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겪는 일상을 풀어 놓은 이야기가 에세이다. 모닝커피, 지나간 사람들, 비오는 날, 눈 내리는 날 등등 일상의 작은 이야기들이 나의 이야기가 된다.

이 책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자전적 에세이이다. 30대 후반과 60대 중반에 쓴 같은 이야기이면서 다른 시점. 러시아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작가로서의 삶은 미로 속을 걷는 것과 같았다. 30대의 열정은 만연체의 화려한 문장 속에 녹아든다. 60대의 기억은 간결하면서도 절제된 문장 안에 스며든다.

작가는 자신이 살아온 주변을 스케치 하듯이 글을 쓰고 사람들을 소개해 준다. , 작가는 주변의 인물들을 묘사하면서 자신을 투사시킨다. 그가 아낀 스크라빈과 릴케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그는 음악과 문학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담담하게 서술한다.

작가에게 있어서 작곡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연주는 달랐다. 작가에게 연주는 스스로에게 무력감을 주고 절대음감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여기에서 재능은 기적이자 운명인 것으로 여긴다. 고의적이거나 계획된 것, 의도적인 것, 제멋대로인 것은 재능이 아닌 그 무엇도 아닌 것이다. 가장 순수하면서 그 자체로 빛나는 것이 재능이자 스스로를 빛나게 해주는 것이다.

문학은 릴케의 문학처럼 확고한 내용, 의심할 여지를 남기지 않는, 진지한, 의도된 언어를 가진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의 문학은 능변, 상투어, 원만한 문구의 세게, 추상화, 자신 이전의 글들의 되풀이를 가진 것이었다. 다시 말해, 인위적인 영역이 문학인 것이다.

공자는 인의 마지막을 음악으로 보았다. 즐기고 나눌 수 있는 흥은 인의 종착점이자 누구나 누려야 할 것으로 말이다. 작가에게 있어서 음악은 스스로를 위한 창작 세계이지만 그 누군가와 나누어야 할 순간에는 흥이 아닌 부담감과 압박감으로 느껴졌다. 누군가에게 인정받는 다는 것과 누군가를 동경하기 위한 거리감은 노력으로 채워지지 않는다. 결국 스스로가 즐겁게 할 때, 그 즐거움이 하나의 작품으로 승화되는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시를 쓰고 그 시의 글자 하나, 하나가 스스로 말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바랬다.

책을 읽으면서 인상 깊은 구절이 있다.

우리가 우는 것은 슬퍼서가 아니라 내면의 감정에 아주 정확한 처절한 울림이 있기 때문이다’, 라는.

우리가 감명을 받고 공감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그 작품이 주는 내 안의 울림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비단 작품만이 아닌,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에 대한 깊이감은 내게 미치는 울림의 정도에 있는 것이다. 말도 아닌, 그 사람이 보여주는 행동과 내어주는 마음의 깊이에 따라 내 안의 울림의 깊이도 달라지는 것이다.

시대적 상황, 사람과 상황, 상황과 상황의 안에서 온전한 나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지 의문이 들었다. 온전하게 내 안의 떨림을 받아들이고 나를 표현함에 있어서 거짓도 없이 완전하게 풀어 놓을 수 있는 것. 그것은 아마도 작가에게는 글이 아니었을까.

어머니의 발아래 깊은 심연은 무섭고 두렵던 당시 상황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발아래에도 깊은 어둠이 있고 그 어둠 아래 또 다른 어둠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역사도 전쟁의 역사와 맞물려 있다. 끊임없이 일어나는 수탈과 약탈에 흔들리던 우리네. 일제강점기나 6.25전쟁 등의 큰 역사적인 사건 아래, 우리의 문학은 어떠했는가. 아프고 찢기고 어긋나고 벗겨지고 없어졌다. 지키지 못한 그네들의 마음의 울림이 참으로 슬프고 가련하게 느껴진다. 그 상황에서 가장 자신을 오롯이 지키는 일이 시인 이상처럼 벽 한가득 글을 쓰는 것이 아니었는지.

지금 우리에게 온전한 자신이 되기 위해 스스로를 넘기 위한 발걸음은 무엇인지 이 책은 끊임없이 묻고 있다.

당신의 떨림은 무엇인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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