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자였습니다. 황제 나폴레옹(Napoleon Bonaparte)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지금 이 방에 철학자 소크라테스(Socrates)가 들어온다면 우리 모두 일어나 그에게 존경을 표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이 방에 오신다면 우리는 존경이 아니라, 엎드려 그에게 경배해야 할 것이다." 그는 존경과 경배의 차이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소크라테스와 예수 그리스도의 차이를 알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이렇게 우리의 경배를 받기에 합당하신 이 어린 왕자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고 우리를 하늘 별로 데려가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당신의 목숨을 내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가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요 13:1)하셨다고 말씀합니다. 그의 사랑은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의 장미꽃을 향한 고백과 너무도 닮았습니다. "너희는 아름답지만 그냥 피어 있을 뿐이야. 너희를 위해 죽을 사람은 아무도 없어. 무심히 지나는 사람들이 보면 너희를 모두 똑같은 꽃으로 생각하겠지. 하지만 내게는 그 한 송이가 다른 모두를 합친 것보다 더 소중해… 난 내 꽃을 돌보기 위해 내 집으로 가야 해 … 나는 그 꽃에 책임이 있어 … 세상에 맞서 자신을 지킬 아무 쓸모없는 가시 네 개를 가진 그 꽃을 위해 난 죽어야 해." 성경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어린 왕자도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우리에게 천국을 보여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그 천국의 비전을 가지고 이 지구별에서 살아갈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천국에서 온 어린 왕자의 더 자상한 사랑 이야기를 마태복음의 천국 이야기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가난하다’는 희랍어로 ‘프토코스’(ptochos)라 하는데, 이는 상대적 가난이 아닌 절대적 가난을 뜻합니다. 타인의 자선에 의존하지 않고는 생존이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물질적 가난이 아닌 심령의 가난, 곧 영적인 상태를 뜻하는 말입니다. 영적인 파산 상태로 누군가를 의존하지 않고는 생존이 불가능한 마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죄인의 실존입니다.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에게 나아갈 때,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부끄러운 상태의 죄악을 발견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자기 죄에 대해 느끼는 정적 연민, 그것이 바로 성경적 애통입니
인생은 생존을 위한 양식으로 늘 신경을 써야 하지만, 동시에 날마다 부딪히는 인간관계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간관계에 대한 하나님의 최고의 명령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실천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이웃들에 대한 용서부터 실천되어야 합니다. 날마다 일용할 양식이 필요하듯, 날마다 상처를 경험하는 삶의 마당에서 용서는 사랑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인간관계에서 얽히는 모든 죄는 도덕적 부채와 같은 것입니다. 부채에 시달리다 보면 인생을 사는 에너지를 다 상실합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 나라 비전을 갖는 것은 불가능한 기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부채를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다 짊어지고 이제는 자유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내가 너를 조건 없이 용서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용서하라." 여기 바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사는 이들이 드려야 할 두 번째 결단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마 6:12).
바울 사도는 성도의 삶을 산다는 것이 악의 영들에 대항하는 영적 전투라고 말합니다. 일찍이 존 번연(John Bunyan)은 성도들이 순례 여정에서 경험하는 끊임없는 유혹과 고난을 ‘거룩한 전쟁’(Holy War)이라고 했습니다. 인생의 모든 사건이 하나님의 손길을 거쳐 오는 것을 아는 순간 거룩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먹는 빵도 성찬이 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몸은 성전임을 알게 되고, 우리가 부르는 노래는 성가가, 우리에게 주어진 예배의 날은 성일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고난의 싸움조차 우리를 연단하는 거룩한 전쟁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 거룩한 전쟁의 실체를 이해하고 끊임없는 기도의 긴장 속에 사는 사람들이 바로 성도입니다. 이 세상에는 분명 시험과 악이 존재하고, 이런 시험과 악의 배후에는 이 세상 신이, 악마의 나라가 존재합니다. 그러나 거룩하신 하나님의 도움과 개입을 기도하는 순간, 이 세상 속으로 하나님 나라가 침투해 들어옵니다. 그리고 그 나라가 매순간 소리 없이 누룩과 겨자씨처럼 확장되어 가는 것입니다.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려진 자요"(마 13:19).
이미 이런 이들의 마음은 굳은 땅 같아서 말씀을 흡수하지 못해 악한 자, 곧 마귀가 즉시로 그 말씀을 빼앗아 감으로 말씀의 결실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저는 이런 유형의 그리스도인들을 ‘명목상의 그리스도인’(Nominal Christian, name only Christian)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이름만 그리스도인이지 말씀에 대한 관심도, 열정도 없습니다. 말씀을 받는 자리에는 나와 있지만 말씀이 그 마음에 정착할 여지가 없는 교인들인 것입니다. C. S. 루이스(Lewis)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홍성사 역간)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노신사가 도서관에서 기독교 서적을 우연하게 손에 잡고 읽다가 신앙에 대한 관심이 조금 일어나려고 합니다. 그 순간 시계를 보니 점심시간이 다가옵니다. "에이, 밥이나 먹고 생각하자." 식사를 하다 보니 그의 생각은 다시 오후 시간에 그를 기다리는 여러 일로 분주해집니다. 그리고 잠시 가진 신앙에 대한 관심은 다시 저 멀리 도망가 버립니다. 이런 신사를 보고 악마는 그의 뒤에서 회심의 미소를 짓습니다. 그의 바쁜 일상이 말씀의 정착을 방해한 것이고, 그런 배후에는 악마의 사역이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 예배 시간에 설교를 들으며 생긴 약간의 관심, 그러나 점심시간이 지나고 오후가 되면 그 말씀은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어집니다. 이렇게 세월은 지나고 말씀은 나의 실제적 삶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이것이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길가와 같은 것입니다.
말씀을 지키는 것은 저 깊은 산속에 들어가서 하는 일이 아닙니다. 날마다의 치열한 삶의 마당에서 이웃들을 격려하고 섬기고 세우며 살아가는 일입니다. 결국 모든 말씀의 명령은 두 가지로 요약되지 않습니까?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눅 10:27). 이런 선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지킬 때, 우리는 천국 백성다운 백성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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