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원의 탄생
니겔 로스펠스 지음, 이한중 옮김 / 지호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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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동물들은 어디서 오는 걸까?"
니겔 로스펠스의 《동물원의 탄생》 서평


어린 아이들이 자주 가는 교육장소 중 하나가 동물원이다. 동물원은 아이들이 동물을 보고 먹이를 주면서 즐겁게 놀 수 있는 위락시설이며, 좀처럼 보기 힘든 동물들을 눈앞에서 볼 수 있는 공공교육의 장이기도 하다.

그런데 동물원에서만 다양한 동물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도시에서 동물과의 접촉은 사람에게 위협적이지 않은 애완동물을 제외하면 드물다는 뜻이다. 동물과 접촉할 수 없다는 것은 근대화된 공간의 특징이다. 비록 현대사회의 동물원이 대도시에 넓은 공간을 점유한 대중의 대표적인 휴식공간으로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지만, 그 이전의 동물원은 현대와는 다른 형태였을 것이다. 존 버거는 19세기 산업화 과정을 “동물 주변화 과정”이라고 명명했다. 즉 공공 동물원이 생겨나기 시작한 시점과 사람들의 일상에서 동물들이 사라진 시기가 거의 일치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라진 동물들이 어떻게 동물원을 통해 대도시에 다시 모이게 됐을까? 《동물원의 탄생》은 “야생” 동물을 자연사적 관점이 아니라, 인간이 동물을 바라보는 시각과 다루는 방법의 역사적 변천을 통해 이야기하는 책이다. 이는 동물 연구에 있어서 인간을 빼놓고 이야기하는 것은 어렵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사람들은 과거의 동물들을 책이나 그림, 바랜 일지나 기억 속에서 상상한다. 그러나 그 동물들의 자취는 단순한 유물이 아니라 그들에게 매료된 사람들, 그들을 연구했던 사람들, 그들에게서 배우고자 했던 사람들, 그들을 잡거나 죽였던 사람들을 통해 현재의 우리에게 전해진 것이다. 저자는 동물의 “비자연적인 역사”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20세기 서구 동물원의 모델이 된 하겐베크

《동물원의 탄생》은 카프카의 단편소설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을 화두로 던진다. 빨간 피터는 독일의 동물 회사 하겐베크에서 나온 사냥꾼에게 포획된 영장류다. 그는 갑갑한 우리에 갇힌 채 배를 타고 유럽으로 운반된다. 피터는 우리에서 탈출하기 위해 인간 흉내를 내고, 인간의 말을 사용해서 사람들의 주목을 끈다.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는 인간의 삶에 끼어들어 인간 행세를 하는 피터의 나레이션으로 전개된다.

저자는 이 단편이 주로 현대사회에서 광대로 행세해야 하는 예술가의 모습을 지적한 우화로 해석되지만, 당시 인간 흉내를 내는 영장류들이 인기를 끌고 있었다는 점에 주목할 것을 제안한다. 피터를 잡아들인 하겐베크 사냥원정대는 독일에서 동물의 포획과 유통을 전문으로 하는 회사들 가운데 가장 큰 회사 하겐베크의 소속이었다. 이 회사에서 만든 하겐베크 동물원은 20세기 서구 동물원의 모델이 됐다. 하겐베크 동물원의 특징은 우리와 쇠창살을 제거하고 야생 지대처럼 꾸민 초원에 동물들을 풀어 놓았다는 것. 그래서 사람들은 하겐베크 동물원에서 동물들이 아프리카나 인도에 살고 있는 듯한 자연스러운 느낌을 받았다. 《동물원의 탄생》은 하겐베크가 동물 사업을 시작해서, 동물원을 만들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차근차근 추적한다.

동물 수집 자체는 역사적으로 오래된 행위다. 서구의 동물원의 역사는 크게 귀족들의 사적 소유물을 전시한 미네저리에서 과학과 공공교육을 강조하는 근대적 동물원으로의 변화로 요약된다. 일반적인 동물원 역사가들은 근대적 동물원이 동물에 대한 공공 교육과 휴식, 동물 보호의 목적을 수행하는 곳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당시 동물원에서 낸 포스터 등의 광고를 살펴보면, “야생” 동물을 포획해서 대중에게 전시하는 것이 다분히 서구 제국주의의 식민지 정복을 과시하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동물원은 급성장한 부르주아 계층의 감수성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하겐베크 회사는 동물의 포획과 유통을 담당하며 성장했다. 서구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력이 증가하면서, 초기에는 원주민 족장과 해안 거래상을 거쳐 야생동물을 잡았던 서구인들은 직접 초원으로 들어가서 포획을 시작했다. 이들의 포획은 잔인했다. 사자를 잡을 경우 사자무리에게 접근해서 새끼를 보호하는 어른 사자들을 다 죽이고 나서 한두 마리의 새끼를 포획하는 것이 일반적인 방법이었다. 사냥꾼들은 죽은 코끼리 위에 자전거를 타고 올라간 사진을 찍는 등 자신들의 영웅적인 모습을 과시했다. 그러나 잔인함에 대한 서구 본국의 비난 때문에 보다 포획은 “문명화된” 사냥 방식으로 바뀌고, 동물의 고통에 대한 감상적인 묘사가 늘어나게 됐다.

