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실존을 부끄러워하지 말라
정체성의 위기를 겪는 새끼 호랑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주 아빠 호랑이를 찾아 물었습니다.
"아빠, 내가 호랑이 새끼 맞아요?"
"그럼, 맞고말고."
하지만 다시 확신이 흔들리자 이번에는 엄마를 찾아가 물었습니다.
"엄마, 나 호랑이 새끼 맞아요?"
"맞고말고."
한동안 잘 지내던 그가 길에서 활과 도끼를 들고 숲속을 휘젓고 다니던 사냥꾼과 맞부딪치게 되었습니다. 자기 앞에 웬 짐승 새끼가 얼쩡거리자 사냥꾼이 말했습니다.
"야, 개새끼야. 비켜!"
이 말을 들은 새끼 호랑이는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맞아. 난 호랑이 새끼가 아니라 개새끼에 불과할지 몰라!"
오늘날 세상은 우리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개독교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불행한 사실은 우리가 그것을 믿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말 개독교인입니까? 물론 우리가 잘못하는 많은 실수가 우리를 그렇게 보이게 한 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책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예수를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한 사람들이라면,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선포합니다. 우리의 존재가 세상 속에서 아무리 왜소해도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을 지닌 그분의 자녀인 것은 사실이 아닙니까?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2).

겨자씨가 아무리 작아도 소중한 것은 그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미미하고 작은 존재로 이 땅에서 산다고 할지라도 부끄러워 말아야 합니다. 우리 안에는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고난을 당한다면, 우리는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벧전 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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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스위스는 연이어 닥쳐온 기술혁명들에 대응해 스와치Swatch를 선보였고, 스와치 시계들은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는 시계에 장신구의 개념을 덧붙여 수집가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수많은 유명 인사가 스와치 광고에 등장했고, 스위스 시계 산업은 소멸 직전에서 극적으로 명성을 되찾았다. 일본의 시계들은 어느새 지루하고 재미없는 시계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이번에는 휴대전화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손에 들고 다닐 수 있으며 시간을 확인하고 전화통화도 할 수 있는 휴대전화는 기존의 시계를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그리고 모르는 사이에 시계는 장난감처럼 사용하거나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기 좋은 사치품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원점으로 되돌아왔다. 애플이나 삼성 혹은 샤오미처럼 스마트폰을 생산하는 첨단 기술 기업들이 이제 이른바 스마트 워치를 우리에게 팔기 위해 애쓰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역사의 교훈은 새로운 기술이 오래된 기술을 대체하며, 그에 따라 일자리가 만들어졌다가 사라지고 각기 다른 국가에서 시계 산업이 부흥했다가 스러지며, 새로운 소비 성향이 연이어 나타난다는 것이다. 시계는 그런 수많은 사례 중 하나일 뿐이다. 냉장고가 발명되면서 굳이 얼음을 냉각제로 사용할 필요가 없어졌고, 전화기는 전신기보다 더 편리하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백열전구는 기존의 가스등을 대체했고, 트랜지스터가 등장하면서 진공관이 사라졌다. 제트 엔진이 프로펠러 엔진을 앞섰고, CD 덕분에 레코드판은 수집가들이나 찾는 물건이 되어버렸다. 워드 프로세서와 개인용 컴퓨터가 등장하자 타자기는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버렸고, 디지털 사진기 때문에 필름 사진기의 역사는 종말을 고했다. 컴퓨터 게임은 전통적인 장난감보다 훨씬 높은 인기를 끌고 있다. 우리는 이런 극적인 변화들을 표현할 때 ‘대혼란’이나 ‘파괴’ 같은 표현을 사용한다. 손목시계의 발전은 이렇게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

바로 "창조적 파괴"라는 개념이다. 슘페터는 새로운 기술을 바로 받아들이는 시장경제의 특성과 그로 인하여 발생하는 낡고 비효율적인 것들을 몰아내는 지속적인 영향력 모두 시장경제의 빛인 동시에 그늘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1942년에 이렇게 말했다. "자본주의를 움직이는 엔진을 설치하고 계속 움직이도록 만드는 근본적인 동력원은 새로운 소비재와 새로운 생산 혹은 운송 방법, 새로운 시장, 그리고 자본주의 기업들이 만들어낸 새로운 형태의 산업 조직들로부터 나온다." 또한 슘페터는 이러한 동력원을 "내부로부터 끊임없이 경제 구조를 혁신하고 낡은 것들을 파괴하며 새로운 것들을 창조하는 산업적 돌연변이의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이러한 창조적 파괴 과정이야말로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사실"이라고 결론지었다.

