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시장
김성중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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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너무 일찍 빛나버렸거나 아니면 너무 늦게 빛날 것이라. 아니, 이 길고 지난한 불안, 어쩌면 우리의 삶 동안에 빛이란 없는게 아닐까. 길고 더러운 손톱으로 긁어대며 안에서부터 치미는 질투와 홀로 벌거벗은 몸을 드러낸 연회장 같은 모욕 안에서 이 욕된 몸을 뒹굴다, 끝끝내 닿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빛으로 빛으로부터 가닿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환영.



 우리는 각자 걸어온 기나긴 복도에 대해 말했다. 주코는 책들에 대해, 로나는 세계 일주에 대해, 나는 뒤늦게 시작한 요리에 대해. 서로에게 타인이기 때문에 비밀을 나누는 것이 가능했다. 주코는 두꺼운 책들만 골라 읽다가 생활에 무능한 바보가 돼버렸다고 했고, 로나는 전 세계를 떠도는 것이 사실은 슬프다고 한숨을 쉬었다. 나는 다른 일을 찾지 못해 요리사가 됐으며 트라조돈(항우울제)을 2년째 복욕중이라고 털어놓았다.

 대화 중에 주코와 내가 동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변변한 모험 없이 삼십대를 맞는 게 끔찍하다고 그가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로나는 자신의 팔에 그어진 절망의 세 눈금을 보여주었다. 열일곱에 한 번, 스물에 한 번, 스물아홉에 한 번 그었지.

_「국경시장」



 자신의 생을 온전하게 주무를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주물러지고 때로 으깨지다 못해 터져나가는 게 삶이라면, 그건 나의 생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무엇인게 아닐까. 생을 당면하는 일이 환멸에 시선을 고정하는 일이라면, 어쩌면 우린 이 환멸에 취미를 붙이고 절망에 정을 붙여야 하는 게 아닐까, 환영.



 하긴 '내가 바라는 삶' 같은 게 있기나 할까? 나는 절망에 고착되어 있으면서도 절망을 누리는 것이 좋았고, 그런 자신에게 또다른 절망을 느꼈다.

 _「국경시장」



 여기 김성중 소설 「국경시장」에서 환멸의 생들이 마주하는 것은 지난한 생의 끄트머리에, 오랜 갈증과 피로로 인해 눈 앞에 나타난 신기루, '국경시장'이야. 우연히 물고기를 잡던 소년들이 데려다 준 곳, 돌로 된 사면상이 신전의 입구처럼 자리하고 골함석 지붕 아래 알전구로 빛을 밝힌 노점들이 가득한 곳. 퓨마가죽, 주철로 만든 찻주전자부터 설탕물을 입힌 풋사과 꼬치, 18세기 전쟁에 쓰인 총알까지 그야말로 온갖 것이 가득한 시장.이 모든 것을 사려면 돈이 아니라 자신의 기억을 맞바꿔 물고기 비늘을 사야한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너무나 친절한 욕망의 거리.  



 엔토르, 자레르, 이와쉬, 그리고 느네카...... 그녀들의 이름을 알기 위해 내가 몇 년치의 기억을 팔았는지도 가물가물하다. 아득한 시간이 흐른 것 같은데, 따지고 보면 달이 동쪽으로 몇 걸음 옮겨갈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 뿐이었다.


(...)


 간신히 국경시장에서 탈출한 나는 망연히 주저앉아 도리어 지난밤의 일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기억을 너무 많이 팔아버린 내게 그리워할 것이라고는 그곳밖에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인가?

  _「국경시장」



 왜 생을 통틀어 저 멀리서 명멸하기만 했던 빛들은 늘 환각과도 같은 일렁임으로 죽음과 맞닿아 우리 앞에 놓이는 걸까. 나는 환희를 한 점 베어 물고 독주를 들이켜, 독이 든 열매를 깨물고 전능해졌다는 쾌락을, 이와 이사이로 짓이겨 즙을 터뜨려. 환영, 어쩌면 이 모든 빛들은 신기루가 아니라 내내 우리를 뒤쫓던 그늘은 아니었을까. 동생의 재능을 빼앗고도 평생을 통틀어 '천재'의 재능을 가지지 못해 갈망하던 여자, 천재가 지독한 전염병이라는 것을 알게 된 뒤 그 질병, '쿠문'의 마지막 문고리를 자신만 쥘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여자(「쿠문」)처럼, 우리의 빛은 늘 그 자체로 온전하지 못하고 영원하지도 않아, 오로지 파멸을 통해서 부서지는, 빛들 속에 잠시 머물 수 있을 뿐이야.



 ......기자는 신분을 밝힐 수 없는 어떤 제보자로부터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 사회에 천재병이 확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발견자의 이름을 따라 '쿠문'이라 명명된 이 병은 현대인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이 병에 걸리면 단추 모양의 발진이 돋아난다. 발진은 눈에 띄지 않은 채 전신으러 퍼져나가 장밋빛으로 색이 짙어질 것이다.

 잠복기의 환자는 행복해 보인다. 그는 갑자기 명랑하고 영리한 사람이 되어 주변의 인기를 차지한다. 지인들을 매력적인 언변에 빠져 친구가 죽음을 향한 도정을 시작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다. 이런 상태로 두 달에서 반년 정도의 시간이 흐른다. (...) 

 그때부터 그는 놀라운 집중력으로 작곡·그림·저작·무용 등 온갖 창조적인 작업에 매달릴 것이다. 자기표현을 향한 의지야말로 쿠문의 가장 큰 특징이다. 발진이 연달아 터지고 강렬한 감정으로 으르렁대는 시기에 놀라운 작품들이 탄생하기 때문에 치료를 포기하는 가족들도 적지 않다.