동물 포획과 ‘인간 전시’, 그리고 동물원

한편 1870년대 동물사업이 침체되면서 하겐베크 회사는 ‘인간 전시’를 시작한다. 라플란드인, 수단인, 스리랑카인 등 서구에게 ‘이국적인’ 사람들을 데려와서, 이들이 일상을 생활하는 자연스러운 모습을 쇼로 만든 것이다. 하겐베크 회사는 원주민들이 수치심이 없고, 단순하게 요리하며, 청결성이 부족한 점을 강조하며 쇼가 자연스럽고 사실적이라고 주장했다. ‘사람 쇼’는 베를린 인류학자들의 인류학적 연구대상이 되면서, 사람 전시의 근거가 더욱 탄탄해졌다. 당시 다윈의 진화론이 유행하고 있었는데, 이들 원주민들은 인간 진화의 중간 단계로 취급되어, 이들의 머리 크기나 키 등 신체 데이터는 “과학적”이고 “인종차별주의”적인 이론에 적용됐다.

‘인간 전시’는 큰 인기를 끌었다. 저자는 그 인기의 이유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아메리칸 ‘인디언’은 말을 타고 때때로 백인 정착민들의 머리 껍질을 벗길 필요가 있었다. ‘에스키모’는 카약을 저어야만 했고, ‘베두인’족은 낙타를 타야만 했다.” ‘인간 전시’는 비서구에 대한 서구(유럽)의 우월감을 강조하거나 반대로 문명화가 원주민들의 ‘자연스러움’에 비해 모자라는 점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내용이었지만, 결국 이 두 가지는 모두 비서구에 유럽을 투영하는 것이었다. 특히 ‘인간 전시’에는 성적인 관심이 많았는데, ‘미개인’의 나체사진은 합법적으로 나체를 볼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이었기 때문에 주목을 받았다. 대중들은 ‘미개인 미녀’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나타냈으며, 돈을 주고 성매매를 하려는 남성들도 많았다.

하겐베크는 비서구가 문명화를 겪으면서 ‘인간 전시’에 적절한 ‘미개인’이 사라지자, ‘인간 전시’ 대신 동물 공연에 손을 댄다. 동물 포획과 ‘인간 전시’, 그리고 동물 공연과 동물원은 모두 하겐베크 회사의 사업 확장 결과였다. 하겐베크는 이전의 영웅적인 동물 공연과는 달리 동물과 동물, 동물과 조련사 사이의 자연스럽고 애정 어린 이미지를 창출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한편 동물 공연용 동물을 보관할 곳이 마땅치 않자, 그는 땅을 사서 동물원을 만들게 된다. 하겐베크 동물원은 대중들이 동물들을 만나는 곳이자, 동물의 수송과 유통의 거점이기도 했던 것이다.

동물원의 유토피아적 이미지에 대한 회의

하겐베크 동물원은 창살과 우리를 사용하지 않고, 동물들을 파노라마처럼 자연스럽게 넓은 초원에 펼쳐 놓음으로써 ‘노아의 방주’와 같은 이미지를 창출했다. 각 동물들은 먹이사슬에 맞게 적절하게 선택되었으며, 하겐베크는 “자유와 행복”이라는 휴머니즘적인 문구로 동물원을 선전했다. 이는 ‘인간 전시’결과 하겐베크가 “진짜”의 재현이 대중의 인기를 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진짜”는 유럽인들이 믿고 싶은 “진짜”다. 동물원은 위험한 세상에 유럽인들이라는 자상한 존재가 있다는 메시지를 확인할 수 있는 장소였다.

하겐베크 동물원은 엄청난 인기를 끌면서 “하겐베크 혁명”이라고 불렸다. 하겐베크 동물원 이후 많은 동물원들은 전시 실험을 했다. 하겐베크 동물원이 아프리카에서나 볼 수 있는 초원과 북극에서 볼 것이라 기대되는 얼음산과 분수 등의 조형물을 통해 자연스러움을 강조했다면 이후 동물원들은 ‘야수성’을 연상시키는 거친 풀과 땅을 만들거나 기하학적인 공간을 조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출발점은 언제나 자연 환경의 재현을 통한 ‘몰입 전시’였다.

저자는 동물원에 대해 긍정이나 부정의 명쾌한 대답을 내리는 대신, 동물에 대해 ‘저 동물들은 어디서 오는 걸까?’라는 질문을 던질 것을 권유한다.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부정할 수 없으며, 동물원과 해양 동물원이 종 보호 및 대중 교육의 장소로 기능하고 있는 것이 현실인 만큼 동물원에 대해 무조건적인 반대를 외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동물원이 제시하는 휴머니즘적이고 유토피아적인 이미지를 긍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저 동물들이 어디서 오는지, 누가 동물들을 잡는지, 포획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동물들이 죽는지, 동물들을 잡는 데 사용한 방법이 환경에 피해를 주지는 않는지 등에 대한 질문과 심화된 연구만이 동물원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의 정립에 해답을 제시할 수 있다.

