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은 누구의 것인가 - 철학, 자본주의를 뒤집다
김상봉 지음 / 꾸리에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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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신에서 고공 크레인 위의 항거까지, 노동자는 왜 여전히 기업에 분노하는가


우리는 노동자가 이름을 갖던 순간을 기억한다. 분신 항거의 전태일에서 85호 크레인의 김진숙까지. 안타깝게도 근대 이후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는 그 목숨을 담보로 항거할 때 그들 자신으로 온전히 명명될 수 있었다. 사측은 기업의 이익을 저해한다는 이유로 그들을 손쉽게 내쫓았고, 단순히 일자리가 아니라 삶의 근거지를 잃은 이들은 살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노동자의 권익을 외치고 저항해야했다. 하나의 기계처럼 근면하고 말이 없기를 강요당했던 노동자들은 기업에서 내쫓기고 맞서 싸울 때 비로소 자신의 이름을 찾을 수 있었다. 우리도 이름을 갖고 있고 우리도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목 놓아 외칠 수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기업 경영자나 노동자 모두 기업 구성원 모두를 위해 행동한다고 말한다. 기업의 관리자들은 생산성의 극대화를 통해 다수의 이익을 창출하고자 한다. 노조는 현재 생산량을 토대로 다수의 이익을 보장받고자 한다. 언뜻 듣기에 비슷한 목적을 가진 이 두 견해는 그러나 엄격히 다른 지점으로 나아간다. 기업이 생산성을 위해 노동자를 활용하여, 얻어진 이익에 대해서 파이를 나눈다면 노조 측은 기업 내부의 노동자를 경영자와 같은 반열에 두고서 모두의 이익을 도모한다. 전자에서 노동자의 고용은 생산성에 따라 늘이거나 줄일 수 있는 선택의 문제이지만 후자에서는 노동자의 고용 보장을 위해 기업의 생산은 당위성을 획득한다.

 

그렇다면 노동자는 왜 분노하는가? 얼핏 듣기에 그럴듯한 경영자의 견해, 생산 증대를 통한 위에서 아래로의 분배모델이 공정하지 않을뿐더러 조직의 존립까지 위협하기 때문이다. 경영자들이 주장하는 기업 성장을 통한 고용 안정과 위기 극복은 허구적인 신화가 된지 오래이다. 성장신화는 더 이상 환부의 마취제가 될 수 없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고 믿었던 근대적 상상력, ‘성장은 오래전에 끝났다. 신자유주의 경쟁사회로 진입하며 찾아낸 빼앗는 성장역시 세계적 경제 불황과 개발도상국가의 희생만을 남긴 채 몰락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도 불구하고 기업은 여전히 지속 가능한 성장을 이야기하며 노동자들에게 기약 없는 거짓 약속을 하고 있다.

 

경영자는 분노하는 노동자를 조직의 이탈자로 취급하며 당면한 문제를 방해, 소란 정도로 축소시키려 애쓴다. 대중은 자신 역시 노동자라는 자각을 잊은 채 피상적으로 노동자의 분노를 대면한다. 하지만 금융 자본을 손에 쥔 초국가적 기업들이 세계를 움직이는 오늘날, 기업의 문제는 곧 국가 그리고 세계 전반의 문제이다. 기업의 구조적 문제는 특정 노동자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이 세계의 구성원인 수많은 들의 문제인 것이다.


