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가족 이야기
조주은 지음, 퍼슨웹 기획 / 이가서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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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노동자 가족의 실체
조주은의 《현대 가족 이야기》 서평


가족은 가족 내에서 여성이 처한 불평등한 위치 때문에 페미니즘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주제다. 또한 가족의 형태, 가족이 누리는 삶의 양식 등 가족의 특성은 가족과 사회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에 당대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현대 가족 이야기》는 거대기업과 전투적인 노동운동을 동시에 상징하는, 한국 사회의 중요한 집단인 현대 자동차 노동자 가족을 여성학적 관점에서 분석한 책이다. 저자 조주은씨는 가족 해체가 가속화되고 있는 상황에서도 핵가족 모델과 성별분업 이데올로기가 굳건하게 자리매김하고 있는 요인을 현대 자동차 노동자의 가족 분석을 통해 보여준다. 또한 중산층 가족 이미지에 가려진 (생산직)노동자 가족의 생활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고, 보통 정도의 학력을 가진 한국 여성의 보편적이면서도 개별적인 생애사를 보여주고자 했다.

여성학의 장점은 분석자가 분석 대상을 ‘대상화’하지 않고, 분석 대상의 삶에 가까이 다가감으로써 이론과 현실의 위계적인 분리를 해체하는 데 있다. 《현대 가족 이야기》 역시 여성들의 생애사 인터뷰에 중점을 둠으로써, 여성학적 장점을 잘 활용하고 있다. 이 책은 저자 자신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저자는 노동 운동하는 남편과 결혼한 후 울산으로 이주, 그곳에서 노동자 아내로써 몇 년 동안 생활했다. 그녀는 성별분업과 가족 내 남녀 위계성, ‘아내’이자 ‘어머니’의 정체성만이 허용되는 노동자 부인의 삶을 몸소 체험하고, 가족 유지에 기여하는 요인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됐다고 한다.

남성중심 노동시간표와 아내의 ‘내조’

이 책을 가로지르는, 노동자의 아내와 가족을 설명하는 중요한 개념이 ‘가정중심성’이다. ‘가정중심성’은 근대화, 산업화로 인해 일터와 가정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설명하는 용어다. 근대 이후 노동자들의 삶은 8시간 노동, 8시간 잠, 8시간 휴식이라는 시간표로 변경되는데, 이 시간표는 일터에서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오는 남성노동자들에게 휴식을 제공하는 ‘아내’와 그녀가 가꾸는 ‘가정’을 전제한 것이다. 때문에 여성에게는 ‘사회와 분리된 영원한 안식처로서의 가정’, ‘차이에 입각한 남녀 간의 평등’이라는 차별을 은폐하는 이데올로기가 부과되는데, 이 이데올로기가 ‘가정중심성’이다.

현대 자동차 노동자 아내의 삶은 ‘가정중심성’을 잘 보여준다. 현대 자동차의 노동자들은 다른 생산직 노동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의 임금을 받는다. 때문에 임금 인상 투쟁이 일어나면 언론과 여론은 이들을 ‘노동 귀족’이라고 질타한다. 그러나 현대차의 높은 임금에는 다양한 요인들이 개입되어 있다. 이들의 임금 수준은 일차적으로 민주노조운동과 임금인상투쟁의 결과다. 또한 남성노동자를 ‘생계 부양자’로 판단하는 가부장적 온정주의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임금 구성을 살펴보면 기본급이 낮은 대신 주말, 야간 특근과 평일 잔업의 급여가 높다. 때문에 최근에 도입된 주 5일 근무제 역시 현대차 노동자들의 휴식에는 별 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데, 돈을 더 벌기 위해서는 특근을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특근으로 인한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은 기혼 여성들이 전업주부가 되게 하는 요인이다. 자동차 산업은 컨베이어 조립라인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컨베이어 조립은 단순 반복적이며, 단계별 시간이 표준화되어 있기에 노동자들에게 자유로운 출입과 자율적인 근무 조정이 제한되어 있다. 극심한 통제적 노동환경에 지친 남성노동자들은 부인의 내조를 필요로 하지 않을 수 없다.

남편들에게 가해지는 극심한 노동 강도 및 과로사는 여성들로 하여금 남편을 ‘안쓰럽게' 여기게 하고 내조를 강화한다. 부인의 ‘내조’는 생산직 노동자에게 가장 필요한 건강함을 유지해 주는 ‘밥 차려주기’로 요약된다. 여성에게 밥 차려주기는 부부관계를 구성하는 핵심적인 의례이며 매우 중요한 의무이지만, 남성의 노동을 보충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여성들은 남편이 일하러 나간 동안 자신의 일을 가지고 싶어하지만, 남성노동자에 비해 턱없이 낮은 기혼 여성노동자들의 임금은 남편이 ‘특근’ 한 번 더 하면 보충되는 수준이기에, 그녀들은 일을 포기하게 된다.