여성주의 저널 《일다》 김윤은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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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가족 이야기
조주은 지음, 퍼슨웹 기획 / 이가서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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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가족의 실체
조주은의 《현대 가족 이야기》 서평


가족은 가족 내에서 여성이 처한 불평등한 위치 때문에 페미니즘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주제다. 또한 가족의 형태, 가족이 누리는 삶의 양식 등 가족의 특성은 가족과 사회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에 당대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현대 가족 이야기》는 거대기업과 전투적인 노동운동을 동시에 상징하는, 한국 사회의 중요한 집단인 현대 자동차 노동자 가족을 여성학적 관점에서 분석한 책이다. 저자 조주은씨는 가족 해체가 가속화되고 있는 상황에서도 핵가족 모델과 성별분업 이데올로기가 굳건하게 자리매김하고 있는 요인을 현대 자동차 노동자의 가족 분석을 통해 보여준다. 또한 중산층 가족 이미지에 가려진 (생산직)노동자 가족의 생활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고, 보통 정도의 학력을 가진 한국 여성의 보편적이면서도 개별적인 생애사를 보여주고자 했다.

여성학의 장점은 분석자가 분석 대상을 ‘대상화’하지 않고, 분석 대상의 삶에 가까이 다가감으로써 이론과 현실의 위계적인 분리를 해체하는 데 있다. 《현대 가족 이야기》 역시 여성들의 생애사 인터뷰에 중점을 둠으로써, 여성학적 장점을 잘 활용하고 있다. 이 책은 저자 자신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저자는 노동 운동하는 남편과 결혼한 후 울산으로 이주, 그곳에서 노동자 아내로써 몇 년 동안 생활했다. 그녀는 성별분업과 가족 내 남녀 위계성, ‘아내’이자 ‘어머니’의 정체성만이 허용되는 노동자 부인의 삶을 몸소 체험하고, 가족 유지에 기여하는 요인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됐다고 한다.

남성중심 노동시간표와 아내의 ‘내조’

이 책을 가로지르는, 노동자의 아내와 가족을 설명하는 중요한 개념이 ‘가정중심성’이다. ‘가정중심성’은 근대화, 산업화로 인해 일터와 가정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설명하는 용어다. 근대 이후 노동자들의 삶은 8시간 노동, 8시간 잠, 8시간 휴식이라는 시간표로 변경되는데, 이 시간표는 일터에서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오는 남성노동자들에게 휴식을 제공하는 ‘아내’와 그녀가 가꾸는 ‘가정’을 전제한 것이다. 때문에 여성에게는 ‘사회와 분리된 영원한 안식처로서의 가정’, ‘차이에 입각한 남녀 간의 평등’이라는 차별을 은폐하는 이데올로기가 부과되는데, 이 이데올로기가 ‘가정중심성’이다.

현대 자동차 노동자 아내의 삶은 ‘가정중심성’을 잘 보여준다. 현대 자동차의 노동자들은 다른 생산직 노동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의 임금을 받는다. 때문에 임금 인상 투쟁이 일어나면 언론과 여론은 이들을 ‘노동 귀족’이라고 질타한다. 그러나 현대차의 높은 임금에는 다양한 요인들이 개입되어 있다. 이들의 임금 수준은 일차적으로 민주노조운동과 임금인상투쟁의 결과다. 또한 남성노동자를 ‘생계 부양자’로 판단하는 가부장적 온정주의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임금 구성을 살펴보면 기본급이 낮은 대신 주말, 야간 특근과 평일 잔업의 급여가 높다. 때문에 최근에 도입된 주 5일 근무제 역시 현대차 노동자들의 휴식에는 별 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데, 돈을 더 벌기 위해서는 특근을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특근으로 인한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은 기혼 여성들이 전업주부가 되게 하는 요인이다. 자동차 산업은 컨베이어 조립라인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컨베이어 조립은 단순 반복적이며, 단계별 시간이 표준화되어 있기에 노동자들에게 자유로운 출입과 자율적인 근무 조정이 제한되어 있다. 극심한 통제적 노동환경에 지친 남성노동자들은 부인의 내조를 필요로 하지 않을 수 없다.

남편들에게 가해지는 극심한 노동 강도 및 과로사는 여성들로 하여금 남편을 ‘안쓰럽게' 여기게 하고 내조를 강화한다. 부인의 ‘내조’는 생산직 노동자에게 가장 필요한 건강함을 유지해 주는 ‘밥 차려주기’로 요약된다. 여성에게 밥 차려주기는 부부관계를 구성하는 핵심적인 의례이며 매우 중요한 의무이지만, 남성의 노동을 보충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여성들은 남편이 일하러 나간 동안 자신의 일을 가지고 싶어하지만, 남성노동자에 비해 턱없이 낮은 기혼 여성노동자들의 임금은 남편이 ‘특근’ 한 번 더 하면 보충되는 수준이기에, 그녀들은 일을 포기하게 된다.