인간과 세상의 종말은 차치하더라도 인공지능이 획기적 변화를 가져올 거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인간 과학자가 스스로 배우고 응용하는 인공지능을 갖춘 기계장치를 끊임없이 개선하고 발전시키고 있다.

자율 주행 자동차의 미래는 아주 밝은 듯하다. 인간은 원래 어딘지 엉성하고 믿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곧잘 산만해지거나 지루해하고 혹은 피곤해한다. 컴퓨터는 최적화된 경로를 찾아내고 교통신호와 도로 상황도 감안해 움직일 수 있다. 그것도 연료 효율까지 높이면서 말이다. 가장 중요한 점은 컴퓨터가 다른 컴퓨터와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도로 위에서 경적, 손짓 등으로 의사소통을 한다. 반면에 자율 주행 자동차는 근처에 있는 다른 자동차들과 소통하며 다 함께 교통 흐름을 통제할 수 있고 의도치 않은 사고도 줄일 수 있다.
인공지능의 영향력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제조업 분야에서는 로봇 한 대가 평균 다섯 명에서 여섯 명의 인간 노동자를 대신할 수 있다. 미국에서 단순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숫자는 1983년에 약 2800만 명이었고 2015년에는 3000만 명으로 고작 200만 명 남짓 늘었다. 이 기간 동안 30만 대가 넘는 로봇이 설치되어 약 200만 명 몫의 일을 감당하고 있다. 기술 발전은 3장에서 살펴본 육체노동이나 사무직 노동을 하는 미국 중산층이 붕괴하는 데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 이제는 매년 3만 5000대 이상의 로봇들이 설치되고 있으므로 향후 10년 동안 더 큰 영향력을 미칠 것이다. 2030년이 되면 제조업 분야에서는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아니라 컴퓨터 전문가와 관리자를 더 많이 채용할 것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가상현실virtual reality,VR 기술은 그저 컴퓨터 게임 이용자들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가상현실은 훨씬 쓰임새가 많을뿐더러 대단히 혁명적인 기술이다. 외과 의사와 간호사들은 이제 복잡한 수술을 성공적으로 진행할 최적의 방법을 미리 확인하기 위해 VR 장치를 착용한다. 심리학자들은 고소공포증이나 현기증, 불안 장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는 사람들을 치료하기 위해 VR 장치와 기술을 사용한다. 옥스퍼드대학교에서는 두 연구자가 편집증의 일종인 피해망상을 앓는 환자들을 VR 기술로 치료하고 있다. 이들에 따르면 "가장 효과적인 치료 방법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상황이 실제로는 안전하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알도록 돕는 것이다. 자신이 안전하다고 느끼면 망상은 저절로 줄어든다." 환자들은 한 차례의 치료만으로도 빠르게 회복된다고 한다. 두 연구자는 이렇게 지적한다. "가상현실은 오락거리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미래에는 정신 보건 분야에서 가상현실이 진단과 치료에 핵심적인 역할을 할 가능성이 크다." 이 기술은 또한 치과 치료를 받거나 MRI 촬영을 할 때 환자들이 느끼는 두려움을 줄여줄 수도 있다.
VR 기술은 뇌의 특정 부위에 이상이 발생한 환자들의 운동 기능을 자극하는 데도 효과적이다

VR 기술은 자폐아들이 학교에서 사회성을 습득하도록 도울 수 있으며, 그러면 아이들은 학교 수업을 좀 더 쉽고 효과적으로 따라갈 수 있다. 2030년이 되면 이 기술들이 의료 전문가들이 수십 년간 쌓은 경험과 결합하여 심리적 장애나 불안 증상들을 크게 줄여줄 것이다.