한편 남편들은 여성들이 ‘밖에 나돌아 다니지’ 않고 가정에 있기를 바란다. 낮-밤으로 교대 근무하고, 특근까지 뛰는 남편의 낮잠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 아이들을 데리고 공원을 떠도는 수많은 울산 기혼 여성들의 모습은 다른 도시에서 볼 수 없는 울산만의 풍경이다.

좋은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

이들이 거주하는 울산은 남성이 훨씬 더 높은 인구비율을 차지하는 전형적인 남성도시며, 노동자 가족 대부분이 비슷한 학력 수준과 성장 환경, 생활 환경과 평등의식을 가진 동질화된 거주지다. 또한 잦은 파업과 투쟁 때문에 ‘거친 남성성’이 더욱 강조된다. 때문에 가족 내 성별 분업이 굳건해진다. 즉 밥을 잘 차려주지 않거나 자녀를 낳지 않는 어머니들은 주변 공동체에서 비난을 사며, 아내의 설거지를 돕는 남성은 동료 노동자들에게 ‘남자 망신 시킨다’는 빈축을 산다.

아내의 역할에 만족해야 하는 여성에게 남은 것은 ‘좋은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자녀는 남편과 아내 모두에게 만족을 가져다 주는 존재다. 특히 경상도 지방 특유의 혈통주의에 대한 집착과 ‘기름밥’ 물리지 않겠다는 부모의 의지는 자녀에 대한 관심을 강화한다. 사회는 ‘생물학적 어머니에 의한 직접 양육’을 강조한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그녀들은 기혼 여성 네트워크를 형성해서 육아 정보를 교류하고, 더 나아가 회사에 대한 정보도 얻는다.

어머니가 되는 것은 지역 공동체로 들어설 수 있는 ‘자격’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나 ‘좋은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는 그녀들을 더욱 더 피곤하게 한다. 회사 측은 직원 부인 특별 교육과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서 현모양처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데, 여기에 대해 노조도 특별히 반발하지 않는다.

가치를 인정 받지 못하는 여성들

이 책이 드러낸 가족의 모습은 ‘외부 사회의 방패’로 기능하는 안전한 가족의 모습이 아니다. 사실 비혼 여성과 남성들에게 결혼은 상이한 이유로 필수적이다. 여성들의 경우 대부분 가난하고 보수적인 농촌지역의 통제가 심한 가족 출신이다. 그녀들은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직장을 갖고, 직장에서 성차별적인 사회구조와 저임금, 단순반복적인 노동을 경험한 후 직업적인 노동에서 벗어나기 위해 결혼을 선택하게 된다.

한편 현대 자동차 남성노동자들의 경우 기업의 착취가 전업주부의 역할을 전제하고 있으며, 노동자들 사이에서 기혼자 중심의 커플 문화가 강고하기 때문에 결혼을 서두른다. 그러나 그들의 결혼은 ‘스위트 홈’을 이루지 못한다. 위계적인 성별 분업의 억압, 남성노동자들에게 빈번한 근골격계 질환, 예고 없는 구조조정의 위험 등은 노동자 가족들을 불안감과 위기의식으로 몰아넣는다.

또한 ‘가정중심성’은 정규직 노동자 남성이 부양하는 핵가족 모델에 포함되지 못하는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여성들의 문제를 가린다. 현대 자동차 식당의 여성 노동자들의 복직 투쟁을 다룬 영상보고서 《밥.꽃.양》이 제기하는 문제는 이 책의 문제의식과 상당 부분 맞닿아 있다. 즉 가족과 남성노동자상에 대한 강조는 가정이든 직장이든 여성들의 노동을 ‘하찮은’ 것으로 여기게 하며, 결국 밥을 짓는 여성들은 그 가치를 인정 받지 못하게 된다.

저자가 포괄적인 대안으로 제시하는 노동 시간의 재구조화, ‘보살핌’ 인식에 대한 변화의 필요성, 노조의 임금 투쟁 방식의 변화 등은 기업의 노동자 착취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노동의 남성중심성에 대한 재고를 가리키는 게 아닐까.

여성주의 저널 《일다》 김윤은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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