한편 남편들은 여성들이 ‘밖에 나돌아 다니지’ 않고 가정에 있기를 바란다. 낮-밤으로 교대 근무하고, 특근까지 뛰는 남편의 낮잠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 아이들을 데리고 공원을 떠도는 수많은 울산 기혼 여성들의 모습은 다른 도시에서 볼 수 없는 울산만의 풍경이다.

좋은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

이들이 거주하는 울산은 남성이 훨씬 더 높은 인구비율을 차지하는 전형적인 남성도시며, 노동자 가족 대부분이 비슷한 학력 수준과 성장 환경, 생활 환경과 평등의식을 가진 동질화된 거주지다. 또한 잦은 파업과 투쟁 때문에 ‘거친 남성성’이 더욱 강조된다. 때문에 가족 내 성별 분업이 굳건해진다. 즉 밥을 잘 차려주지 않거나 자녀를 낳지 않는 어머니들은 주변 공동체에서 비난을 사며, 아내의 설거지를 돕는 남성은 동료 노동자들에게 ‘남자 망신 시킨다’는 빈축을 산다.

아내의 역할에 만족해야 하는 여성에게 남은 것은 ‘좋은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자녀는 남편과 아내 모두에게 만족을 가져다 주는 존재다. 특히 경상도 지방 특유의 혈통주의에 대한 집착과 ‘기름밥’ 물리지 않겠다는 부모의 의지는 자녀에 대한 관심을 강화한다. 사회는 ‘생물학적 어머니에 의한 직접 양육’을 강조한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그녀들은 기혼 여성 네트워크를 형성해서 육아 정보를 교류하고, 더 나아가 회사에 대한 정보도 얻는다.

어머니가 되는 것은 지역 공동체로 들어설 수 있는 ‘자격’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나 ‘좋은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는 그녀들을 더욱 더 피곤하게 한다. 회사 측은 직원 부인 특별 교육과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서 현모양처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데, 여기에 대해 노조도 특별히 반발하지 않는다.

가치를 인정 받지 못하는 여성들

이 책이 드러낸 가족의 모습은 ‘외부 사회의 방패’로 기능하는 안전한 가족의 모습이 아니다. 사실 비혼 여성과 남성들에게 결혼은 상이한 이유로 필수적이다. 여성들의 경우 대부분 가난하고 보수적인 농촌지역의 통제가 심한 가족 출신이다. 그녀들은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직장을 갖고, 직장에서 성차별적인 사회구조와 저임금, 단순반복적인 노동을 경험한 후 직업적인 노동에서 벗어나기 위해 결혼을 선택하게 된다.

한편 현대 자동차 남성노동자들의 경우 기업의 착취가 전업주부의 역할을 전제하고 있으며, 노동자들 사이에서 기혼자 중심의 커플 문화가 강고하기 때문에 결혼을 서두른다. 그러나 그들의 결혼은 ‘스위트 홈’을 이루지 못한다. 위계적인 성별 분업의 억압, 남성노동자들에게 빈번한 근골격계 질환, 예고 없는 구조조정의 위험 등은 노동자 가족들을 불안감과 위기의식으로 몰아넣는다.

또한 ‘가정중심성’은 정규직 노동자 남성이 부양하는 핵가족 모델에 포함되지 못하는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여성들의 문제를 가린다. 현대 자동차 식당의 여성 노동자들의 복직 투쟁을 다룬 영상보고서 《밥.꽃.양》이 제기하는 문제는 이 책의 문제의식과 상당 부분 맞닿아 있다. 즉 가족과 남성노동자상에 대한 강조는 가정이든 직장이든 여성들의 노동을 ‘하찮은’ 것으로 여기게 하며, 결국 밥을 짓는 여성들은 그 가치를 인정 받지 못하게 된다.

저자가 포괄적인 대안으로 제시하는 노동 시간의 재구조화, ‘보살핌’ 인식에 대한 변화의 필요성, 노조의 임금 투쟁 방식의 변화 등은 기업의 노동자 착취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노동의 남성중심성에 대한 재고를 가리키는 게 아닐까.

여성주의 저널 《일다》 김윤은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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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해 그리고 다시 살아나
수잔 브라이슨 지음, 고픈 옮김 / 인향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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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에 대한 페미니즘 정치학
《이야기해 그리고 다시 살아나》 서평


성폭력 피해라는 트라우마(외상, 영구적인 정신장애를 남기는 충격)에서 살아남아 ‘생존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가? 《이야기해 그리고 다시 살아나》는 철학을 전공한 여교수 수잔 브라이슨이 자신의 성폭력 경험과 치유 과정을 기반으로 자아와 외상, 기억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낸 책이다.

저자는 트라우마에 대해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 “트라우마는 예를 들어 ‘2,4,6, √-2…’ 또는 ‘2,4,6,!…’과 같은 수열에서 ‘√-2’나 ‘!’ 때문에 도저히 그 수열의 규칙을 알 수 없는 것처럼, 우리 삶의 연속 속에 ‘√-2’나 ‘!’와 같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을 불러들이면서 우리가 가졌던 삶에 대한 계획들을 산산조각 낸다.”

