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여섯입니다."
"허! 그보단 훨씬 아래로 봤는데."
"네, 얼굴이 앳돼 보인다고들 하더군요. 어쨌든 장군님께 폐가 되지않도록 조심하겠습니다. 저 자신도 폐를 끼치는 걸 아주 싫어하니까그런 건 금방 깨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기왕에 말씀드리자면제 생각에 장군님과 저는 겉보기엔 아주 다른 사람들입니다. 여러점에서 말이죠. 따라서 저희 사이엔 공통점이 별로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말이죠. 저 자신은 그렇게 믿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저 공통점이 없는 듯 여겨질 뿐이지, 실제로는 공통점이 무척 많은 경우가 아주 흔하니까요..... 그건 그저 겉보기에 따라 서로를 분류할 뿐 아무런 공통점도 찾아낼 줄 모르는 인간의 나태함 때문에 생기는 일입니다………… 하지만 제 말이 따분하신가보군요? 장군님께선 어쩐지......
66 - P5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여러분에 대해 좋은 말보다 좋지 못한 말을 너무나 많이 들어왔습니다.
사소하고 특정한 것에만 관심을 둔다느니, 시대에 뒤처졌다느니, 교양이 얄팍하다느니, 습관이 우스꽝스럽다느니오, 여러분에 대해 이런식으로 얼마나 많이들 쓰고 말합니까! 저는 오늘 호기심과 혼란을 느끼며 여기 왔습니다. 과연 러시아의 이 상류계층 사람들은 죄다 아무쓸모 없고, 자기 수명을 다했고, 오랜 생명의 원천이 고갈돼 이젠 그저죽을 수밖에 없는데도 자기가 죽어간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미래를 담당할 사람들에 대한 질투 때문에 그들을 상대로 여전히 저열한싸움을 벌이면서………… 그들을 방해하고 있다는 게 사실일까? 이 문제를 저는 제 눈으로 직접 보고 확인해야만 했던 겁니다. 저는 전에도 이러한 견해를 전적으로 믿지는 않았는데, 왜냐하면 우리 나라에는 상류계급이라는게 존재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자신의 제복이나 흑우연한 계기를 통해 궁정에 속하게 된 사람들은 제외하고 드리는 말씀이지만, 지금은 그런 궁신 계급마저 완전히 사라져버렸죠그렇잖습니까, 그렇지 않나요?"
"아니, 전혀 그렇지 않아요." 이반 페트로비치가 차갑게 코웃음을쳤다.
"맙소사, 또 시작이군!" 벨로콘스카야는 참지 못하고 이렇게 말했다.
"말하게 두시오, 온몸을 후들후들 떨고 있잖소." 노인이 경고하듯 또다시 소곤대며 말했다.
공작은 이미 자제할 수 없을 정도로 흥분해 있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저는 여기서 우아하고 순박하고 현명한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저 같은 애송이의 말을 상냥하게 귀담아들어주는 노 - P418

인장을 보았습니다. 이해하고 용서할 줄 아는 사람들을, 제가 그곳에서만났던 사람들과 거의 똑같이 선량하고 진정을 지닌, 그보다 거의 뒤지지 않는 선량한 러시아인들을 보았습니다. 제가 얼마나 놀라며 기뻐했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오, 이 말만은 하게 해주십시오! 저는 사교계에서는 모든 것이 격식이고, 모든 것이 낡아빠진 형식이고, 본질은이미 고갈돼버렸다는 얘길 많이 들었으며, 저 자신도 그렇게 굳게 믿어왔습니다. 하지만 지금 저는, 그 얘긴 우리에게 해당할 수 없다는 것을제 눈으로 직접 보고 있습니다. 그건 어디 다른 곳의 얘기이지, 우리에게서만큼은 그렇지 않습니다. 과연 여러분이 지금 모두 예수회원이고사기꾼들입니까? 아까 N공작이 하는 얘길 들었습니다만, 정녕 그것이야말로 순박하고 영감 넘치는 유머가 아닙니까, 그것이야말로 진정한선량함이 아닙니까? 과연 그러한 말이 심장도 재능도 메말라버린…………죽은 사람의 입에서 나올 수 있겠습니까? 과연 죽은 자들이 지금 여러분이 저를 대해준 것처럼 그렇게 시를 대해줄 수 있을까요? 과연 이것이……… 미래를 위한, 희망을 위한 소재가 아니란 말입니까? 과연 이러한사람들이 이해 능력을 상실하고 퇴보할 수 있단 말입니까?"
"다시 한번 부탁하지만, 진정하시구려, 젊은 양반, 그 얘기는 모두 다음 기회에 하기로 합시다. 그때는 나도 기꺼이∙∙∙..." ‘고관‘이 웃으며 말했다.
이반 페트로비치는 헛기침을 하더니 자기 의자에 앉은 채 몸을 돌려버렸다. 이반 표도로비치는 초조하게 몸을 꼼지락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직속상관인 장군은 공작에겐 이미 눈길조차 주지 않고 고관 부인하고만 얘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고관 부인은 공작 쪽을 자주 힐끗거리며제4부 419 - P419