성장 종말의 사회, 기업의 방향을 묻다


20세기 동안 생산과 성장만을 주문처럼 뇌까리며 몸집을 불려나간 자본주의 체제는 세계를 국가의 편성이 아닌 거대 기업을 통한 편성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제 기업은 초국가적인 단체로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국가에 편입되었던 국민들은 생존을 위해 기업에 재편성되기를 자처한다. 언제부터 기업이 이렇게 거대해진 것일까? 기업의 큰 몸집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주식회사 체제이다. 주주들의 자본을 모집하고 이것을 경영자가 활용하여 이익을 창출하는 것. 그리고 그 이익을 주주에게 돌려주고 그 아래 직원들에게 합당한 노동의 대가를 지불하는 것. 언뜻 이상적으로 들리는 이 구조는 주식회사가 인간이 아닌 자본으로 이뤄져 있기에 주인이 없다는 자명한 사실의 오해와 악용으로 인해 해악으로 발전된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주인이 없음에도 주인을 자처하는 경영자, 한국식 재벌 회장의 존재가 바로 그것이다. 어느 회사에도 적을 두지 않은 채, 즉 어떤 책임도지지 않으면서 계열사 사장들을 노예처럼 부리는 존재, 추정되는 비자금만 조 단위를 넘지만 정부와의 담합으로 인해 묵인되는 무소불위의 존재. 봉건제의 타파 이후로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라 여겼던 노예제를 자본을 통한 경직된 계층분화로 부활시킨 존재. ‘회장님은 인간을 물화시켜 기만하는 현대의 메피스토텔레스라 할 수 있다.

 

기업이 주주의 투자를 받고 경영된다면 그 이익은 소속된 다수의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기업의 이익은 재벌일가를 중심으로 편성되며 그 자식들에게 은밀하게 양도된다. 경영자가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하여 주식회사를 자신의 수족처럼 활용하는 한국의 재벌 경영 문제는 우리가 모두 익히 알고 있듯. 국가와 국민의 삶을 기만하며 그 존립을 위협하고 있다. 이렇듯 기형적인 구조를 가진 기업이 오늘날 성장 불가능의 시대에서 경영자의 잇속만 챙기며 파멸로 치닫는다면 노동자에게, 우리에게 희망은 없는 게 아닐까. 여기에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의 저자 김상봉은 아니다라고 대답한다. 새로운 상상력, 새로운 대안이 기업에게 있으며, 지금이 바로 새로운 결단을 내려야 할 시점이라 말한다.


자본주의를 반성하고자 하는 논의는 더 이상 학문적 성찰의 문제가 아니다. 생존을 위한 모두의 문제이다. 최근 다시 일어난 생협에 대한 관심이나 몇몇 자급자족 경제구조 실험에서 보듯 이미 세계는 새로운 경제체제, 새로운 사회로의 편입을 필요로 하고 있다. 그렇다고 이 결단이 대기업을 해체하라는 식의 극단적인 이야기는 아니다. 삼성을 비롯한 소수의 대기업이 국가 경제의 전반을 좌지우지하는 한국 경제에서 대기업의 해체는 곧 국가 경제의 붕괴를 야기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김상봉이 말하는 대안은 무엇인가? 그는 먼저 우리가 그동안 오랫동안 혼동해왔던 기업의 소유와 경영의 문제로 돌아가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다분히 상식적이어서 오히려 발칙한 해답,

주주에겐 배당금을 노동자에겐 경영권을


기업이 주식회사의 형태를 띠고 있고 법인격(법으로 규정된 인격으로 인간이 아닌 자본에게 그에 버금가는 권리를 누릴 수 있게 인정하는 것)을 갖고 있다 해도 그것은 인간 위에 군림할 수 없다. 즉 자본은 인격을 지배하거나 기만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생산성 직접적으로는 나의 월급을 위해 기업에 고개를 숙여도 괜찮다라고 생각한다. 이유는 우리의 뇌리에 기업의 자본을 소유한다고 믿는 경영자의 존재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인이 있고 그 주인이 나를 고용했기에 대가를 받으려면 불의도 침묵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이 수없이 언지 하듯 기업이 주식회사의 형태를 띠는 이상 주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주주들은 이익을 원할 뿐 기업의 경영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다. 그들이 선출한 경영자는 기업의 효율적인 운영을 위해 선발되었을 뿐 기업의 소유주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업에 분명 주인, ‘회장님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착각은 자본의 뒤에 숨어 인간을 물화시키고 이로 말미암아 비리를 통해 개인적인 이익을 챙기는 경영자들을 묵인하고 동조하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이다. 이제 기업에 주인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면 어떻게 해야 이 가짜 주인을 몰아내고 주주와 노동자가 모두 이익을 도모하는 구조로 기업을 재편성할 수 있을까? 김상봉의 답은 단순하다. 주인을 자처하는 이를 몰아내고 경영자를 기업의 구성원이 직접 선발하면 된다.


