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의 역사 - 현대 프랑스 철학총서 11
미셸 푸꼬 지음 / 인간사랑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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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있다. 그는 자신의 눈보다 다른 사람의 눈을 더 믿고 의지한다. <광기의 역사>란 책의 저자인 푸코가 그러했다. 물론 나의 말은 푸코가 맹인(盲人)이란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형이상학의 세계에서 그토록 겸손했던 그의 자세를 말하는 것이다. 타자(他者)의 눈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오만한 주관적 관점의 자살. 추락하는 객관성의 온전한 구원. 그것은 이성과 비이성, 빛과 어두움의 연결고리이다. 여기 푸코의 거대한 업적이 밤하늘에 아로새긴 별처럼 빛난다.

이런 책이 있었나? 아니, 아니다. 이런 책이 있을까? 만약 누군가가 자신이 역사속의 한 사람이라는 믿음을 지닌 채 <광기의 역사>를 읽으려 한다면 얼굴을 가리고 책장을 넘겨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푸코가 보여주는 수치와 부끄러움이 책 속에 숨어 자신들을 데려갈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모든 사람이 그런 수치와 부끄럼으로 약간의 모욕을 느낀다. 어쩌면 그 모욕은 우리가 감내해야 하는 버림받은 비이성을 위한 짧은 시간의 의식(儀式)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누가 함께할 수 있는가? 내가? 아니면 이 짧은 글을 읽는 당신이? 푸코는 무엇으로 자신이 준비한 이 엄숙한 의식에 초대하는가? 아마 그것은, 젊은이들의 가슴을 설레이게 하는 핑크빛 로맨스는 아닐테지. 광기(狂氣)와 비이성의 역사를 돌아보는 동안, 내키지 않으면서도 조금씩 조금씩 역사의 심판자가 준비한 그 힘든 의식에 빠져드는 아이러니를 이겨내기 힘들었다. 나는 그랬다.

광인(狂人)들이 가득한 배 한 척이 망망대해를 방황한다. 어디서부터 왔고 어디로 가는지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아무도 그들을 찾지 않으므로. 광인들 스스로도 자신들의 위험한 운명에 대해 관심이 없으니까. 그것은 일상을 거부한 광인의 열정과 동물성에 대한 감금의 시작이었다. 배에 갖힌 사람들은 꿈과 현실을 구분 못하는 사람들에 불과할지도 모르는데. 그러나, 잔인한 처벌, 상실된 인간존중. 이것은 욕심 가득한 인간들이 갈곳 없는 이들에게 내린 잘못된 처방이었다. 누가 불쌍한 그들에게 광인의 멍에를 지웠는가!

이 책에서 담론의 마술을 보았다. 당신도 권력자들이 부지런하지 못하고 빈곤한 자들에게 행한 기괴한 마술을 알게된다. 무익하고 지저분한 자들을 위해 그들이 만들어 놓은 훌륭한 창조물 '광기'. 광기는, 비이성은 그들에게 참을 수 없는 죄로 보였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을, 그가 누리는 풍요로움을, 어떤 이는 할 수 없고 또 다른 사람은 가지지 못했다는 무능력. 그것이 제거해야 하고 감금해야만 하는 큰 죄였던 것이다. 권력의 담론이 행한 감금은 분명 부유한 이성이 가난한 비이성에게 저지른 만행이었다.

감금된 광인은 오로지 자신과 같은 처지의 비이성을 본다. 이것이 비이성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불행이다. 치유될 기회를 영원히 잃어버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광인을 가두기위해 감금이 필요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광기가 다른 광기를 보고 또 다른 광기를 낳는다는 계산을 간과했다. 오히려 감금이 광인을 재생산하거나 더욱 악화시키는 것은 아닌가! 자유를 얻은 광인을 상상해 보았다. 그는 이제 발목을 옥죄던 무거운 쇠사슬에서 벗어났으며, 물리적 처벌에서도 해방되었다. 그래서 그는 더욱 광기를 발하게 될까? 아니. 꼭 그렇지 않다. 그가 혹시, 인위적 공간에서 할 수 없었던 생각을 하게되지 않을까? 분명히 그는 다른 사람의 경고를 통해 비이성의 늪에서 괴로워 하고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바로 지금 내 앞을 지나가며 나를 경계하는 타인의 눈을 통해서 말이다.