귀를 기울였다.
"아니, 지금 말해버리는 편이 낫겠습니다!" 공작은 새로운 열정이 솟구치는 것을 느끼며, 왠지 유난히 신뢰에 차고 은밀하기조차 한 어조로노인을 향해 말을 계속했다. "어제 아글라야 이바노브나는 저한테 말을 하지 말라고 하면서, 말해선 안 될 주제까지도 일러주었습니다. 그런 주제를 꺼내면 제가 우스꽝스러워진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으니까요! 저는 스물일곱 살이지만 아직도 어린애 같다는 사실을 저 자신도 잘 압니다. 저는 제 사상을 표현할 권리가 없으며, 이건 오래전부터제가 해온 말입니다. 다만 모스크바에서 로고진과 마음을 털어놓고 얘기한 적이 있을 뿐이지요. 우리는 함께 푸쉬킨을 읽었습니다. 푸쉬킨 작품을 전부 다 읽었습니다. 그 친구는 아무것도 몰랐고, 푸쉬킨의 이름조차 몰랐어요. 저는 저의 우스꽝스러운 태도 때문에 제사상과 주된 이념을 욕되게 하지나 않을까 늘 두려운 마음입니다. 저한텐제대로 된 제스처가 없습니다. 늘 그것에 반대되는 제스처를 할 뿐이어서,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고 저 자신의 이념을 깎아내리고 말거든요. 또, 적당한 정도에 대한 감각도 없는데, 이게 문제입니다. 심지어 이게 제일 큰 문제죠.... 저 같은 인간은 차라리 아무 말 않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게 낫다는 걸 잘 압니다. 그렇게 입다물고 앉아 있으면 오히려아주 분별 있어 보이는데다, 속으로 이것저것 생각도 해볼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말을 하는 편이 낫겠군요. 제가 이렇게 입을 연 까닭은 당신이 그처럼 아름다운 눈으로 저를 바라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참으로 아름다운 얼굴을 가지셨습니다! 어제 저는 아글라야 이바노브나에게 저녁 내내 잠자코 있겠다고 약속했습니다." - P420

"그게 정말이오?" 노인이 빙긋이 웃었다.
"하지만 이따금 그런 제 생각이 틀린 게 아닌가 싶을 때도 있어요.
진실성이라는 건 제스처만큼이나 가치가 있잖습니까. 그렇지요? 그렇죠?"
"때로는요."
"저는 모든 걸 설명드리고 싶습니다. 모든 것, 모든 것, 모든 것을 말입니다! 오,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저를 유토피아주의자라고 생각하시지요? 이념가라고 생각하시지요? 오, 아닙니다, 맹세코 아닙니다. 제생각은 모두 지극히 단순한 것들입니다. 믿지 않으십니까? 웃으시나요? 아십니까, 저는 때로는 비열하기도 한 인간입니다. 믿음을 잃어버리니까요. 아까도 이리로 오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음, 그 사람들과 어떻게 말을 시작할까? 그들이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하려면 무슨말부터 시작해야 할까?‘ 얼마나 염려가 되던지요. 하지만 무엇보다 여러분이 염려됐습니다. 끔찍이 끔찍이도 말입니다! 하지만 대체 제가어떻게 염려할 수가 있었을까요. 제가 염려를 하다니 저 스스로 부끄러뭐해야 하지 않았을까요? 한 명의 선구자에 대해 무수히 많은 뒤처진자들, 적의를 품은 못난이들이 있다고 해서, 그게 대체 어쨌던 말입니까? 그리고 제가 지금 이처럼 기뻐하는 이유는, 이들이 결코 생명을 다한 거대한 무리가 아니라, 모두가 삶으로 충만한 살아 있는 소재들임을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스꽝스러운 존재들이라고 해서 당황할 필요는 조금도 없습니다. 그렇잖습니까? 사실 그렇죠, 우리는 우스꽝스럽고, 경솔하고, 나쁜 습관에 젖어 있고, 권태로워할 뿐만 아니라,
무엇을 제대로 볼 줄도 모르고 이해할 줄도 모릅니다. 우리는 모두가제4부 421 - P421

