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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링 인 폴
백수린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1. “Non”
남자는 바라본다, 여자를. 여자도 바라본다, 남자를. 마티스의 그림을 바라보는 나는 이 두 남녀 사이에 흐르는 교류의 공기를 느낀다. 느낀다, 그러나 제목인 <Conversation>처럼 이 두 사람이 과연 진정한 대화를 나누고 있을까. 남자의 손은 주머니 안에 여자의 손은 옷에 파묻혀 마치 잘려있는 것처럼 보인다. 두 사람 사이는 창밖의 정원이 보이지만 트여있다는 시원한 느낌은 없다. 하늘은 보이지 않고 창문 밖 나무와 우물들은 모두가 한 단면이 잘려진 채 온전하지 않다. 아니나 다를까 창틀의 장식은 이들의 대화가,대화 아닌 대화임을 확증이라도 하듯 짐짓 단호하게 말한다. “Non” 그래 이들 사이에 흐르는 공기는 소통의 교류가 아닌, 단절의 교류이다. 이 그림을 보고 내내 마음이 불편했던 것은 그리고 어쩐지 슴슴하게 마음에 물이 베어드는 기분이 들었던 것은 이 그림이 소통이 아니라 소통불가를 말하고 있다는 안타까움 그리고 불행히도 친근한 익숙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2. “나는 네가 끝끝내 이해할 수 없을 너야”
“감자를 즐겨 드셨다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할머니가 감자를 왜 먹어?”
내 말에 가족들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엄마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감자를 왜 먹냐니. 배고프면 삶고, 볶고, 쪄서 그냥 먹는 거지. 갑자기 웬 감자 타령이니, 그런 소리 그만하고 너도 이것 좀 봐라.”
“감자를...... 삶아먹고, 볶아먹고, 쪄먹는다고? 엄마는 무슨 그런 끔찍한 농담을 해?”
_「감자의 실종」
나는 너에게 말을 건넨다. 나와 눈을 마주한 너는 나의 말을 듣고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종종 눈을 크게 뜨며 내 말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표현하며, 듣고 있다. 듣고 있다, 너는 나의 말을. 그러나 너는 정말 나의 말을 듣고 있는 것일까. 이해까지 갈 것도 없어, 너 내 말 듣고 있는 거니? 당장이라도 물어보고 싶은 마음을 꾹꾹 억누른다.
아니 사실 너까지 갈 것도 없이, 나는 이미 나의 머리에 떠오른 것을 말로 풀어내면서 그 언어 자체에 의구심을 품는다. ‘왜 있잖아, 어렸을 때 혼자 방 안에 누워서 익숙한 단어를 자꾸 반복하면, 뭐가 좋을까, 그래 사다리나 노래 같은 단어를 자꾸 반복하다보면 너무 반복한 나머지 오히려 그 단어가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경험, 그런 거 다들 있잖아.’ 내가 너에게 사랑을 말하고 싶을 때,나는 그것이, 내가 느낀 감정이 사랑이라는 기표에 적합한 것일까, 의문이 든다. 나는 그 기표를 완전히 통제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 그 기표가 날 통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 입에서 뻗어나간 소리, 사랑은 너의 귀에 닿았을 때 내가 의도한 그 사랑일까. 만일 너의 사랑과 나의 사랑이 다르면 어떡하지, 네가 내가 말한 사랑을 잘못 이해라도 한다면, 네가 나의 언어를 자꾸 너의 언어로 이해한다면, 아니 그 누구의 언어로도 이해하지 못한다면 나는 정말 어떡하지.
그렇지만 나는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내가 발설하는 문장들이 투명하게 전달되리라는 믿음은 더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
말들을 고르고 고르면서 나는 타인의 말을 빌릴 때에만 내가 안전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_「감자의 실종」
3. “내가 묘사한 나의 과거 역시 실제의 내 과거와 같지 않았다. 내가 그려내는 내 미래가 그러하듯이”
유난 떤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도 알고 있다, 어차피 이해라는 말은 곧 오해라는 말이기도 한 것을. 새삼 각성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 어차피 “누군가에게 가장 절실한 사연”일지라도 다른 “타인 앞에서는 진부해지고” 마니까. 어쩌면 소통에 천착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정말 천착하는 것은 우리가 주고받은 언어 해석의 정오가 아니다. 언어마저 우리를 이렇게 배반할진데, 너는 너의 너는 나와 나의 나와 사랑을, 여행을, 기쁨을, 저녁식사를 아니 그 무엇을 진정으로 할 수 있는 것일까. 그저 기표의 어느 언저리에서 표류하는 것이라면 대체 우리가 소통을 할 이유가 무엇이 있다는 것일까.