주주는 자본을 제공하지만 그들은 이익 배당을 목적으로 구성된 비고정적 실체이다. 이들은 경영을 담당할 전문성을 갖고 있지 않으며 무엇보다 기업의 운명을 자신들이 책임지지 않는다. 현재 우리나라 법이 지정하는 이사회를 통한 경영자 선출은 이러한 주주의 정체성에 대한 오해로부터 기인했기에 본질적인 모순을 갖고 있다. 해당 기업을 투자의 대상으로만 보는 주주들이 전문성도 없이 기업 내부 운영에 관여하는 것이 정말 효율적일까? 외부 이사가 절반이나 되는 이사회가 기업 운영에 적합한 경영를 제대로 뽑을 수 있을까? 이런 형태의 이사회는 그저 재벌의 로비에 의해 움직이는 하수인이 될 뿐이다. 가장 적합한 경영자 선출은 기업의 이익이 곧 자신의 생존과 결부되었으며 기업을 구성하는 절대 다수인 노동자들의 결정이 아닐까? 기업의 실구성원들이 기업을 이끌어나가는 게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는 기업이 혈통제로 이어지며 소수를 위해 다수를 착취하는 이 시대의 새로운 계급, 노예제의 답습인 한국 경제 구조를 이렇듯 아주 간단한 방법으로 돌파한다. 주식회사의 상장 시점부터 기업에 실질적 주인이 없다면, 그 운영상의 주인은 구성원의 99퍼센트인 노동자이고 그 관리자 역시 노동자여야 한다는 명료한 논리. ‘주식회사 이사는 종업원 총회에서 선임한다라는 이 간단한 생각은 그러나 우리에게 그래도 돼?’라는 의문을 일으킨다. 이 당연한 귀결이 지나치게 급진적이거나 도발적인 것은 아닌가?’라고 노동자인 우리가 검열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문장이 도발적이라면 과연 무엇을 의식한 도발인가? 이 단순명쾌한 해답은 노동자를 위시한 대안이 아니다. 오히려 자본주의 사회를 위한 긴급처방에 가깝다.

 

책은 그동안 우리가 기업의 주인이 누구라고 생각해 왔으며 그것을 어떻게 잘못 신봉해왔는지 파헤치고 노동자가 경영자를 선임해야하는 이유의 근거를 세세하게 제시한다. 그의 대안은 노동자와 경영자간의 관계 판도를 바꾸는 일이지만 결국 모두가 만족할만한 합의를 도출한다는 점에서 필요한 일이다. 김상봉의 견해는 결코 노동자만을 위하지 않는다. 오히려 철저히 현실적으로 기업의 미래와 새로운 가능성을 도출하고자 한다. 그는 기업중심의 고도 금융경제 사회에서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막연한 이론적 타협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가 논하고자 하는 것은 철학적 사유를 통해 기업을 어떤 방식으로 바라보고 통제할 것인가라는 실천 강령에 가깝다. 그렇기에 김상봉은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라고 경영자와 그리고 노동자들에게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노동자의 이름이 분노에서 명명되지 않는 사회의 가능성


기업에서 본인의 이름을 내세우는 것은 노동자가 아닌 관리자로 칭해지는 족벌주의 경영자들이다. 여전히 노동자의 이름은 오로지 항거를 통해서만 명명될 뿐이다. 이름을 불리지 못한다는 것은 곧 그 대상이 인격이 아닌 물체로 인식된다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러한 비인격적인 구조의 기업들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이름의 명명은 모든 대기업이 기업철학으로 내세우는 상생이나 소통, 존중과 같은 모호한 무엇이 아니다. 우리 사회가 봉건제로 퇴보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노동자의 진정한 이름을 되찾을 필요가 있고 그 시작은 바로 기업의 경영권을 노동자가 갖는 일이다. 그리고 이 시작으로 인해 우리는 오늘날 국면한 경제적 위기와 사회 구조의 몰락을 돌파할 수 있다. 주식회사 이사는 종업원 총회에서 선임한다. 이 다분히 현실적인 대안이 도발적으로 들리는 자본주의 디스토피아에서 김상봉은 끊임없이 묻는다.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 해답은 분명 오래전에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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