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거란전쟁
길승수 지음 / 들녘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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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3년 소손녕의 거란군이 고려로 침공하였을 때 대부분은 서경 이북땅을 떼어주고 강화를 하자는 의견이 앞섰습니다. 그러나 서필의 아들 서희는 국제정세를 제대로 간파하고 거란이 쳐들어온 이유는 송을 치기위해 후방을 안정시키려는 목적이지 고려의 멸망이 아님을 간파하고 오히려 거란과의 통교에 여진이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강동6주의 땅을 얻으면서 강화까지 이루는 쾌거를 이룩합니다. 한반도 외교역사상 가장 최고의 결과물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서희는 이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만일 거란의 재침공 때 강동6주는 방패역할을 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임을 알고 흥화, 용주, 통주, 귀주, 곽주 등 6진을 설치하여 거란군이 침공할 때 개경의 주요인물은 피신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기 위한 군사기지를 설치합니다. 이는 조선기 후금(후 청나라)이 조선을 침공할 때의 방어전략과 거의 비슷합니다. 그렇게 강동 6주는 거란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됩니다.

1010년 강조의 난을 이유로 거란을 현종을 폐위하고 다시 원점으로 돌리겠다는 명분으로 재차 고려를 침공하게 됩니다. 강조의 주력군은 거란군을 맞이하여 정규전을 펼치게 되나 최초 전투에서 승리한 것에 도취되어 결국은 패전하게 됩니다. 거란이 침공한 지 보름채 되지 않아 거란군은 개경을 점령하게 되면서 고려의 존패마저 위태롭게 됩니다. 현종은 파천을 택했으나 개경에 남은 나머지 백성들은 살육의 현장에서 학살되었습니다.

하지만 거란군 또한 보급이 원활치 않아 압록강이 녹기 전에 돌아가야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 때 도순검사 양규는 퇴각하는 거란군을 상태로 유격전을 펼쳐 1만에 가까운 고려인을 구출합니다. 그러나 양규는 이 유격전에서 전사합니다. 퇴각하는 병사들을 상대로 전투를 벌인다는 자체가 쉬운 일은 아닙니다. 또한 전쟁이 끝났다는 안도감으로 생존하기를 원하지 굳이 추격하여 전사를 택하는 사람은 없기에 양규의 유격전은 더더욱 주목을 받게 됩니다.

1018년 거란은 3차로 침공하였습니다. 당시 거란에서는 명장으로 일컫는 소배압이 직접 남하하였습니다. 보통은 강동 6주의 경로를 통해서 남하하는 것이 보통입니다만 2차침입을 반면교사삼아 험준한 산악지대를 택해 바로 개경으로 침공하는 경로를 선택했습니다. 거란이 침공한다는 급보를 받은 강감찬은 바로 강동6주를 통해 방어하고자 하였으나 예상과는 다른 경로를 통해 침공하자 별동대를 급파해 개경이 함락당하는 것을 막았으며 거란의 주력군마저 격파하면서 거란이 더이상 군세를 동원하지 못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동북아시아에 평화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은 더이상 개경에서 물러서지 않으며 거란의 군세와 맞서싸우겠다는 현종의 굳건한 의지와 화친을 택하지 않고 당시 동북아시아의 패권국이었던 거란에 맞서 싸우고자 했던 강감찬에게 힘을 실어준 현종의 탁월함이 없었다면 이루지 못했을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국가운영에 있어서 지도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원에서 강대국이라고 일컫던 송마저 거란에 패퇴하던 모습을 보여주던 중 고려의 승리는 더이상 거란이 준동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강제적으로 평화기를 이끌 수 있었던 한민족의 쾌거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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