그런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이나, 저나, 그들이나, 모두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제가 맞대놓고, 여러분이 우스꽝스러운 사람들이라고 말해도 조금도 모욕을 느끼지 않으시잖습니까? 그러니 여러분은 그야말로 삶으로 충만한 소재가 아니겠습니까? 아십니까. 제 생각으론,
우스꽝스럽다는 것은 때에 따라선 오히려 좋은 일이며, 그편이 오히려낫습니다. 서로를 더 빨리 용서하고 더 빨리 화해할 수 있으니까요. 한꺼번에 모든 것을 이해할 순 없고, 완전한 상태로부터 바로 시작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완전함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그전에 많은 것을 이해하지 못한 채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너무 빨리 이해하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이런 말을 하는 까닭은, 여러분이 이미 그토록 많은 것을 이해했고 또…………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 그저 여러분을 염려하는 게 아닙니다. 저같은 애송이가 여러분에게 이런 말을 한다 해서 화를 내진 않으시겠지요? 웃으시는군요, 이반 페트로비치. 당신은 제가 그 사람들을 염려하고있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그들의 대변자이고, 민주주의자이고, 평등을 부르짖는 웅변가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는 경련 같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끊임없이 환희에 찬 짧은 웃음소리를 냈다.) "저는 여러분을, 여러분 모두를, 그리고 우리 모두를 함께 염려하고 있습니다. 저자신도 유서 깊은 가문의 공작이고, 저와 같은 공작들과 함께 자리하고있으니까요.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까닭은 우리 모두를 구하기 위해서이며, 우리 계급이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 채 모든 것을 두고 서로 말다툼만 하다가 모든 것을 잃고 헛되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지 않도록 하기위해서입니다. 선구자와 지도자로 남을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다른 - P422