저자는 조깅을 하다가 갑자기 강간을 당해 거의 죽을 뻔했던 자신의 경험으로 책의 첫 장을 시작한다. 강간 경험 이후 유령처럼 비현실적으로 다가오던 생활, 우울증 치료약과 성폭력 피해자 지원 모임 참여 등 치유를 위한 개인적인 노력에서 여성폭력 방지법 제정에 대한 촉구, 대학 당국에 여성의 자기 방어와 강간예방 강좌의 개설 요구 등 대사회적인 행위까지 그녀는 자신의 과거를 기술하면서, 이를 바탕으로 트라우마 치유에 필요한 자아관과 세계관을 녹여낸다.

기존 철학은 아무 도움 안돼

철학을 전공한 저자는 기존 철학(주로 영미분석철학 전통)이 트라우마를 잘 설명하지 못하며, 하나의 철학적 주체로 포함하고 있지 않다고 차분하게 비판한다. 물론 이 책 자체가 난해한 이론 서적이 아닌 까닭에, 전통적인 철학의 고전들을 세세히 분석하지는 않는다. 대신 저자는 데카르트를 위시한 근대 철학에서 자아를 설명하는 핵심적인 명제들을 토대로, 그 명제들이 트라우마의 특수성을 포괄하지 못하는 한계를 간결하게 정리한다.

근대 철학은 각 개인이 논리적인 추론 과정을 거쳐 보편적인 결론을 내리는 정신 구조를 공통으로 가지고 있다고 가정한다. 또한 개인의 자아가 과거에서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일관된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이에 대해 그녀는 철학자들이 자신의 관심을 “현실 세상과 비교해서 더 간결하고 더욱 통제하기 쉽고 더욱 이해하기 쉬운 순수 사유의 영역에 두어야 한다고 훈련 받아 왔다”고 지적한다.

예컨대 성폭력을 당한 후 “아마 내가 실제로 여기 있는 건 아닐 거야. 그래, 나는 그 골짜기에서 죽었잖아”라고 중얼거렸던, 삶과 죽음의 경계를 혼란스럽게 인식했던 저자의 경험에 대해, 기존 철학의 자아관은 아무런 설명을 제공하지 못한다.

기억을 견디면서 살아낼 힘을 얻는 것

근대 철학의 한계를 지적한 후, 트라우마와 자아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심리학적 설명을 끌어들인다. 그녀는 자아를 몸으로서의 자아, 이야기로 구성된 자아, 자율적 자아라는 세 가지 측면에서 바라본다. 몸으로서의 자아라는 관점에서, 몸과 자아는 데카르트적 이원론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밀접한 연결성을 지니고 있다. 때문에 트라우마의 기억은 피해자의 몸에 들러붙어 있어서, 사소한 단서만 주어져도 몸을 통해 다시 감각된다.

그녀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마들렌느의 맛을 통해 프루스트가 회상하는 기억과 트라우마의 기억을 비교한다. 둘 다 환기된 몸의 감각을 통해 과거를 회상하는 것은 같지만, 프루스트의 기억이 과거의 여러 기억들이 모여서 떠오른 지연된, 긍정적인 성질의 것이라면 트라우마의 기억은 개인이 통제 불가능하며 생생하고도 불쾌한 감각을 수반한다.

이야기로 구성된 자아의 측면에서 보자면, 인간은 모두 자신의 경험을 설명하는 서사를 가지고 있다. 때문에 트라우마로 산산조각 난 세계를 다시 맞추기 위해서는, 개인이 주체가 되어 자신의 이야기를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성폭력 피해자들이 자신의 경험을 반복해서 말하고, 자신의 두려움과 고통, 분노와 대면하는 과정이 중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자율적 자아의 측면에서 볼 때, 트라우마로 인한 자율성 훼손의 경험은 엄청나다. 저자는 “자율성이란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의존해 있는 것”이라고 지적하며, 자신이 사회와 독립된 자율적이고 일관된 존재라는 신화를 깨는 것이 치유에 중요하다고 설명한다.

저자가 말하는 치유란 트라우마를 잊는 것이 아니다. “트라우마에서 회복된다는 것은 일관된 자아란 처음부터 어디에도 있지 않았다는 사실과 직면하는 일이다. 나는 내 자신을 다시 예전의 나와 합치려 하는 일은 할 것 같지는 않다. 대신 새롭게 생겨나는 나에게 나 자신을 일치시켜야 할 것이다.” 트라우마는 결코 사라지지 않지만, 개인은 그 기억을 견디면서 새로운 자아로 살아갈 수 있다. 치유는 짐을 진 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획득하는 것이다.

성폭력의 기억은 선명한 기록 사진과 같아

트라우마의 기억의 특징은, 몸으로 환기되는 감각의 특성상 생생하고 믿을 만하게 여겨진다는 것이다. 저자는 트라우마가 일반적인 기억이 저장되는 절차를 밟지 않기 때문에, 하나의 선명한 기록 사진처럼 강렬하게 남는다고 설명한다. 트라우마의 기억은 인식론적인 차원에서 사실을 그대로 담고 있다는 특권을 가지며, 이에 대한 증언은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보존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트라우마 생존자에게 있어 병적 기억을 그대로 간직한다는 것은 개인의 고통이 계속된다는 문제를 의미한다.