「폴링 인 폴」의 주인공, 서른 중반이 되도록 연애 한번 못해 본, 그래 요즘말로 ‘철벽녀’인 ‘나’는 자신의 나이보다 한참 아래인 재미교포 ‘폴’에게 빠져들며 자각한다. “때때로 우리는 타인과 조우하고, 그 사람을 다 안다고 착각하며, 그 착각이 주는 달콤함과 씁쓸함 사이를 길 잃은 사람처럼 헤매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던가.”라고. 나는 놓치고 있었다. 이 소통불가의 공허감과 슬픔을 느끼는 것이 나만이 아니라는 것. 주체의 성채 안에 골몰하느라 나의 주변에 수없이 많은 성들, 그 안에서 역시 마찬가지로 울고 웃고 외로워하고 기뻐하는 타인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그들도 소통 불가의 절망에 놓인 외로운 사람들이라는 것을.
“삶이란 신파와 진부, 통속과 전형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말해질 수밖에 없는 것들에 의해 지속되는 것은 아닐까“
_「폴링 인 폴」
어차피 나의 언어가 너의 언어와 필연적으로 불협할 수밖에 없다면 우리는 이해나 오해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말이 터져 나왔고 그대가 그것을 들었다는 사실, 그 하나에서만 오로지 진실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말들이 말하고 싶었던 전부였든 아니었든 간에, 내가 너와 닿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우리는 오해의 절망 속에서 유일무이한 희망 하나를 가질 수 있다. 우리는 적어도 소통을 시도했다, 시도한다!
우리는 형용사나 부사, 은유나 상징이 제거된 가장 단순한 구조의 문장으로만 의사소통을 했다. 때로 우리는 의미가 불분명한 문장들을 만들었고 아주 자주, 정반대의 의미의 어휘를 선택하는 실수를 범하기도 했지만 그런 것들은 대체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 우리는 종종 설명해야 하는 많은 부분들을 생략하거나 변형시켰다. 우리가 주고받은 말 속에서 소향에 흐르던 실개천은 강물이 되기도 하고, 미처 외우지 못한 8월이라는 단어는 3월로 대체되기도 했다.
_「거짓말 연습」
4. Falling in something unknown
나는 말이 때로는(아니 늘) 칼보다 더 날카롭게 상처를 주곤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단어 단위의 착란(「감자의 실종」)에서 언어 자체에 대한 병리적 혼란(「꽃 피는 밤이 오면」)까지를 보며, 그것이 ‘불행히도 친근한 익숙함’으로 다가오는 것을 느끼며 나는 나도 몰랐던 내 안의 언어로 인한 피로를 발견한다.
타자간의 완전한 소통이 불가능한 언어에서, 말로 재현되는 사실 너머에 말 이상이 있음을 아는 것은 분명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자각만으로는 의구심이 잦아들지 않는다. 불안이, 외로움이 가시지 않는다. 백수린의 소설을 두고 문학평론가 서영채가 말하듯, 중요한 것은 소통 불가의 “증상이야말로 우리 삶의 본원적 상태라고 할 수 있”다는 발견, 그 특별할 것 없는 사실이다. 우리 서로가 불가해의 존재이며 우리의 언어가 서로의 몰이해를 부추긴다는 절망의 공유를 통해, 우리는 언어로부터 더 가벼워질 수 있다. 그 공감을 통해서 우리 서로의 언어는 포장을 벗고, 조금 더 탈색되고 순해질 수 있다. 불가능을 인지했을 때 가능해지는 아이러니. 언어의 완전한 이해가 아니라 모두가 언어를 오해한다는 공감을 통해서, 우리는 언어 너머의 세계로 갈 수 있다. 그렇기에 백수린이 말하는 소통은 월경이 아니다. 오히려 언어의 수렁에 깊이깊이 빠져드는 것이다. 그럼으로 언어의 중압감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언어 너머의 세계란 나와 너 사이에 “Non”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고 그 뼈아픈 거리를 좁혀 포옹할 때 만날 수 있는 곳이 아닐까.아주 대단한 게 있을 리 없지만 내가 너와 맞닿았다는 사실만으로 충만해지는 그 무엇. 알지 못하지만 이미 알고 있는 그 무엇.
어디선가 또다시 바람이 거세게 불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멀리서 들리는 그 소리에 우리의 몸은 반사적으로 움츠러들었다. 그렇지만 더이상 두렵지는 않았다. 우리는 카르페디엠을 더욱 힘차게 끌어안았다. 그것이 유령이 먼 곳으로 사라져가면서 내는 바람 소리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령이 출몰할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