계급들에게 자리를 내주고 사라져야 하겠습니까? 선구자가 됩시다. 그러면 지도자도 될 수 있습니다.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 우선 하인이 됩시다. "*그는 의자에서 벌떡벌떡 일어서려고 했으나 그때마다 노인이 꽉 붙들었는데, 하지만 노인 역시 점점 더 불안해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들어보십시오! 말만 하는 것은 좋지 않다는 걸 잘 압니다. 곧바로본보기를 보여주는 게, 곧바로 시작하는 게 더 낫지요...... 그래서 저는 이미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과연 정말로 불행할 수가있을까요? 오, 제게 행복을 누릴 힘이 있다면, 저의 괴로움이며 저의 불행이 대체 무엇이겠습니까? 아십니까, 저는 정말 이해할 수가 없어요.
한 그루의 나무 옆을 지나갈 때, 그 나무를 보고 있다는 것에 행복감을느끼지 않고 대체 어떻게 그냥 지나갈 수가 있을까요? 어떤 사람과 얘기할 때, 그 사람을 사랑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떻게 행복을 느끼지 않겠습니까! 오, 저는 그저 제대로 표현할 줄 모릅니다만…………… 가장 타락한 사람의 눈에조차 아름답게 여겨질 그런 아름다운 것들이 이 세상곳곳에 얼마나 많은지요? 어린아이를 보십시오, 신의 선물인 노을을보십시오, 자라나는 한 포기 풀을 보십시오, 여러분을 바라보며 여러분을 사랑하는 눈들을 보십시오......"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이미 한참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노인은 이제 겁먹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리자베타 프로코피예브나가 제일 먼저 눈치채고는, "아아, 하느님!" 하고 소리치며 손뼉을 탁  - P42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보살폈으며, 시인과 학자, 시민적인 활동가로서의 그의 명성에신경을 쓰느라 몇 날 며칠 밤을 잠 못 이루기도 했다. 그녀는그를 고안해 냈고, 직접 나서서 자신의 고안물을 실제로 믿어버렸다. 그는 그녀의 어떤 몽상과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그 때문에 그에게 정말로 많은 것을, 가끔 노예와 같은 복종까지 요구했다. 또 그녀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뒤끝이 많은 성미였다. 내친김에 일화 두 개를 더 이야기하겠다. - P2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연민은 로고진 자신을 깨우쳐주고 가르쳐줄 것이다. 연민이야말로 모든 인류의가장 중요하고, 어쩌면 유일한 생존법칙이니까. 오, 그는 로고진 앞에얼마나 용서받지 못할 죄를, 얼마나 비열한 죄를 지었는가!  - P41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로 맨 마지막 순간에 그 여자가 나타나서 그의 운명 전부를 마치 삭아버린 실오라기처럼 끊어놓을 거라고 늘 생각해왔을까? 지금 비록거의 반섬망 상태이긴 했으나, 그는 자신이 언제나 그렇게 생각해왔다는 사실을 맹세라도 할 수 있었다. 최근 들어 그가 그 여자를 잊으려고 애썼다면, 그건 오로지 그 여자가 두려워서였다. 대체 어찌된 것일까, 그는 그 여자를 사랑한 것일까, 증오한 것일까? 그는 오늘 이 질문을 자신에게 한 번도 던지지 않았다. 이 문제에서 그의 마음은 깨끗했다. 그는 자신이 누구를 사랑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두 여인의 만남 자체도, 그 만남의 기이함도, 자기로서는알 수 없는 그 만남의 이유도, 어떤 식으로든 거기서 내려지게 될 결정도 아니었다 그는 무엇보다 나스타시야 필립포브나 자체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신열과 우울감에 몇 시간 시달리고 나서 그의 기억에 남은 것은 별로 없었지만, 열병에 걸린 것 같던 이 몇 시간 동안 거의 쉴새없이 자신의 눈앞에 그녀의 눈과 시선이 어른거리고, 그녀의 말이어떤 이상한 말이 귓가에 울리던 것을 그는 며칠이 지난 뒤에야 떠올렸다. 하지만 그 밖의 것은 기억이 거의 없어서, 이를테면 베라가 식사를 내온 것도, 자신이 식사한 것도 거의 기억하지 못했고, 식사하고•나서 잠을 잤는지 안 잤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이날 저녁자기가 모든 것을 분명히 식별하기 시작한 건, 아글라야가 느닷없이 테라스로 들어와서 그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를 맞으러 방 한가운데로 걸어나갔던 순간부터라는 것만 알고 있었다. 그때가 일곱시 십오분이었다. 아글라야는 혼자였고, 급히 서둘러 나온 듯 간편한 옷차림에두건이 달린 가벼운 외투를 걸쳤다. 얼굴은 아까처럼 창백했지만, 눈에 - P442

선 선명하고 날카로운 빛이 번쩍였다. 그녀가 이런 눈빛을 한 것을는 지금껏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주의깊게 그를 훑어보았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계시군요." 침착한 듯이 들리는 목소리로 그가 나직이 말했다. "옷도 다 입었고 모자를 손에 들고 계신 걸 보니, 누가미리 알려준 모양인데, 누군지 알아요. 입폴리트죠?"
렸다.
"네. 그 사람이 말해주더군요......" 공작은 반쯤 사색이 돼서 중얼거
"그럼 가요. 반드시 함께 가야 한다는 걸 아실 테니까. 외출할 만한기력은 있겠죠?"
"기력은 있지만...... 정말 이래도 될까요?"
그는 한순간에 말문을 닫고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한마•디가 이성을 잃은 이 아가씨를 저지해보려는 유일한 시도였고, 그런 다음엔 그저 노예처럼 그녀의 뒤를 따라나섰다. 머릿속이 온통 흐릿했지만, 자기가 없어도 그녀는 그곳에 갈 테니까 어차피 그녀 뒤를 따라갈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도 이해하고 있었다. 그녀의 결심이 얼마나 단호한지 짐작했던 것이다. 이 맹렬한 충동을 저지할 힘이 그에겐 없었다. 그들은 묵묵히 걸었고, 길을 가는 내내 거의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그녀가 길을 잘 안다는 사실을 알아챘을 뿐이었다. 여기는길이 더 황량하니 조금 멀지만 어떤 골목길로 돌아가자고 그가 제안하자, 그녀는 주의를 기울이는 척하며 끝까지 다 듣고 나서, 매한가지예요‘라고 자르듯이 대답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미 다리야 알렉세예브나의 집(크고 오래된 목조건물이었다) 바로 앞에 거의 다다랐을 때, 화려하게 차려입은 어느 귀부인이 젊은 처녀를 데리고 현관 앞 바깥계단 - P443