저자는 하나의 딜레마를 지적 한다. 미술평론가의 평론이 회화를 대변할 수 없듯, 트라우마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생존자의 이야기는 분명 과거를 선명하게 드러내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술 평론이 필요하듯, 증언이 아닌 생존자가 만들어내는 이야기는 계속되어야 하는데, 이야기를 함으로써 개인은 자신을 주체로 세우고 기억을 통제하는 연습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페미니즘 정치학은 여성 개인의 경험에서 출발하며, 때문에 피해자들의 증언, 생존자의 이야기 모두 중요시 한다. 그러나 경험이 언제나 올바른 효과를 유도하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개인의 경험이 이론화될 때 생겨나는 위험에 대해서도 충분히 알고 있다. 즉 성폭력 경험을 통해 모든 여성을 대변하려는 시도는 위험할 수 있으며, 때문에 과도한 일반화를 피해야 한다. 또한 트라우마의 생생함과 강렬함 때문에 피해자의 증언은 100% 신뢰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실제로 그 기억 역시 문화적인 상징체계들에 의해 변형되어 재구성되기도 하므로 지나치게 의지할 수는 없다.

그리고 트라우마의 기억만을 신뢰할 경우, 그것은 트라우마가 가져오는 고통과 섞여 문제에 대한 감상적인 접근으로 빠질 수 있다(그녀는 이런 경우 가해자들의 인권 침해론을 비롯한 역-피해 주장을 반박하기 어려워진다고 지적한다). 그녀는 여성들 스스로 피해자들의 주장을 평가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자신의 경험을 충분히 풀어내면서도 절제된 해석을 덧붙이는 저자의 균형적인 시선은 성폭력의 경험을 해석하고, 페미니즘 정치학을 재구성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여성주의 저널 《일다》 김윤은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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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쉬어
안 소피 브라슴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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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숨쉬기 위해 그녀를 죽이다
안 소피 브라슴의 《숨쉬어》 서평


사춘기는 언제나 어렵고 힘든 시간으로 기억된다. 가족, 학교, 취직으로 표상되는 사회는 소녀들에게 억압적이고 혐오스럽게 다가온다. 그래서 사회로의 진입은 고단하다. 영화 《판타스틱 소녀백서》의 이니드는 유령과도 같은 답답한 사회로 진입하는 것이 싫어서, 결국 그곳을 떠나는 버스를 타버린다. 하지만 미리 정해진 규범이 아닌, 자신만의 무엇을 추구하는 것 역시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성장은 그 어떤 것이건 미숙한 자신을 드러내고 부딪치면서 새로운 것을 받아들여야 하기에 힘들다. 버스를 타고 떠나는 이니드의 뒷모습이 막막하게 느껴지는 것처럼.

열여섯 살의 소녀 작가 안 소피 브라슴의 《숨쉬어》는 살인을 저지른 어느 소녀의 고백담 형식을 취한 소설이다. 화자는 감옥에서 글을 쓰는 열여덟 살의 소녀 샤를렌 보에. 그녀가 죽인 사람은 그녀에게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사라다. 왜 어린 소녀가 살인을 했을까? 이런 궁금증은 독자들을 쉽게 책 속으로 이끈다. 화자는 작가 자신과 잘 구분되지 않는데, 이는 소설이 자신의 열정적인 감정을 마구 쏟아낸 일기장과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자신의 치료를 위해서 썼다는 샤를렌의 고백처럼 소설은 매끈하게 다듬어지지 않은, 거칠고 성긴 텍스트라는 느낌을 준다. 하지만 화자의 생생한 자기 고백은 몰입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화자는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혈기와 열정으로 가득 찬 다루기 어려운 소녀”였다고 고백한다. 사이가 좋지 못한 부모님 때문에 일그러진 가정, 사랑했던 친구 바네사와의 이별, 공부에 대한 중압감 등 마음 편히 발 붙일 곳 없는 상황들 속에서 그녀는 늘 혼란스러워하며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이해하지 못한다. 특히 그녀는 ‘여성적’이지 못한 자신에 대해 자신감을 갖지 못한다. 부드러운 몸매와 예쁜 얼굴을 갖지 못했다는 열등감에 강박적으로 사로잡힌 샤를렌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나 그 노력들은 모두 허사로 돌아간다.

그런 그녀에게 매력적인 여자아이 사라가 나타난다. 사라는 샤를렌에게 친구하자며 다가온다. 그녀는 “다른 누구와도 닮지 않은 아이”다. 모든 사람들은 그녀에게 매혹되며, 샤를렌 역시 사라에게 빠져든다. 샤를렌은 사라의 욕망을 관찰하며, 사라의 마음에 들기 위해 애쓴다. 그녀는 혐오스러운 이 세상과 자신을 다르게 만드는 것이 사라라고 생각하고 그녀에게 매달린다. 그녀에게 사라는 자신이 진정으로 추구해야 했던, 그 무엇이다. 샤를렌은 “사라가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회상한다.