단 한토막의 가벼움도, 약간의 느슨함도 허락지 않았던 <광기의 역사>라는 한 권의 책이 있다. '미셸 푸코'가 우리에게 보여준 철저한 진지함. 이 책을 단숨에 읽어버린 사람이라면 그것에 감동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지나간 역사속 우리가 가두었던 비이성에 대한 죄책감과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분노를 삼키며 책앞에 엎드려 아찔했다.이어지는 먹먹함, 씁쓸함 그리고 약간의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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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철학사 - 상 - 고대와 중세 서양 철학사 - 상
요한네스 힐쉬베르거 지음, 강성위 옮김 / 이문출판사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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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피타고라스에서부터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스토아, 에피쿠로로 이어지는 고대철학은 철학이라는 학문의 모든 근원이 되었다. 이 책에서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를 다루었던 것에 비해서 위대한 철학자 소크라테스에 대해서는 너무 소홀했던 것이 아쉽다.

중세 철학은 신을 벗어날 수 없는 어두움의 철학이다. 교부철학에서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스콜라 철학에서는 토마스 아퀴나스를 뼈대로 하여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은 철학의 전반적인 것을 다루고 있어 조금은 양이 방대한 면이 있지만, 다른 책에 비해 깊이 있게 다루었다는 것이 장점이다.

둘. 고대와 중세 철학에 비해서 근대와 현대 철학은 그 양뿐만 아니라 깊이와 내용이 많이 어려웠다는 생각이다. 이것은 나의 생각이 아닐지도 모른다. 철학의 깊이가 현대로 오면서 더욱 난해해진 것이 맞을 것이다.

이 책을 읽는데에 있어 꾸준히 끊이지 않고 공부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바쁜 일과로 책을 계속 읽지 못하고 리듬을 자꾸만 놓치게 된 것이 이 책을 이해하는데 큰 어려움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이 책은 한번 읽고 버리는 책이 아니다. 이 책은 마치 사전처럼 생각해야 하고 필요할 때마다 뒤적거릴 수 있는 그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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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이성비판 - 개정판
임마누엘 칸트 지음 / 박영사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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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정말 긴 미로를 헤메다 겨우 구조를 받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솔직히 읽는 도중에 '너무 성급한 도전이었었나?'라는 자문을 했었고, 몇번씩이나 포기하려고도 마음먹었었다. 그러나, 이 난해한 책을 난 '순수이성비판 분석'과 '순수이성비판의 기초개념'이라는 책의 도움을 받아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통해서 철학사는 커다란 반환점을 돌게된다. 철학사를 통털어 오랜 대립을 지속해오던 합리론과 경험론의 모순성을 칸트가 정립과 반정립의 논의를 통해서 증명해 냈을 뿐더러 합리론의 이성에 대한 지나친 믿음을 반박해 낸 것이다.

칸트는 또 이 책을 통해 오성개념을 등장시켜 감성과 이성사이의 매개역할을 맡기는 중요한 작업을 시도하고 증명한다. 또 종합적 판단을 말하면서 경험론의 한계를 못박는다.

나는 아직도 선험개념과 가상개념 그리고 예료 등 여러 개념들에 익숙하지 못함을 인정하면서 언젠가 다시 이 책을 보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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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학 박영신서 4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이병길 옮김 / 박영사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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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는 개인의 목적과 국가의 목적을 동일한 것으로 보면서 가장 최상의 국가는 법률에 의해서 국민이 지배되며,그 국민이 그 법률에 대해 잘 복종하고 또 그 법률은 국민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한다.

그는 정체론을 통하여 어려가지 국가형태를 제시하면서, 특히 빈민정치와 과두정치의 상세한 고찰로 시작하여 각각의 정체에 대한 바람직한 방향을 제시하지만 그는 몇몇의 정체의 혼합된 정체를 바라고 있는 듯 하다.