"내가 그럴 이유가 뭐 있죠?" 나스타스야 필립포브나가 보일락 말락하게 웃었다.
"당신은 내 상황을 이용하려는 거예요∙∙∙∙∙∙ 내가 당신 집에 와 있으니까." 아글라야는 우스꽝스러울 만큼 서투르게 말을 이어갔다.
이 상황은 당신 탓이지, 내 탓이 아녜요!" 나스타시야 필립포브니가갑자기 발끈했다. "내가 당신을 부른 게 아니라, 당신이 나를 부른거니까요 게다가 왜 부른 건지 나는 아직도 모른다고요."
아글라야는 오만하게 고개를 번쩍 들었다.
"말조심해요. 나는 당신의 그 무기를 가지고 당신과 싸우러 온 게 아니니까....."
"아하! 그러니까 어쨌든 ‘싸우러 온 거로군요? 저런, 나는 그래도 당신이 좀더 똑똑한 분인 줄 알았는데…………"
두 여인은 이제 증오를 숨기려고도 하지 않고 서로를 노려보았다.
이들 중 한 여인은 바로 며칠 전까지도 다른 한 여인에게 그와 같은 편•지를 써 보낸 장본인이었다. 그런데 첫 만남에서, 그것도 첫마디와 함께 그 모든 것이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대체 어찌된 영문일까? 지금 이 순간 이 방에 있는 네 사람 중 어느 누구도 이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눈치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공작도 지금은 마치 이 모든 것을 벌써 오래전부터예감해온 듯이, 그저 멍하니 선 채 바라보며 듣고 있었다. 너무나도 환상적인 꿈이 갑자기 더없이 선명하고 날카로운 형태를 띠고서 현실로탈바꿈한 것이다. 이 순간 이 여인 중 한 명은 다른 한 명을 이미 극도로 경멸할뿐더러 그것을 상대방에게 모조리 말해주려고 잔뜩 바르고 - P446

있었기 때문에(이튿날 로고진이 말했듯이, 어쩌면 오직 이 목적을 위해온 건지도 몰랐다). 그 다른 여인이 제아무리 기발한 상상력을 지녔다곤 하나 머릿속이 헝클어지고 마음이 병든 상태에서는 설사 모든 것을 미리 각오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자기 경쟁자의 독기 품은, 순전히여성적인 그 모멸을 결코 버텨내지 못했을 것이다. 공작은 나스타시야필립포브나 쪽에서 먼저 그 편지 얘기를 꺼내진 않으리라 확신하고 있있다. 그녀의 번쩍이는 눈빛만 봐도, 이제 그 편지가 그녀에게 어떤 대가를 치르게 할 수 있는 것인지 족히 짐작이 갔다. 하지만 그는 지금아글라야 쪽에서도 그 얘길 꺼내지 않는다면, 자기 삶의 절반이라도 내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아글라야는 갑자기 정신을 가다듬고 한순간에 자신을 통제하는 듯했다.
"그건 당신이 잘못 생각했어요." 그녀가 말했다. "나는 당신과....
싸우러 온 게 아녜요, 그렇다고 뭐 당신을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요 내가..... 내가 당신에게 온 건………… 인간적인 얘길 하고 싶어서예요. 당신에게 만나자고 했을 때, 나는 이미 당신에게 무슨 말을 할지 결심한상태였고, 설사 당신이 나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그 결심에서•물러설 생각은 전혀 없어요. 나를 이해하지 못해서 더 불리해지는 건내가 아니라 당신이니까요. 나는 당신이 보낸 편지에 대답하고 싶었어& 그것도 구두로 직접, 왜냐하면 그러는 편이 더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럼 당신의 편지에 대한 내 대답을 잘 들어주세요 나는 레프니●에서 벌어진 모든 일을 나중에 알게 된 그때부터, 공작을 가엾게 여기콜라예비치 공작과 처음 인사를 나눈 바로 그날, 그리고 당신의 야회 - P447

