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동물들은 어디서 오는 걸까?" 니겔 로스펠스의 《동물원의 탄생》 서평
어린 아이들이 자주 가는 교육장소 중 하나가 동물원이다. 동물원은 아이들이 동물을 보고 먹이를 주면서 즐겁게 놀 수 있는 위락시설이며, 좀처럼 보기 힘든 동물들을 눈앞에서 볼 수 있는 공공교육의 장이기도 하다.
그런데 동물원에서만 다양한 동물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도시에서 동물과의 접촉은 사람에게 위협적이지 않은 애완동물을 제외하면 드물다는 뜻이다. 동물과 접촉할 수 없다는 것은 근대화된 공간의 특징이다. 비록 현대사회의 동물원이 대도시에 넓은 공간을 점유한 대중의 대표적인 휴식공간으로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지만, 그 이전의 동물원은 현대와는 다른 형태였을 것이다. 존 버거는 19세기 산업화 과정을 “동물 주변화 과정”이라고 명명했다. 즉 공공 동물원이 생겨나기 시작한 시점과 사람들의 일상에서 동물들이 사라진 시기가 거의 일치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라진 동물들이 어떻게 동물원을 통해 대도시에 다시 모이게 됐을까? 《동물원의 탄생》은 “야생” 동물을 자연사적 관점이 아니라, 인간이 동물을 바라보는 시각과 다루는 방법의 역사적 변천을 통해 이야기하는 책이다. 이는 동물 연구에 있어서 인간을 빼놓고 이야기하는 것은 어렵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사람들은 과거의 동물들을 책이나 그림, 바랜 일지나 기억 속에서 상상한다. 그러나 그 동물들의 자취는 단순한 유물이 아니라 그들에게 매료된 사람들, 그들을 연구했던 사람들, 그들에게서 배우고자 했던 사람들, 그들을 잡거나 죽였던 사람들을 통해 현재의 우리에게 전해진 것이다. 저자는 동물의 “비자연적인 역사”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20세기 서구 동물원의 모델이 된 하겐베크
《동물원의 탄생》은 카프카의 단편소설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을 화두로 던진다. 빨간 피터는 독일의 동물 회사 하겐베크에서 나온 사냥꾼에게 포획된 영장류다. 그는 갑갑한 우리에 갇힌 채 배를 타고 유럽으로 운반된다. 피터는 우리에서 탈출하기 위해 인간 흉내를 내고, 인간의 말을 사용해서 사람들의 주목을 끈다.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는 인간의 삶에 끼어들어 인간 행세를 하는 피터의 나레이션으로 전개된다.
저자는 이 단편이 주로 현대사회에서 광대로 행세해야 하는 예술가의 모습을 지적한 우화로 해석되지만, 당시 인간 흉내를 내는 영장류들이 인기를 끌고 있었다는 점에 주목할 것을 제안한다. 피터를 잡아들인 하겐베크 사냥원정대는 독일에서 동물의 포획과 유통을 전문으로 하는 회사들 가운데 가장 큰 회사 하겐베크의 소속이었다. 이 회사에서 만든 하겐베크 동물원은 20세기 서구 동물원의 모델이 됐다. 하겐베크 동물원의 특징은 우리와 쇠창살을 제거하고 야생 지대처럼 꾸민 초원에 동물들을 풀어 놓았다는 것. 그래서 사람들은 하겐베크 동물원에서 동물들이 아프리카나 인도에 살고 있는 듯한 자연스러운 느낌을 받았다. 《동물원의 탄생》은 하겐베크가 동물 사업을 시작해서, 동물원을 만들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차근차근 추적한다.
동물 수집 자체는 역사적으로 오래된 행위다. 서구의 동물원의 역사는 크게 귀족들의 사적 소유물을 전시한 미네저리에서 과학과 공공교육을 강조하는 근대적 동물원으로의 변화로 요약된다. 일반적인 동물원 역사가들은 근대적 동물원이 동물에 대한 공공 교육과 휴식, 동물 보호의 목적을 수행하는 곳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당시 동물원에서 낸 포스터 등의 광고를 살펴보면, “야생” 동물을 포획해서 대중에게 전시하는 것이 다분히 서구 제국주의의 식민지 정복을 과시하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동물원은 급성장한 부르주아 계층의 감수성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하겐베크 회사는 동물의 포획과 유통을 담당하며 성장했다. 서구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력이 증가하면서, 초기에는 원주민 족장과 해안 거래상을 거쳐 야생동물을 잡았던 서구인들은 직접 초원으로 들어가서 포획을 시작했다. 이들의 포획은 잔인했다. 사자를 잡을 경우 사자무리에게 접근해서 새끼를 보호하는 어른 사자들을 다 죽이고 나서 한두 마리의 새끼를 포획하는 것이 일반적인 방법이었다. 사냥꾼들은 죽은 코끼리 위에 자전거를 타고 올라간 사진을 찍는 등 자신들의 영웅적인 모습을 과시했다. 그러나 잔인함에 대한 서구 본국의 비난 때문에 보다 포획은 “문명화된” 사냥 방식으로 바뀌고, 동물의 고통에 대한 감상적인 묘사가 늘어나게 됐다.
