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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렌스 콜 - 주의력 자본주의는 우리 시대의 비즈니스와 정치를 어떻게 바꾸고 있는가
크리스 헤이즈 지음, 박유현 옮김 / 사회평론 / 2025년 5월
평점 :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새벽 2시,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을 손에 든 채로 무한 스크롤의 늪에 빠져 있을 때가 있다. 처음엔 그저 잠깐 뉴스나 확인하려 했는데, 어느새 몇 시간이 흘러버린다. 손가락은 기계적으로 화면을 쓸어내리고, 눈은 의미 없는 정보들을 흡수한다. 그러다 문득 깨어나면 묘한 공허함이 밀려온다. 무엇을 봤는지도 기억나지 않고, 왜 이렇게 오랜 시간을 보냈는지도 모르겠다. 마치 시간이 도둑맞은 것 같은 기분이다. 크리스 헤이즈의 <사이렌스 콜>을 읽으며, 이런 일상적 경험들이 개인의 의지박약 문제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우리는 정교하게 설계된 시스템 안에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내 주의력이 상품이 되어 경매장에서 거래되고 있다는 사실, 내가 보는 모든 것들이 나를 더 오래 붙잡아두기 위해 치밀하게 계산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서늘한 기분이 들었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에서 오디세우스는 사이렌의 노래를 듣기 위해 자신을 돛대에 묶었다. 그는 사이렌의 유혹을 알고 있었고, 그에 대비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사이렌의 존재조차 인식하지 못한 채 그들의 노래에 홀려 있다. 더 안타까운 건, 우리 주변 모든 사람들이 같은 상황에 처해 있다는 점이다. 지하철에서 주변을 둘러보면 거의 모든 사람이 스마트폰을 보고 있다. 각자 자신만의 디지털 세계에 빠져 있고, 현실의 타인과는 점점 멀어져 간다. 가족끼리 식당에 앉아서도 각자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풍경이 이제는 너무나 자연스럽다.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지만, 실제로는 더욱 고립되어 가고 있다. 이런 현상을 목격할 때마다 씁쓸함을 느꼈는데, 이 책을 읽고 나서야 그 감정의 정체를 명확히 할 수 있었다. 우리가 잃고 있는 것은 단순히 시간이 아니라, 인간다운 연결과 깊이 있는 사고,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갈 자유였던 것이다.
헤이즈가 묘사한 '슬롯머신 모델'은 충격적이면서도 너무나 친숙했다.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을 열 때마다 느끼는 그 묘한 기대감, 새로운 알림이 있을지 모른다는 두근거림, 그리고 아무것도 없을 때의 실망감까지. 이 모든 것이 우연이 아니라 정교한 설계의 결과라니.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우리 일상 곳곳에 스며든 이 논리였다. 육아도, 연애도, 친구 관계도 이제는 '좋아요'와 '댓글' 개수로 평가받는다. 아이가 첫걸음을 떼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도, 그 순간 자체를 온전히 경험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소셜미디어에서 더 많은 반응을 얻을지 먼저 생각하게 된다. 진정한 경험보다 그것의 재현과 공유가 더 중요해진 세상에서, 우리의 감정과 관계까지 공연이 되어버렸다.
트럼프 현상에 대한 헤이즈의 분석은 특히 날카로웠다. 그가 어떻게 모든 정치적 관례를 무시하면서도 결국 승리할 수 있었는지, 그 메커니즘을 이해하게 되니 현대 정치의 암울한 현실이 보였다. 진실이나 정책의 옳고 그름보다는, 얼마나 많은 관심을 끌 수 있느냐가 정치적 성공의 척도가 되어버린 시대. 이런 환경에서는 가장 극단적이고 자극적인 목소리만이 살아남는다. 한국 정치 역시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정책 토론보다는 개인적 스캔들이 더 주목받고, 복잡한 사회 문제들은 단순한 슬로건으로 축약된다. 시민들은 깊이 있는 정보를 얻기보다는 자극적인 헤드라인에만 반응한다. 민주주의의 근간인 숙의와 토론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감정적 동조와 진영 논리가 차지한다.
마르크스가 말한 소외와는 다른, 새로운 형태의 소외를 우리는 경험하고 있다. 내 주의력이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어딘가로 끌려간다는 느낌, 내가 보고 싶은 것과 실제로 보게 되는 것 사이의 괴리감. 이런 경험들이 축적되면서 삶에 대한 통제감을 잃어간다. 특히 젊은 세대일수록 이런 소외감이 더 깊다. 태어날 때부터 디지털 환경에 노출된 그들에게는 주의력을 스스로 조절한다는 것 자체가 낯선 경험이다. 책을 끝까지 읽지 못하고, 영화 한 편을 집중해서 보지 못하는 자신을 탓하지만, 그것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의 문제라는 걸 깨닫기는 쉽지 않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깊이다. 몰입의 즐거움, 하나의 주제에 오랫동안 집중하며 생각을 발전시켜가는 경험,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얻는 성취감과 만족감. 이런것들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대신 우리는 표면적이고 파편적인 정보들에 둘러싸여 있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깊이 이해하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는 것 같지만 진정한 관계는 부족하다. 바쁘게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정작 의미 있는 일은 하지 못하고 있다
헤이즈가 던진 근본적 질문 앞에서 한참을 생각했다. 만약 내가 내 주의력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다면, 나는 무엇에 집중하고 싶을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사람들이었다. 가족,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휴대폰을 보지 않고 온전히 그들에게만 집중하고 싶다. 그들의 말을 진정으로 듣고, 그들의 감정을 느끼며, 함께 웃고 공감하는 시간을 갖고 싶다. 두 번째는 창조적 활동이다.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무언가를 만드는 일에 몰입하고 싶다. 중간중간 알림에 방해받지 않고, 몇 시간이고 하나의 작업에만 집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세 번째는 자연이다. 산책하며 계절의 변화를 느끼고, 하늘을 바라보며 구름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새소리에 귀 기울이는 시간. 이런 경험들이 주는 평온함과 충만함을 더 자주 느끼고 싶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현대판 오디세우스의 지혜다. 사이렌의 존재를 인식하고, 그들의 유혹에 대비하는 것. 하지만 오디세우스처럼 자신을 묶어둘 필요는 없다. 대신 우리는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휴대폰 사용 시간을 제한하고, 특정 시간대에는 아예 접근하지 않는 규칙을 만들었다. 소셜미디어 앱을 삭제하고, 필요할 때만 웹브라우저로 접속한다. 중요한 일을 할 때는 휴대폰을 다른 방에 두고 온다. 하지만 이런 개인적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사회적 차원에서의 변화가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인식하는 것이다.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나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