서 나는 기다리기 시작했어요. 당신이 틀림없이 이곳으로 올 거라 생각했던 거죠, 당신은 페테르부르크가 아니면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니까요 당신은 시골에 파묻혀 있기엔 아직 너무나 젊고 아름답거든요..…………하지만 이것 역시 내 말이 아녜요." 그녀는 이렇게 덧붙이면서 얼굴을몹시 붉혔는데, 이 순간부터 마지막 말이 끝날 때까지 그녀의 얼굴에선붉은빛이 잠시도 떠나지 않았다. "내가 다시 공작을 만나봤을 때는, 공작을 위해 너무나 마음이 아프고 화가 났어요. 웃지 마세요. 만일 당신이웃는다면, 그건 당신이 이런 심정을 이해할 자격이 없다는 증거예
"보시다시피 나는 웃고 있지 않아요." 나스타시야 필립포브나가 서글프고도 엄격한 어조로 말했다.
"하긴 나하곤 상관없는 일이죠, 웃고 싶으면 웃으세요. 여하튼 내가•저분한테 직접 물어보자, 그러시더군요, 이미 오래전부터 당신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 당신에 대한 기억만으로도 괴롭다. 하지만 당신이 가없고, 당신을 떠올리면 심장이 ‘영원히 꿰뚫리는 듯한 기분이다. 라고요. 당신에게 한마디 더 해둬야겠군요. 나는 공작만큼 고결하고 순박한마음과 타인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지닌 사람을 평생 한 번도 본 적이없어요. 공작의 말을 듣고 나는 깨달았어요, 누구든 마음만 먹으면 저분을 속일 수 있고, 저분을 속인 자가 누구든 간에 저분은 나중에 모두용서해줄 거라고 말이죠. 바로 그 때문에 나는 저분을 사랑하게 된 거예요......"
말을 할 수 있었다는 게 스스로도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나아글라야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잠시 말을 멈췄는데, 자기가 이런 - P449

지 했다. 그녀가 예브게니 파블로비치의 추측대로 시를 많이 읽은 여자이든, 아니면 공작이 믿는 대로 그저 머리가 돈 여자이든 간에 어쨌거나 그녀는 이따금 아주 냉소적이고 뻔뻔한 태도를 보이긴 해도-실제로는 남들이 판단하는 것보다 훨씬 더 수줍음이 많고 상냥하고 사람을 잘 믿는 여자였다. 물론 그녀에겐 문학적이고 몽상적이고 자폐적이고 공상적인 면이 많았지만, 그 대신 굳세고 깊이 있는 면도 적지 않았다… 공작은 이 점을 이해하고 있었다. 고통의 빛이 그의 얼굴에 떠올랐다. 아글라야는 그것을 알아채고, 증오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당신이 어떻게 감히 나한테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죠?" 그녀는 말할 수 없이 거만한 태도로 나스타시야 필립포브나에게 반문하며 소리쳤다.
"내 말을 잘못 들은 모양이군요." 나스타시야 필립포브나가 놀라서말했다. "내가 당신한테 어떻게 얘기했기에요?"
"당신이 떳떳한 여자가 되고 싶었다면, 왜 그때 자신의 유혹자인 토츠키를 깨끗이..………… 그따위 연극 흉내 같은 짓을 하지 않고, 깨끗이 버리지 못했죠?" 갑자기 아글라야는 뜬금없이 이렇게 쏘아붙였다.
"당신이 내 처지를 얼마나 안다고 감히 나를 심판하는 거죠?" 나스타시야 필립포브나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당신이 일하러 갈 생각은 않고, 타락한 천사 흉내를 내겠다고 돈 많은 로고진과 함께 달아났다는 걸 나는 알아요. 그 타락한 천사 때문에•토츠키가 권총 자살을 하려 했다는 것도 놀랄 일이 아니죠!"
"그만둬요!" 나스타시야 필립포브나는 혐오감에 차서 가까스로 고통을 억누르며 말했다. "당신은 마치....
요전에 약혼자와 함께 치안 - P452

