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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가 바보들에게 두 번째 이야기 ㅣ 김수환 추기경 잠언집 2
김수환 지음, 장혜민(알퐁소) / 산호와진주 / 2009년 7월
평점 :
부끄럽게만 유년을 추억하는 것만큼 미련한 일이 있을까. 하지만 책을 펴기 전 나는 한때 장차 사제가 되겠노라는 유년시절의 꿈이 떠올라 잠시 손을 움칫거려야 했다. 도대체 이유를 알 수 없는 부끄럽다는 느낌. 어떻게 생각하면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은 '변한다'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 그래서인지 변치 않고 자신을 오롯이 지켜간 사람들의 이름은 별이 되어 세인들의 영혼을 풍족하게 하곤 한다. 사람들의 가슴을 긴 울림으로 치고 지나간 김수환 추기경의 삶 역시 별이 될 것이라고 의심치 않는 것은 비단 선종 직후 유행처럼 번졌던 추모 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사람이 진정 사람다웠노라고 말할 수 있는 것, 사제가 진실로 사제다웠노라고 말할 수 있는 것. 그것은 그저 간단한 말 한마디 일수도 있지만 그 말 이면에 숨겨진 진의는 다시 간단히 그 말을 넘어선다.
처음 '바보가 바보들에게' 라는 책의 이름을 읽은 나는 제목에 어떤 중의(重義)가 숨겨져 있을 것이라는 예상을 했다. 그렇지만 아마도 '바보가'의 바보는 그냥 단순한 의미로의 바보가 아니라 어떤 종교적인 깨달음을 얻은 사람, 즉 김수환 추기경을 지칭하는 말이며, '바보에게'의 바보는 영리한 행세를 하지만 실은 중요한 것들을 잊고 사는 현대인들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리라는 내 예상은 이 책의 가장 첫 장에 적혀 있는 김수환 추기경의 생전 말씀, ‘안다고 나대고, 대접받길 바라고, 내가 가장 바보같이 산 것 같아요.’의 한 줄로 인해 변명의 여지도 없이 빗나가 버리고 말았다. 바보는 그냥 그대로 바보일 뿐이었다. 이 책의 제목에 무엇인가 숨겨진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의심을 품었던 나는 정말 그대로 바보가 되었다.
사실 우리는 바보를 자처하는 사람들의 습성이란 대체로 거북하다는 것을 이미 체험으로 알고 있다. 다른 사람들의 지식 체계를 거부하고 조소하며 그 기반을 무참히 붕괴시키면서도 천연덕스럽게 스스로를 무지한 사람이라고 칭했던 소크라테스가 그랬고, 조조의 휘하에서 야채밭을 가꾸며 천둥소리에 놀란 척 술상 밑으로 숨어들던 유비가 그랬다. 바보를 자처하고 누군가를 가르치려 한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가르치는 자로서의 책임을 크게 덜 수 있는 구실로 작용할 수도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나도 잘 모르지만 이건 이렇게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식의 가르침은 책임회피와 같은 맥락으로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바로 그런 면에서 세상에 널린 가르침과는 다른 파장을 가진다. 다른 이들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것을 가르쳐 보겠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을 낮은 목소리로 조곤조곤 되새겨주는 그런 목소리. 이 책에 깃든 목소리는 왠지 그런 느낌이다. 굳이 어떤 부분이 마음에 와 닿더라 하는 언급을 하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구절구절이 다 옳은 이야기였기 때문일 것이다. 작고 낮으나 숨김과 피함이 없는 목소리, 야구로 말하자면 쇼맨기질 없이 직구만을 던지는 투수라고 할까. 이 책의 제목이 진정한 겸손의 산물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데만도 시간을 허비했던 내가 책의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리는 없는 노릇이었다.
김수환 추기경의 이름이 찍히지 않았다면 그 누구도 돌아보지 않았을 것들, 너무나 사소해서 오히려 무거운 가르침들, 모두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은 것들이 단정하게 적힌 자리를 눈으로 좇아가며 나는 아주 오랜만에 유년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사람 산다는 일은 그렇다, 당연하지만 어쩌면 아닌 듯도 하고, 언뜻 괴로운 것 같지만 한 호흡 돌이킬 시간은 나게 마련인 생. 조급하게 살아야 하는 수험생(!)이 잠시 쉬어갈 곳을 마련해 준 이 책에 작은 감사의 점을 찍고 싶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누구나 할 수는 없는 일들을 해온 분이 남긴 말씀들은 결코 어렵지 않다. 그렇다, 진리란 본디 아주 가볍고 간편하며 부담이 없는 것. 심오하고 고단한 진리들에 지쳐있던 대학시절, 그리고 어딘가에 소속되기 위해 책을 파고들던 각박한 오늘은 어쩌면 세월 지나면 한 잔 술에 안주 삼을 우스운 추억이 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