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혼
배명훈 지음 / 문예중앙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우주를 가로질러 170시간을 날아가야 만날 수 있는 그대


  170시간을 날아가서 40시간 동안 너와 함께한 다음 다시 180시간을 날아서 복귀하는 나를 보고, 후회하지 않느냐고 네가 물었지. 후회하지 않아. 한 번 더 휴가가 생긴대도 또 그렇게 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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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늘 거리(距離)를 마주한다. 목적지를 향해 다가설 때마다 좁혀지는 거리. 무엇인가를 기다릴 때 느끼는 시간적 거리감. 그리고 누군가를 간절히 원할 때, 내가 너가 아니기에 느끼는 현격한 감정의 거리.


  여기 엄청난 거리를 두고 연인에게 연애편지를 쓰는 남자가 있다. 남자는 우주 함선의 작전장교. 여자는 우주멀미를 고통스러워하는 지구태생의 거주인. 광활한 우주를 가로질러 여자를 만나려면 꼬박 170시간. 사랑한다는 말을 건네도 연인에게 닿으려면 1744초가 걸린다. 무엇보다 숨 막히는 건 메시지가 전달되는 시간 동안 연인이 그 자리에 계속 있을지조차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듯 이야기는 한 남자의 애틋한 연애 상황으로 시작한다. 광활한 우주공간의 거리만큼 커지는 애틋함과 쓸쓸함. 하지만 소설은 쉬이 감상에 빠지지 않는다. 담담하게 하지만 분명하게 이야기를 건넬 뿐이다. 이것은 한 편의 연애 고백이지만 동시에 한 편의 전쟁 기록이기 때문이다.


보통의 연애를 둘러싼 우주의 소리 없는 전쟁


  우리는 거리 감각을 통해 세계를 확장한다. 점으로 존재하는 내가 타인과 만나 선이 되고 면이 되어 입체적인 세계의 형상으로 존재할 수 있게 하는 데에, 거리가 존재한다. 나와 너의 거리. 나와 세계와의 거리. 그 거리를 측정하고 가늠하는 것으로 우리는 세계를 안다고 말한다. 그리고 안심한다. 이렇듯 보이지도 알 수도 없는 거리를 적확하게 측정한다는 믿음을 통해 우리는 오늘을 살고, 알 수 없는 미래를 알 법한 미래로 바꾸어간다. 알 수 없는 것은 두려울지 모르나, 그것을 안다라고 규정할 때 두려움은 이내 미지근한 안심으로 변모한다.

우주출신인 주인공은 전쟁 상황 속에 놓여 있다. 지구는 예언이라는 거대한 거리감각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어느 날 파멸의 신전이 지구 상공에 열리고 적들이 쳐들어 올 것이라는 예언. 그 예언을 위시하여 지구에서는 거대한 규모의 우주함대를 구축했고, 이 우주 함대는 알 수 없는 적을 경계하며 이들과 소리 없는 전쟁을 펼치고 있다. 우주에는 중력이 없기에 지구 함대가 쏘는 광자포와 상대편이 쏘는 광자포에 의해 함대가 충돌하고 부서지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그저 섬광으로 가득한 전쟁. 그 한가운데서 남자는 알 수 없는 적의 실체에 가닿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다가오지 않는 미래를 추측하고 가늠하는 예언과 미지의 적을 대면해야하는 실존은 불협화음을 낸다. 감사군의 수장인 리델 원수와 함대의 함장인 데 마라 장군의 갈등이 그것이다. 예언을 믿고 그에 따라 가능한 변수들(내부 공모자나 반란)을 추궁하는 리델 원수와 알 수 없는 적의 실체에 가닿기 위해 직접 대면하는 쪽을 택하는 데 마라 장군은 종속된 의지의 지구태생과 자유 의지의 우주태생이라는 분모로 묶여 대립구도를 형성한다. 그 대립은 연애편지를 쓰는 나의 고민이자 책을 읽는 나의 고민이기도 하다. 알던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모르는 길을 향해 방향을 틀 것인가.


대부분의 지구종 물고기들은 무중력의 바다에 적응을 못해. 평형감각이 사라져서 계속 추락하고 있다고 느끼거든. 그래서 몸을 위로 들어올려. 자기 딴에는 추락하지 않으려고 열심히 위로 헤엄을 치는 거지. 하지만 그래봐야 추락한다는 느낌이 사라지지는 않아. 헤엄쳐서 간 곳도 여전히 위는 아니니까. 그래서 또다시 위쪽을 향해 헤엄치는 거야. 그런 식으로 빙글빙글 제자리를 도는 거지. 머리 뒤쪽을 향해 크게 원을 그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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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중 일부, 지구에서 진화한 종이면서도 무중력의 바다에 비교적 잘 적응한 물고기들이 있어. 같은 방향으로 헤엄치기는 하지만 저마다 배를 다른 쪽으로 하고 헤엄치는 물고기 떼. 그게 바로 나야. 신의 섭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물고기지. 어느 방향을 보고 있든 내가 놓여 있는 방향이 옳은 방향이라고 생각하는 물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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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언과 궤도를 벗어나 불확실성의 세계로, 무한한 변수의 우주로


  배명훈의 소설 청혼은 빈 공간이 가득한 책이다. 속지부터 중간 중간 삽입된 일러스트의 섬세한 배치도 돋보이지만 이 짧은 이야기를 가장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바로 이 빈 공간이다. 한 쪽에 열한 줄, 본문 내용을 둘러싼 충분한 행간과 여백. 마치 공허한 우주를 표류하는 듯 문장들은 끊임없이 확장하는 우주의 한 편을 차지한 채 쓸쓸하지만 빛으로 가득한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그것은 전쟁 간의 섬광으로 인한 빛이기도 하고 정해진 예언의 궤도를 빗겨나갈 때 가능한 수많은 변수의 세계, 바로 우주의 본질에 가닿는 가능성의 빛이기도 하다.


  연애편지의 문법을 통해 들려주는 이 이야기는 한 남자의 청혼이기도 하고 우주 속에 펼쳐지는 비현실적인그래서 더욱 아름다운전쟁사이자 우리의 거리감각에 대한 일탈기이기도 하다. 앞서 이야기 했듯 우리가 거리감각을 벼리는 것으로 세계를 인지하고 수많은 변수의 폭을 줄인다면, 거리감각을 버리는 것으로 세계의 수많은 변수를 나의 운명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무엇이 되었든 간에 배명훈이 능숙하게 펼쳐가는 이 한편의 소설을 통해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것이 꽤 그럴싸하게 빛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우주 공간을 빗겨가는 광자포의 섬광, 폭발을 각오했을 때 만나는 새로운 가능성, 무한한 변수의 우주.

단언컨대 이 책은 한편의 가장 아름다운 우주연애편지이자 가능성의 세계로 떠나는 가장 흥미로운 '우주' 안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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