그러나 사라는 샤를렌의 미숙함과 의존성을 파악하고 그녀를 철저히 이용한다. 사라는 친구들 앞에서 샤를렌을 무시하고 놀리며 기쁨을 얻다가도, 샤를렌이 자신과의 관계에서 벗어나려고 하면 사과하면서 그녀를 다시 붙든다. 샤를렌은 사라가 미워서 그녀에게 상처 주고 싶은 마음과, 사라를 숭배하고 좋아하는 마음 가운데 갈등한다. 결국 샤를렌은 자신을 철저하게 무시하는 사라를 향해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끼고 강박적으로 사라에게 집착하는 자신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이방인》의 뫼르소처럼 사라를 죽인다. 사라를 죽이자 비로소 그녀는 해방감을 느낀다.

독자의 시선에서 사라는 실제로 존재할 법한 리얼한 캐릭터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자의식이 강한 샤를렌의 눈을 통해 투영되는 사라는, 조숙하고 매력적이면서도 사악하고 교활한 소녀다. 사라는 샤를렌를 파악하고 분석하며 다그치고 괴롭히는 어른과도 같은 존재며, 한편으로는 샤를렌의 질투의 대상이기도 하다. 샤를렌은 연애도 잘하고, 어른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며, 친구들을 조종할 줄 아는, 무엇이든지 잘하는 사라를 절대 따라갈 수 없다. 이 같은 완벽함은 사라가 예민한 샤를렌의 상상 속에서 만들어진 인물이라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사라와 같은 존재에 대해 애증에 사로잡힌 샤를렌의 내면은 친숙하게 다가온다. 즉 샤를렌을 살인죄로 몰고 간 강렬하고 불안정한 심리상태가 익숙한 것이다. 진부한 세상에 대한 혐오,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들로 인한 혼란스러움, 자신이 숭배하는 대상에 대한 강한 믿음과 사로잡힘은 사회로의 진입을 앞둔 사춘기 소녀들의 혼란스러운 모습 그대로다.

《숨쉬어》는 자신의 경험을 충분히 숙고해서 썼다기보다는, 떠오르는 단상을 단숨에 써낸 습작 같다. 이는 열여섯 살이라는 나이-경험을 반추할 만한 시간이 없다-의 한계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미숙하고, 지나치게 감정이 흐르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창조해 낸 세계는 자신만의 감수성에 천착하는 사춘기 소녀 특유의 느낌을 잘 전달한다. 《숨쉬어》가 프랑스에서 출판된 지 사흘 만에 5천부가 팔려나갔다는 것은 이 소설에 자신들의 내면이 있는 그대로 반영됐다고 생각하는 독자들의 열광적인 반응을 입증해 주는 것이 아닐까.

여성주의 저널 《일다》 김윤은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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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아 플라스의 일기
실비아 플라스 지음, 김선형 옮김 / 문예출판사 / 2004년 3월
평점 :
품절


‘천재 여성시인’이란 신화를 넘어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 서평


실비아 플라스. 당대 유명한 남성시인 테드 휴즈와의 결혼으로 유명해진 미모의 여성시인. 그는 테드 휴즈의 외도로 아이들을 데리고 집을 나서, 혹한과 우울증 때문에 가스 오븐에 머리를 처박아 서른 살의 나이로 삶을 마감했다.

요절한 천재 여성시인이라는 신화를 남긴 실비아 플라스의 삶은 대중 매체를 통해 두 가지 방식으로 회자되어 왔다. 테드 휴즈와의 비극적인 로맨스가 그 하나이고, 남성에 희생당한 순교자적인 여성예술가의 이미지가 두번째다. 마치 여성화가 프리다 칼로의 고통스런 삶이 디에고 리베라의 기구한 로맨스와 페미니즘적 색채 때문에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영화로 제작된 것처럼.

한 여성예술가의 고통스런 내면일기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는 대중들의 흥미를 끄는 그의 이미지에 정면으로 맞서는 책이다. 일기는 18세부터 죽기 2년 전까지 자신의 이야기와 생각들을 구체적으로 기록한 것으로, 마치 소설을 보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는 일기는 요절한 천재 여성시인이라는 신화를 넘어서, 자신만의 세계를 확립하여 글쓰기로 세상에 인정 받기를 원했던 한 여성의 고통스러운 내면을 생생하게 드러낸다.

