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탄의 체제와 예수의 비폭력 - 지배체제 속의 악령들에 대한 분별과 저항
월터 윙크 지음, 한성수 옮김 / 한국기독교연구소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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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터 윙크의 성경해석은 참신하며 신선한 충격을 준다. 성경의 최종형태가 가지는 권위를 비교적 중시하지 않는 리버럴한 전통에 서 있는 학자들은 우리 복음주의자들이 성경을 자신이 학습해 온 선입견 안에서 전형적이며 식상한 방식으로 해석하는 보수성에 대한 좋은 해독제를 제공해 준다. 평화주의의 전통에 서 있는 저자는 비폭력이지만 강력한 체제전복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던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풍성한 석의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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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논쟁
앤터니 플루 & 게리 하버마스 지음, 최효은 옮김 / IVP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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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무신론 철학자였던 앤터니 플루과 부활논증 전문가로 알려진 게리 하버마스의 부활논쟁을 다룬 책이다.
두 사람은 25년동안 세 차례에 걸친 공식적인 부활논쟁을 벌였는데 그것을 계기로 교류가 시작되어 두 사람은 플루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아름다운 우정을 나누었다. 
이 책에 실린 3차 논쟁이 있은지 얼마 후인 2004년, 앤터니 플루는 '유신론'으로의 전향을 선언해(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아니다) 전세계를 놀라게 하였는데, 그것에 게리 하버마스와의 대화가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음을 언급하기도 했다.

이 책의 가치는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우리 시대 최고의 부활 전문가로 알려진 게리 하버마스의 부활논증을 들을 수 있다. 
둘째, 생각과 신념이 다른 두 사람이 그 입장 차이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우정을 키워나가는 모습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실제로 나에겐 게리 하버마스의 논리적 치밀함과 자신감도 인상적이었지만, 앤터니 플루의 겸손함이 더 인상적이었다). 
그러므로 이 책은 '무신론 끝판왕과 부활논증 끝판왕이 싸워서 부활논증가가 이겼다!'라고 말하기 위한 유치한 선전용으로 읽을 책이 아니다(책에서도 지적하듯이 반대방향으로의 전향 역시도 많이 일어난다). 그 대신 우리는 이 책에서 '태도'를 배울 수 있다. 기독교는 all이고 그 밖에는 nothing이라는 듯한 태도는 우리 시대의 복음전도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며 지탄의 대상만 될 뿐이다. 우리는 이 두 사람을 통해 서로를 따뜻하게 존중하며 정직하게 진리를 탐구하는 대화를 지속해가는 법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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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다움 -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두 가지 중심
팀 체스터 & 스티브 티미스 지음, 김경아 옮김 / IVP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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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 달 사이에 내 페친들의 담벼락에 가장 많이 언급된 책은 아마 <교회다움>이었을 것이다.
이 책은 전통교회와 이머징교회 사이의 중도노선을 제시하는 책으로서 조금 먼저 출간된 <깊이 있는 교회>와 자주 비교되었고, 공저자 중 한 명인 팀 체스터에 대한 관심도 여전히 컸다(아마 팀 체스터를 '포스트 존 스토트'로 소개한 영국IVP의 영향일 것이다).
그 화제작을 드디어 읽었다. 집어들고나서 만 하루도 안 되어 다 읽어버렸다. 그만큼 힘있고 매력적인 책이다.

<깊이있는 교회>와 관련해서는 둘 사이의 차이점이 서로를 잘 보완해주는 책이라고 생각된다. <깊이있는 교회>가 약간 더 이론적이라면 <교회다움>은 적용에 좀 더 강조점이 있다. 또한 두 책이 제시하고 있는 교회모델의 차이도 흥미롭다. <깊이있는 교회>의 뉴포트비치 리디머 장로교회는 교회형태는 전통교회에 가까운 대신 신학적으로는 (크라우디드 하우스에 비해) 좀 더 개방적이고 유연하다. 그에 비해 <교회다움>의 크라우디드 하우스는 교회형태(가정교회의 느슨한 연합체)는 파격적인데 비해 견지하고 있는 신학은 꽤 보수적이다. 이러한 차이는 전통교회와 이머징교회의 중간 영역에서도 꽤 다양한 형태의 교회가 가능함을 보여주는 실례로서 매우 의미있다고 생각한다. 

팀 체스터에 관해서는, 그를 '포스트 존 스토트'로 소개하는 것은 그다지 적절치 않아 보인다. 내가 보기에 그는 존 스토트보다는 오히려 로이드 존스를 연상시킨다. 물론 신학적 입장은 로이드 존스보다 존 스토트에 더 가깝겠지만 사람이 주는 느낌이랄까, 신앙의 결이랄까 그런 거 말이다. 확신과 열정은 큰 장점이지만 균형이라는 점에서 볼 때는 관점이 협소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이 책에서 특히 '목회적 돌봄'과 '영성' 파트는 저자의 견해가 상당히 좁아서 동의 안되는 부분이 꽤 있었다.

