유의지가 아닌 주입식 교육방식은 우리의 삶에 부모의 삶을 고스란히 얹어 놓는다. 이러한 삶의 굴레를 벗어버리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를 우리답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오에 겐자부로의 개인적인 체험속의 버드의 아버지가 삶에 대한 궁극적인 아들이 던진 질문에 자살을 택한다. 그의 죽음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한 명확한 이유가 필요하다. 우리의 존재에 대한 필연성과 목적성을 가지고 말이다.

욕망하는 힘, 스피노자 인문학에서 우리는 그 답을 조금은 엿볼 수 있다. 이 책은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저자의 입맛대로 혹은 우리의 입맛대로 해석해 놓았다. 우리가 늘 생각하던 욕망이 아닌 최선의 선택, 어쩔 수 없는 유일한 선택이 욕망 그 자체이다. 이 욕망의 지렛대 역할을 하는 것이 역량이다. 역량은 그 사람의 그릇, 이성에 의한 의식이자 할 수 있음 그 자체이다.

우리가 갖는 미련과 후회는 정신을 아프게 하는 소화불량이자 구토이다. 누군가 혹은 무엇에 대한 죄책감은 정신의 죽음 이다. 결국 나의 욕망의 그릇은 나의 이성적 그릇에 의해 행동으로 나타나고 그것에 대한 결과는 나의 부족함이 낳은 것이다.

스피노자에게 신은 대우주 그 자체이고 대자연 그대로의 모습이다. 생산되어진 자연과 생산하는 자연 속에서 우리는 인간으로서 나의 그릇을 가늠해 봐야 한다. 이 대자연 앞에서의 삶에 대한 욕망은 원초적인 욕망이며 근원적인 욕망이다. 스피노자는 이것을 코나투스라고 명명한다. 이는 자기보존의 욕망이자 삶의 관성이다. 여러 사람들 사이에서 나를 나답게 만드는 힘, 나만의 관성으로 자리한다.

당신은 선악설과 성선설 중 무엇을 기본으로 생각하는가. 우리의 기본적인 성향은 정해진 방향대로 나아갈까. 스피노자는 이것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 상황과 관계에 따라서 드러난다고 한다. 어떤 이가 내게는 아주 좋은 사람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아주 나쁜 사람일 수도 있다. 영화 너덜런스에 나오는 아버지가 그러하다. 그 아버지는 아들의 죽음으로 무기력감에 빠진다. 삶 자체를 놓아버리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한다. 자신에게는 하나뿐인 사랑하는 아들이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살인자이다. 학교총기살인자가 바로 자신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아들이 남긴 음악을 가지고 밴드활동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한다. 아들의 음악은 다른 이들에게 삶의 활력이지만 아들의 행동은 다른 이들의 목숨을 앗아간 나쁜 사람이다. 이처럼 상황과 관계 속에서 오는 선과 악은 결합이냐 해체냐에 따라 코나투스를 증감시킨다.

스피노자를 감정의 철학자라고 부르는데 그가 가장 중요시한 감정이 바로 사랑이다. 사랑은 모든 감정의 어머니이다. 사랑이라는 이유로 상대의 몸, 마음, 단점, 장점, 배려, 노력 등이 긍정적으로 다가온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모든 감정의 빛은 진정한 사랑으로 다가가기 위해서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야 한다. 사랑한다는 마음으로 모든 것이 허락 되는 것은 아니다. 최근 뉴스에 등장하는 데이트 폭력이 그러하다. 내 마음의 소유욕은 상대방에 대한 집착으로 바껴 사랑을 하는 중이나 그 이후에 상대방에 대한 사랑이 폭력으로 이어진다. 사랑은 소유나 자기만족이 아니다. 사랑의 정념으로부터의 자유, 사랑의 역량으로부터의 자유가 이루어져야 진정한 사랑이 되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나의 정서적 거리감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그리고는 나의 심리적 거리의 파토스를 들여다본다.

내가 추구하는 나의 삶의 자유는 나답게 살아가는가에 대답에 나는 큰소리로 YES라고 답할 수 있다. 내 감정에 솔직하고 내 생각에 자유롭다. 나의 이성의 저울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부단히 매일의 관성에 충실하다. 우리, 우리의 삶에 정념을 버리고 우리 욕망에 맞는 역량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좀 더 이성적인 자유의 영혼이 되기 위해서 말이다.

 

당신 자신을 따르십시오

스피노자의 말처럼, 일단 나를 믿고 직진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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