전자책 기술은 근본적으로 외부의 혁신자들이 소프트웨어에 관여할 여지가 적다. 그 결과 전자책의 기능은 상당히 제한적이다. 또한 연구자들은 독자들이 전자책 전용 기기나 태블릿보다 종이책을 읽을 때 더 효율적으로 정보를 얻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종이책을 보며 지금 어느 부분을 읽는지 가늠할 수 있는 느낌은 생각 이상으로 중요하다." 영국 케임브리지 마이크로소프트 연구소Microsoft Research의 애비게일 셀런Abigail Sellen의 주장이다. "전자책을 사용하면 그러한 측면들이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다. 전자책 개발자들은 독자 입장에서 책을 어느 정도 읽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에 신경 쓰지 않는 것 같다."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에 실린 한 기사를 살펴보자. "전자책 전용 기기와 화면은 책을 읽어나갈 때의 두 가지 측면을 무시하고 있다. 바로 우연히 발견하는 기쁨과 책 자체에 대한 통제력이다. 사람들은 책을 읽어나가다가 문득 앞에서 읽었던 부분이 떠오르면 다시 앞쪽을 넘겨보는데, 거기에서 큰 즐거움을 느낀다고 한다." 전자책은 인터넷으로 읽을 수 있는 디지털화한 잡지만큼의 상호작용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지난 2011년에 "책으로 읽는 잡지와 아이패드로 보는 잡지"라는 제목의 유튜브 영상이 큰 인기를 끌었다. 여기서 한 살배기 여자아이가 아이패드의 터치스크린에 떠오르는 여러 내용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린다. 아이는 이후 종이 잡지를 가져와 손가락으로 종이 위를 두드리고 움켜쥐거나 찔러보기도 한다.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크게 실망한다. 여자아이의 아빠는 디지털 세대로 태어난 아이에 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한 살배기 내 딸아이에게는 종이 잡지가 그저 망가진 아이패드에 불과하다. 아마도 평생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우리가 2장에서 만나본 ‘태어나면서부터’ 디지털 세대가 된 아이들은 전자책에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기존의 종이책을 그대로 화면에 옮긴 것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화면에 문장이 펼쳐지는 방식 자체가 새롭게 진화하면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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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였습니다. 황제 나폴레옹(Napoleon Bonaparte)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지금 이 방에 철학자 소크라테스(Socrates)가 들어온다면 우리 모두 일어나 그에게 존경을 표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이 방에 오신다면 우리는 존경이 아니라, 엎드려 그에게 경배해야 할 것이다."
그는 존경과 경배의 차이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소크라테스와 예수 그리스도의 차이를 알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이렇게 우리의 경배를 받기에 합당하신 이 어린 왕자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고 우리를 하늘 별로 데려가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당신의 목숨을 내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가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요 13:1)하셨다고 말씀합니다. 그의 사랑은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의 장미꽃을 향한 고백과 너무도 닮았습니다.
"너희는 아름답지만 그냥 피어 있을 뿐이야. 너희를 위해 죽을 사람은 아무도 없어. 무심히 지나는 사람들이 보면 너희를 모두 똑같은 꽃으로 생각하겠지. 하지만 내게는 그 한 송이가 다른 모두를 합친 것보다 더 소중해… 난 내 꽃을 돌보기 위해 내 집으로 가야 해 … 나는 그 꽃에 책임이 있어 … 세상에 맞서 자신을 지킬 아무 쓸모없는 가시 네 개를 가진 그 꽃을 위해 난 죽어야 해."
성경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어린 왕자도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우리에게 천국을 보여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그 천국의 비전을 가지고 이 지구별에서 살아갈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천국에서 온 어린 왕자의 더 자상한 사랑 이야기를 마태복음의 천국 이야기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가난하다’는 희랍어로 ‘프토코스’(ptochos)라 하는데, 이는 상대적 가난이 아닌 절대적 가난을 뜻합니다. 타인의 자선에 의존하지 않고는 생존이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물질적 가난이 아닌 심령의 가난, 곧 영적인 상태를 뜻하는 말입니다. 영적인 파산 상태로 누군가를 의존하지 않고는 생존이 불가능한 마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죄인의 실존입니다.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에게 나아갈 때,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부끄러운 상태의 죄악을 발견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자기 죄에 대해 느끼는 정적 연민, 그것이 바로 성경적 애통입니