실비아 플라스의 소녀 시절은 평범한 소녀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이성을 끌어당기는 매력이란 도대체 뭘까?”라고 고민하며, 연애를 통해 자신감을 찾고 싶어했고 또래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고 싶어했다. “제대로 옷도 못 입는 주제에 이 나라를 선도하는 패션 잡지를 어떻게 비판한단 말인가?”라는 웃지 못할 문장을 쓰던 이 감상적이고 정열적인 소녀의 모습은 대학 진학 후로도 이어진다. 그는 수재로 이름을 날렸고, 《세븐틴》과 같은 유명한 소녀 잡지에 글을 게재하며, 주목을 받았다. 그렇게 화려하게 살아갔다면, 실비아는 아마도 유명한 저널리스트나 대중작가가 됐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타인과 자신이 늘 다르다고 느꼈다. 그 차이는, 그 자신이 스스로 인정할 만큼 가치를 지닌 글을 써서 세상에 인정 받고 싶다는 욕망이었다. 자신만의 글을 쓰고 싶다는 그의 욕망은, 명예욕과 성욕, 허영기 등 범속한 모든 욕망을 무화시킬만큼 강렬했다. 창작에 대해 고민하면서, 그는 여성이 남성에 비해 불리한 사회적 현실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한다. 실비아는 “결혼이 내 창조력의 즙을 짜내 시들게 만들고, 글과 그림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내 욕망을 말살해 버릴 것인가”라고 걱정하고, “어째서 여자들이 기껏 남의 정서를 맡아 관리해주는 관리인이나 아기 보는 사람, 남자의 영혼과 육체, 자존심을 먹여 살리는 유모 노릇을 해야 한단 말인가?”라고 반문한다.

그의 일기 전반에 드러난 여성 문제에 대한 관심을 고려할 때, 실비아에게는 남성에 의해 희생당한 수동적인 이미지보다는 자신의 문제에서 출발해서 당대 여성 문제에 대해 날카롭게 직시한 페미니스트의 이미지가 더 어울린다. ‘노처녀’로 늙으면 어떡하나 걱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사회적으로 인정 받는 존재이기를 원하는 젊은 실비아의 모습은 1950년대 미국 여대생들이 가졌을 법한 고민을 잘 드러낸다.

나약함에 대한 날카로운 질책

테드 휴즈와의 결혼, 대학 강사라는 직업과 본격적인 글쓰기로 뛰어들면서 그는 변한다. 그는 소녀 잡지에 글을 게재하던 반짝이는 대학생 필자였던 과거와, 돈과 집 문제를 걱정하며 당대 시인들에게 늘 라이벌 의식을 느끼는 불안한 젊은 시인이자 주부로서의 현재가 가지는 괴리를 직시한다. 특히 원고가 번번이 거절 당하는 자신과는 달리, 시인으로서 사회적인 명망을 얻기 시작한 남편 테드 휴즈에 대한 열등감 때문에 그는 번민에 시달린다. 그는 “테드의 시가 수락되었다는 사실로 인해 이렇게 열렬한 대리 만족을 느끼다니 이상한 일이다”라고 고백한다.

글을 잘 쓰지 못하고 있다는 의식은 언제나 그를 괴롭혔다. 일기 전반에 걸쳐 등장하는 그의 고뇌는 예술가의 작업에 대한 낭만적인 신화를 철저하게 무너뜨린다. “우리 작품이 정말 훌륭한 게 아니라면 어떻게 하지?” 라고 걱정하며, 언제 원고가 수락되었다는 편지가 출판사에서 올 것인가 전전긍긍하며 우체통을 뒤지는 그. 실비아는 집안일과 남편의 작업을 타이핑하느라 사라진 시간에 초조해하고, 글을 쓰는 데 재능이 없을 경우 돈을 벌기 위해 강의를 계속 해야 하거나 학위를 따야 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한다.

한편 젊었을 때부터 신경 쇠약에 시달리던 그는 상담을 통해 자신의 불안과 질투심, 초조함이 어디에 기인하는지를 탐구하고 관찰한다. 버림받았다는 의식, 타인이 자신을 온전하게 받아주지 않는다는 의식은 늘 그를 괴롭혔다. 실비아는 일기장에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타인에 대한 불만족을 토로하지만, 뒤이어 그런 자신의 나약함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과 질책을 시도한다. 이 점이 모순투성이의, 불안하고 약한 자아를 지닌 그를 천재적인 시인으로 만든 힘이 아닐까. 다른 작가들의 책을 읽어서 충실히 공부하자는 자기 단련, 자신의 내면에 대한 끝없는 탐구는 그만이 가진 힘이었다. 죽기 2년 전 작업을 위해 그가 남긴 글들에서는 18세 소녀의 감상과는 완연히 다른, 세상과 타인에 대한 섬세한 묘사가 빛난다.

일기이기에 이 책은 거칠고, 같은 말들이 자주 반복되는, 정제되지 않은 텍스트다. 그러나 그 정제되지 않음은 글을 잘 쓰기 위해 노력하는, 처절하고 나약하기까지 한 내면의 모습을 남김없이 드러낸다는 점에서 장점을 지닌다. 여성이 여성 자신의 세계를 만든다는 것은, 사회적인 역할과 위반된 것이기에 불안하고, 고된 과정이며, 끊임없이 남의 것을 엿봐야 하는, 결코 아름답지 않은 모습이다. 테드 휴즈에게서 시와 소설을 쓰는 방식을 배우고 그에게 정서적으로 의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에게서 벗어나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고자 고집스럽게 노력했던 실비아 플라스의 모습은 많은 여성예술가들의 초상과 공명한다.

여성주의 저널 《일다》 김윤은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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