  _「쿠문」



 그러나 놀랍고도 그렇기에 더욱 우리를 하찮게 만드는 사실은 우리는 늘 단 한 번의 찰나, 눈 깜빡임과 같은 순간 빛과 열이 폭발하는 세계를 위해 기어이 자신의 몸을 내놓고 사라질 용의가 있다는 거야. 단 한 번의 폭발만으로도, 기나긴 음습한 질투의 역사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감히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드는 저 무구한 빛의 얼굴들, 돌로 짓이겨 버리고 싶은 투명한 미소들 앞에 우리는 그 일부가 되고자 생을 감히, 그래 감히 저버릴 용의가 늘 있다는 거야. 반짝이는 세계로의 영입이 아니라, 빛 그 자체 안으로 그 너머에 가닿아서 연원을 듣고 이해하고 싶은 욕망, 그러니 환영, 우리는 빛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빛을 이해하고 싶고 가능하면 빛 자체의 일부가 되어 영원을 맴돌고 싶은 거지, 빛나는 일은, 환영, 생각보다 그렇게 중요치 않아. 



 "나는 알아야겠어."

 천재가 되는 게 중요한게 아니었다. 내가 왜 질투하는 인간이 되었는지, 결코 선택한 적이 없고 되고 싶지 않던 모습의 노예로 살아야 했는지, 내가 왜 카인이 되어버렸는지를 알고 싶었다. 편파적인 신의 애정이 닿지 않는 곳이 있다면 카인은 아벨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_「쿠문」



  빛의 사생아들은 합일의 신화적 욕망으로 자신의 미천한 몸을 맞춰지지 않는 관 안에 끼어맞추곤 해. 삶을 파국으로 몰아가는 것은 우리가 끊임없이 무언가를 갈망하는 탓이기에, 가질 수 없는 것을 갈망하는 것이기에, 우리의 한 발은 관 안에 한 발은 그 밖에. 그러니 우연히 인간의 언어를 이해한 킹코브라 '여왕'이 야생의 세계로도 인간의 세계로도 온전히 포섭될 수 없어 이형의 무엇인가로 태어나고자 갈망하는 것(「동족」), 그 죽음 끝에 바라보는 열락의 세계가 빛으로 점철된 것은 당연한 일일테지, 환영.



몸의 절반은 삶 속에, 절반은 죽음 속에 걸쳐진 상태에서 강력한 소화액이 쏟아진다. 언어를 품은 뱀으 뇌수가 이 세례의 물에 녹아들기 시작한다.

 꺼져가는 여왕의 의식 속에 검은 무늬가 새겨진 하얀 낙엽이 나타난다. 여왕은 마지막 힘을 다해 글씨를 더듬어 읽었다. 한 글자 한 글자 읽을 때마다 여왕의 몸에서 날개, 지느러미, 꼬리, 아가미, 물갈퀴, 털, 부리가 차례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여왕은 잠깐 사이에 세상의 모든 육체를 입어볼 수 있었다.

 이윽고 검은 무늬마저 희미해진다. 글자가 사라진 자리에 생겨난 빛이 여왕의 몸 곳곳에 구멍을 뚫기 시작한다.

 구멍난 자리에서 팔과 다리와 목과 얼굴이 나온다. 눈이 뚫리고 코가 솟고 귀가 열리고 입 주위로 두 겹 입술이 돋아난다. 

_「동족」



 평생 빛을 갈망했지만, 가닿은 적 없고, 가닿을리 없다는 암울함 속에서, 환영 너를 쫓아. 기억을 더듬어 걸어가다 보면 분명, 너를 붙잡았던 적이 있을테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빛을 이토록 신화적 감수성으로 쫓고 있진 않을테니, 그러니 내 안에도 어딘가 빛이 돌 핏줄 하나 쯤은 있을거란, 그런 곧 부서질 것만 같은 기대감으로, 환영 너와 마주 보기를, 누군가의 소화액 안에서 누군가 내 가슴에 밀어넣은 칼 끝에서 유리병이 되어버린 자아의 소우주 속에서, 환영 이 모든 빛으로 태어나 빛으로 수렴하는 이야기들, 죽음에 적셔진 휘황찬란한 야시장, 그 수없이 증식되는 골목길에서 네 마른 등을, 게으른 걸음을 마주할 거라 한 번은 반드시 마주칠거라 믿어 의심치 않고 있어.



 숨을 깊게 들이마신 후 걸친 옷을 모두 벗었다.

 차가운 수정 바닥에 눕자 곤충의 날개짓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발끝에서부터 벌레들이 올라오는 감각이 느껴지더니, 마침내 따끔한 최초의 은총이 나를 찔렀다. 다른 벌레들이 그뒤를 잊자 눈앞에 자주색 거품이 부글거렸고 파인애플 돌기처럼 일정한 모양을 지닌 회오리들이 전신을 에워쌌다. 수천 마리의 벌레들이 벗은 내 몸을 벨벳 담요처럼 덮어주었다. 고통과 환희를 견디기 위해 내 등은 둥글게 구부러졌다, 저절로 눈이 감겼다.

 눈부신 빛이, 거기 있었다......

_「쿠문」



 환영, 소리내어 부르면 자꾸 소리내어 부르면 입술을 둥글게 모았다 펼쳤다 다시 모았다 생각보다 피곤한 이름이야 내가 말하고 그럼 소리내어 부르지 않으면 되잖아라고 마른 등을 보이며 누군가 말했을 때, 그 말을 듣고 나는 네 이름을 소리내지 않고 부르면 수천번도 부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 

 환영, 환영, 가만히 부르면 마치 주문이 되는듯, 어디선가 문이 열리기라도 하는 듯, 환영, 환영, 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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