인생은 생존을 위한 양식으로 늘 신경을 써야 하지만, 동시에 날마다 부딪히는 인간관계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간관계에 대한 하나님의 최고의 명령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실천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이웃들에 대한 용서부터 실천되어야 합니다. 날마다 일용할 양식이 필요하듯, 날마다 상처를 경험하는 삶의 마당에서 용서는 사랑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인간관계에서 얽히는 모든 죄는 도덕적 부채와 같은 것입니다. 부채에 시달리다 보면 인생을 사는 에너지를 다 상실합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 나라 비전을 갖는 것은 불가능한 기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부채를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다 짊어지고 이제는 자유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내가 너를 조건 없이 용서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용서하라." 여기 바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사는 이들이 드려야 할 두 번째 결단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마 6:12).

바울 사도는 성도의 삶을 산다는 것이 악의 영들에 대항하는 영적 전투라고 말합니다. 일찍이 존 번연(John Bunyan)은 성도들이 순례 여정에서 경험하는 끊임없는 유혹과 고난을 ‘거룩한 전쟁’(Holy War)이라고 했습니다. 인생의 모든 사건이 하나님의 손길을 거쳐 오는 것을 아는 순간 거룩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먹는 빵도 성찬이 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몸은 성전임을 알게 되고, 우리가 부르는 노래는 성가가, 우리에게 주어진 예배의 날은 성일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고난의 싸움조차 우리를 연단하는 거룩한 전쟁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 거룩한 전쟁의 실체를 이해하고 끊임없는 기도의 긴장 속에 사는 사람들이 바로 성도입니다. 이 세상에는 분명 시험과 악이 존재하고, 이런 시험과 악의 배후에는 이 세상 신이, 악마의 나라가 존재합니다. 그러나 거룩하신 하나님의 도움과 개입을 기도하는 순간, 이 세상 속으로 하나님 나라가 침투해 들어옵니다. 그리고 그 나라가 매순간 소리 없이 누룩과 겨자씨처럼 확장되어 가는 것입니다.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려진 자요"(마 13:19).

이미 이런 이들의 마음은 굳은 땅 같아서 말씀을 흡수하지 못해 악한 자, 곧 마귀가 즉시로 그 말씀을 빼앗아 감으로 말씀의 결실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저는 이런 유형의 그리스도인들을 ‘명목상의 그리스도인’(Nominal Christian, name only Christian)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이름만 그리스도인이지 말씀에 대한 관심도, 열정도 없습니다. 말씀을 받는 자리에는 나와 있지만 말씀이 그 마음에 정착할 여지가 없는 교인들인 것입니다.
C. S. 루이스(Lewis)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홍성사 역간)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노신사가 도서관에서 기독교 서적을 우연하게 손에 잡고 읽다가 신앙에 대한 관심이 조금 일어나려고 합니다. 그 순간 시계를 보니 점심시간이 다가옵니다.
"에이, 밥이나 먹고 생각하자."
식사를 하다 보니 그의 생각은 다시 오후 시간에 그를 기다리는 여러 일로 분주해집니다. 그리고 잠시 가진 신앙에 대한 관심은 다시 저 멀리 도망가 버립니다. 이런 신사를 보고 악마는 그의 뒤에서 회심의 미소를 짓습니다. 그의 바쁜 일상이 말씀의 정착을 방해한 것이고, 그런 배후에는 악마의 사역이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 예배 시간에 설교를 들으며 생긴 약간의 관심, 그러나 점심시간이 지나고 오후가 되면 그 말씀은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어집니다. 이렇게 세월은 지나고 말씀은 나의 실제적 삶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이것이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길가와 같은 것입니다.

말씀을 지키는 것은 저 깊은 산속에 들어가서 하는 일이 아닙니다. 날마다의 치열한 삶의 마당에서 이웃들을 격려하고 섬기고 세우며 살아가는 일입니다. 결국 모든 말씀의 명령은 두 가지로 요약되지 않습니까?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눅 10:27). 이런 선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지킬 때, 우리는 천국 백성다운 백성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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