동물 포획과 ‘인간 전시’, 그리고 동물원
한편 1870년대 동물사업이 침체되면서 하겐베크 회사는 ‘인간 전시’를 시작한다. 라플란드인, 수단인, 스리랑카인 등 서구에게 ‘이국적인’ 사람들을 데려와서, 이들이 일상을 생활하는 자연스러운 모습을 쇼로 만든 것이다. 하겐베크 회사는 원주민들이 수치심이 없고, 단순하게 요리하며, 청결성이 부족한 점을 강조하며 쇼가 자연스럽고 사실적이라고 주장했다. ‘사람 쇼’는 베를린 인류학자들의 인류학적 연구대상이 되면서, 사람 전시의 근거가 더욱 탄탄해졌다. 당시 다윈의 진화론이 유행하고 있었는데, 이들 원주민들은 인간 진화의 중간 단계로 취급되어, 이들의 머리 크기나 키 등 신체 데이터는 “과학적”이고 “인종차별주의”적인 이론에 적용됐다.
‘인간 전시’는 큰 인기를 끌었다. 저자는 그 인기의 이유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아메리칸 ‘인디언’은 말을 타고 때때로 백인 정착민들의 머리 껍질을 벗길 필요가 있었다. ‘에스키모’는 카약을 저어야만 했고, ‘베두인’족은 낙타를 타야만 했다.” ‘인간 전시’는 비서구에 대한 서구(유럽)의 우월감을 강조하거나 반대로 문명화가 원주민들의 ‘자연스러움’에 비해 모자라는 점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내용이었지만, 결국 이 두 가지는 모두 비서구에 유럽을 투영하는 것이었다. 특히 ‘인간 전시’에는 성적인 관심이 많았는데, ‘미개인’의 나체사진은 합법적으로 나체를 볼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이었기 때문에 주목을 받았다. 대중들은 ‘미개인 미녀’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나타냈으며, 돈을 주고 성매매를 하려는 남성들도 많았다.
하겐베크는 비서구가 문명화를 겪으면서 ‘인간 전시’에 적절한 ‘미개인’이 사라지자, ‘인간 전시’ 대신 동물 공연에 손을 댄다. 동물 포획과 ‘인간 전시’, 그리고 동물 공연과 동물원은 모두 하겐베크 회사의 사업 확장 결과였다. 하겐베크는 이전의 영웅적인 동물 공연과는 달리 동물과 동물, 동물과 조련사 사이의 자연스럽고 애정 어린 이미지를 창출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한편 동물 공연용 동물을 보관할 곳이 마땅치 않자, 그는 땅을 사서 동물원을 만들게 된다. 하겐베크 동물원은 대중들이 동물들을 만나는 곳이자, 동물의 수송과 유통의 거점이기도 했던 것이다.
동물원의 유토피아적 이미지에 대한 회의
하겐베크 동물원은 창살과 우리를 사용하지 않고, 동물들을 파노라마처럼 자연스럽게 넓은 초원에 펼쳐 놓음으로써 ‘노아의 방주’와 같은 이미지를 창출했다. 각 동물들은 먹이사슬에 맞게 적절하게 선택되었으며, 하겐베크는 “자유와 행복”이라는 휴머니즘적인 문구로 동물원을 선전했다. 이는 ‘인간 전시’결과 하겐베크가 “진짜”의 재현이 대중의 인기를 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진짜”는 유럽인들이 믿고 싶은 “진짜”다. 동물원은 위험한 세상에 유럽인들이라는 자상한 존재가 있다는 메시지를 확인할 수 있는 장소였다.
하겐베크 동물원은 엄청난 인기를 끌면서 “하겐베크 혁명”이라고 불렸다. 하겐베크 동물원 이후 많은 동물원들은 전시 실험을 했다. 하겐베크 동물원이 아프리카에서나 볼 수 있는 초원과 북극에서 볼 것이라 기대되는 얼음산과 분수 등의 조형물을 통해 자연스러움을 강조했다면 이후 동물원들은 ‘야수성’을 연상시키는 거친 풀과 땅을 만들거나 기하학적인 공간을 조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출발점은 언제나 자연 환경의 재현을 통한 ‘몰입 전시’였다.
저자는 동물원에 대해 긍정이나 부정의 명쾌한 대답을 내리는 대신, 동물에 대해 ‘저 동물들은 어디서 오는 걸까?’라는 질문을 던질 것을 권유한다.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부정할 수 없으며, 동물원과 해양 동물원이 종 보호 및 대중 교육의 장소로 기능하고 있는 것이 현실인 만큼 동물원에 대해 무조건적인 반대를 외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동물원이 제시하는 휴머니즘적이고 유토피아적인 이미지를 긍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저 동물들이 어디서 오는지, 누가 동물들을 잡는지, 포획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동물들이 죽는지, 동물들을 잡는 데 사용한 방법이 환경에 피해를 주지는 않는지 등에 대한 질문과 심화된 연구만이 동물원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의 정립에 해답을 제시할 수 있다.
여성주의 저널 《일다》 김윤은미 기자 ⓒ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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