그는 지배자 계층과 피지배자 계층에 대한 의견으로 교체되어야 하면서도 교체되면 안되는 경우를 말하는데 그것은 바로 교육의 방법을 제시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역시 교육도 지배자와 피지배자에게 동일하게 가르쳐야 하면서도 가르쳐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논리학에 이어서 정치학에서도 중용을 강조하는 듯 하지만 몇몇 부분에서는 혼란스러울 정도로 세세하게 논한것 같아 짙은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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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프 신화 알베르 카뮈 전집 4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199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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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까뮈'는 스스로 철학자가 아니라고 말한다. 사실 그가 저술한 책 중 철학이란 이름을 빌어 나온 책은 없다. 하지만 『이방인』이나 『시지프 신화』를 읽어보면 그의 철학적 깊이에 감동할 수 밖에 없다. 나는 이제 그를 한사람의 위대한 철학자라고 말하고 싶다.

인간이 언제나 그리고 반드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할 문제가 있다. 그것은 인간이 살아가는 목적이요 방법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중요한 것이란 무엇인가? 공리주의자들이 말하는 유용성인가? 아니면 쾌락? 합리적 이성? 그러한 것도 아니라면, 'I.Kant'가 『실천이성비판』에서 말하고 있는 '내 마음에 빛나는 도덕성'도 내 보일 수 있으리라.

하지만, 'A. 까뮈'가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철학적 자살'이다. 이 말은 이 책의 전체에 걸쳐서 '부조리'라는 다소 생소한 표현으로 서술하고 있다. '부조리'와 '철학적 자살'이란 말은 똑같은 말이다. 인간이 가치있다고 판단하는 것은 언제나 이성을 준거로 삼는 것이다. 고대로부터 이성은 무너질 수 없는 권위를 인간으로부터 부여받았다. 플라톤 이후로 거의 모든 철학자들이 옳은 것, 합리적인 것을 말하고 그렇게 따라왔던 것이다. 누가 감히 이성의 권위에 도전할 수 있을까? 그러한 이성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 바로 부조리요, 철학적 자살이다. 'A. 까뮈'는 바른 철학에 반기를 든다.

가치있는 것은 반드시 따라야 하는 것인가? 그렇다. 하지만 조건이 있다. 가치 있다는 것은 무엇에 의해서 규정되어야 하는지의 검토이다. 이러한 물음에 대해서 우리는 철저하게 부조리해질 필요가 있다. 부조리란 무엇인가? 자신의 정열을 신보다(이성보다) 중요하게 보는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 자문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하늘과 보잘 것 없는 충실함 중 어떤 것을 택할 것인가?'하는 물음이다. 분명히 인간의 조건을 벗어나는 의미가 존재할 것이다. 그것은 이제껏 저 위대한 철학자들이 명백하게 밝힌 철학적 사색들이다. 그러나 그것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검증된 이성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알고 있는 것, 확실한 것, 내가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가치를 규정하기 위해서 우리는 'A. 까뮈'의 부조리의 준거를 사용할 필요가 있다.

인간은 종교를 갖고 산다. 종교를 갖고 있는 사람은 대체로 신앙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부조리한 인간도 종교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신앙은 없다. 다른 의미에서의 종교인 것이다. 다른 의미에서 행복한 신 '시지프'는 신들에게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끊임없이 굴려 올려야 하는 형벌을 받는다. 그런데 그 바위는 그 자체의 무게 때문에 다시 산밑으로 굴러 내려온다. '시지프'의 죄목은 너무나 인간적인 것을 추구했다는 것이다. 그에게도 하늘의 것보다는 내가 알고 있는 것 즉, 나에게 진실로 의미 있다고 생각되는 것이 더 중요했던 모양이다. 바위를 굴려 올리는 시지프는 종교를 갖고 있다. 그의 종교는 바위이다. 그 순간 바위는 그의 것이다. 시지프의 말없이 큰 기쁨은 여기에 있다. 신들이 無用하고 희망없는 노동보다 더 끔찍한 형벌은 없다고 생각한 것은 일리가 있었다. 그러나 무용하고 희망없는 형벌이 시지프에게는 가장 의미있는 일이 되어버린다.

'I.Kant'는 자신의 인식론을 '코페르니쿠스的 전환'이라고 자찬하지만 그것은 반쪽의 성공이다. 그가 이루어 놓은 새로운 시각은 기존 철학 안에서의 업적이었다. 그런 반면 A.카뮈의 전환은 다른 세계로의 초대이다. 또 다른 철학의 탄생이다. 『시지프 신화』는 우리에게 너무나 큰 깨달음을 준다. 새로운 인식이다.

이것은 두려운 감동이다. 그리고 나에게는 말할 수 없는 너무나도 슬픈 안타까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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