그러한 단점을 감안하고라도, 이 책은 쏟아져 나오는 교회에 대한 수많은 책들 중에서 꼭 읽어야 할 몇 권의 책 목록에 가뿐히 올라갈 책이다. 교회다운 교회를 고민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살아내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쓰여진 참으로 강력한 책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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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평전 - 시대를 밝힌 '사상의 은사'
김삼웅 지음 / 책으로보는세상(책보세)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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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밝힌 ‘사상의 은사’.

책표지에 쓰여 있는 이 짤막한 글은 리영희 선생의 글과 삶이 가지는 의미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물론 나는 그가 밝혀준 시대를 함께 지나와 그를 사상의 은사라고 고백할 수 있는 그 세대의 사람은 아니다. 부끄럽지만 얼마전까지도 그에 대한 나의 지식이라고는 두음법칙을 따르지 않고 성을 ‘리’라고 표기하는 것에서 느꼈던 뭔가 낮설고 불온(?)한 이미지, 그리고 그동안 읽었던 여러 책에서 수차례 언급되곤 했던 <전환시대의 논리>라는 왠지 간지나는 책 제목이 전부였다.

그러던 내가 리영희 선생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건 유시민의 책 <청춘의 독서>와 조정래의 대하소설<한강>을 읽고 난 후부터였다. 그 두 책들은 한국사회의 민주화를 이뤄낸 세대들에게 그가 미친 영향이 얼마나 지대했는지를 아주 강렬하게 보여주었다. 그 후 나는 리영희 선생이 한국 근현대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알아야 할 인물 중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의 평전을 발견했을 때 나는 반가운 마음으로 주저없이 집어들었다.

 

‘사상의 은사’라는 찬사와 ‘의식화의 원흉’이라는 비난을 동시에 받아온 그였지만, 평전을 통해 알게 된 그는 의외로 단순히 ‘좌’로 규정될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역사와 사회를 바라보는 안목에 있어서, 그의 저서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의 제목이 보여주듯이 그는 자본주의에 대한 맹신과 사회주의에 대한 맹신 모두를 경계했으며 양자의 상호공존과 보완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사회주의가 없는 자본주의는 부패, 불법, 타락, 빈부격차, 폭력, 범죄, 잔인, 인간소외 등을 낳게 마련이에요. 그것들은 자본주의의 ‘본태성 질병’이에요. 어쩔 수 없어요. 사회주의의 인간중시 가치관만이 그러한 자본주의의 반인간적 측면을 방지하고 보완하는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본주의의 질병이 그 제도의 골수에까지 심화하여 제도 자체가 붕괴하는 위험을 어느 정도의 선에서 예방하고 존속하기 위해서는, 또 그렇기를 원한다면 사회주의가 필수불가결하다는 것이지요. 나는 우선 지난 300~400년 사이에 인류의 발전을 이루어왔던 제도의 변화를 바라보면서, 그래도 상대적으로 바람직한 것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적절한 배합이라고 생각합니다. - <대화> 중에서.

 

그가 중국식 사회주의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감안하더라도, 정작 그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공존과 보완에 있어서 그 기본틀은 자본주의가 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초기부터 후기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유신독재와 신군부시대의 권력이 리영희 선생을 그토록 탄압했던 것은 그의 사상 또는 이념이 급진적이었기 때문이라기보다 그가 어두운 시대에 지식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삶으로 보여주었던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고 판단한다. 독재권력에게는 그의 ‘사상’보다 그의 ‘태도’가 더 큰 위협이었을 것이다.

수많은 옥고를 치르면서도 어떠한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끝내 불의에 대한 비판의 날을 거두지 않았던 용기와 기개.

언론인과 교수로서 높은 명성에도 불구하고 불의한 정권과 타협하지 않는 올곧은 삶을 살았기에 수많은 해직을 겪으며 평생을 가난하게 살아야 했던 삶(특히 선생의 나이 예순 다섯에 처음으로 온수가 나오는 집에서 살 수 있었다는 대목에서는 마음이 아려왔다).

이러한 태도와 삶에서 나온 글이었기에 그의 글은 어두운 시대를 밝히는 빛이 될 수 있었고 그는 시대의 양심을 대표하는 인물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지식을 전달한 사람이라기보다는 각성을 전달한 사람이었다. 각성이란 누군가를 배울 수 있게 만드는 일이다. 나는 리영희를 통해 보건대, 스승이란 ‘가르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배우게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사람들의 선입견을 깨뜨렸고, 사람들의 잠을 깨웠다. 한마디로 그는 일깨우는 사람이었다. - 고병권의 글, <리영희 프리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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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체험과 영성수련
유해룡 지음 /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 199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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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신대 영성신학 유해룡 교수가 <영성의 발자취>를 내기 전까지 영성수업의 교재로 사용되었던 책.

<영성의 발자취>는 이 책에서 개론 수업에 필요한 내용만을 추려내어 다듬고 새로운 내용을 보강한 책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책은 <영성의 발자취>보다 이론적으로 보다 상세하며 심도 있는 내용이 담겨 있다. 두 권의 책이 겹치는 내용은 의외로 많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 체험과 영성수련>, <영성의 발자취> 두 권의 책을 모두 읽는다면 영성신학의 이론적 기초를 정립하는데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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