워한다는 증거예요. 자기가 두려워하는 사람을 경멸할 순 없죠. 정말,
내가 당신을 존경하고 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심지어 바로 지금까지도! 그런데 당신이 왜 나를 두려워하는지, 지금 당신의 주된 목적이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나요? 당신은, 저분이 당신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지 어떤지, 그걸 자기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던 거예요, 당신은 지독히도 질투심이 강한 여자니까....."
"저분은 나한테 이미 말했어요, 당신을 증오한다고......" 아글라야는간신히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럴지도 몰라요, 그럴지도, 나는 저분의 사랑을 받을 가치가 없는여자니까, 다만...... 다만 당신이 한 말은 거짓말이에요. 그럼요! 저분은 나를 증오할 수 없어요. 저분이 그런 말을 했을 리가 없어요! 하지만나는 당신을 용서해줄 용의가 있어요.... 당신 입장을 고려해서.....
다만 나는 그래도 당신을 더 좋게 생각해왔어요. 당신이 좀더 현명하고좀더 아름답기까지 한 아가씨인 줄 알았죠, 맹세코!..
자, 어서 당신의 보물을 가져가요... 저기 저분, 당신을 바라보며 정신을 못 차리고 있군요, 어서 당신이 가져요, 하지만 조건이 있어요. 당장 여기서 나요! 지금 당장!......"
그녀는 의자에 털썩 쓰러져서 눈물을 펑펑 쏟았다. 그러나 갑자기뭔가 새로운 것이 그녀의 눈에서 번쩍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아글라야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뚫어져라 쏘아보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네가 정 원한다면, 지금 당장..
명-령-하-겠-어,
알아들어? 내가 저이에게 명령 - 하기만 하면, 저이는 너 따윈 당장 걷어차버리고 영원히 내 곁에 남을 거야, 그리고 나와 혼인할 거라고, 그 - P454

워한다는 증거예요. 자기가 두려워하는 사람을 경멸할 순 없죠. 정말,
내가 당신을 존경하고 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심지어 바로 지금까지도! 그런데 당신이 왜 나를 두려워하는지, 지금 당신의 주된 목적이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나요? 당신은, 저분이 당신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지 어떤지, 그걸 자기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던 거예요, 당신은 지독히도 질투심이 강한 여자니까....."
"저분은 나한테 이미 말했어요. 당신을 증오한다고……………" 아글라야는간신히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럴지도 몰라요, 그럴지도, 나는 저분의 사랑을 받을 가치가 없는여자니까, 다만...... 다만 당신이 한 말은 거짓말이에요, 그럼요! 저분은 나를 증오할 수 없어요. 저분이 그런 말을 했을 리가 없어요! 하지만나는 당신을 용서해줄 용의가 있어요...... 당신 입장을 고려해서…………다만 나는 그래도 당신을 더 좋게 생각해왔어요. 당신이 좀더 현명하고좀더 아름답기까지 한 아가씨인 줄 알았죠. 맹세코!...... 자, 어서 당신의 보물을 가져가요..... 저기 저분, 당신을 바라보며 정신을 못 차리고 있군요, 어서 당신이 가져요. 하지만 조건이 있어요. 당장 여기서 나가줘요! 지금 당장!......"
그녀는 의자에 털썩 쓰러져서 눈물을 펑펑 쏟았다. 그러나 갑자기뭔가 새로운 것이 그녀의 눈에서 번쩍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아글라야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뚫어져라 쏘아보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네가 정 원한다면, 지금 당장...... 명령 - 하 -겠-어, 알아들어? 내가 저이에게 명령 - 하기만 하면, 저이는 너 따윈 당장 걷어차버리고 영원히 내 곁에 남을 거야, 그리고 나와 혼인할 거라고 그 - P454

고함을 질러댔는데, 분명 자신의 이런 호언장담을 털끝만큼도 믿지 않는 눈치였지만, 한편으로는 단일 초라도 이 순간을 늘이면서 자기 자신을 속이고 싶어하는 게 분명했다. 그녀의 흥분이 너무나도 격렬해서•저러다 죽어버리는 게 아닐까 걱정될 지경이었다. 적어도 공작에겐 그렇게 여겨졌다. "저기에 그이가 서 있어, 잘 봐!" 마침내 그녀는 손으로공작을 가리키며 아글라야에게 소리쳤다. "저이가 지금 너를 버리고 내게 다가와 나를 잡아주지 않는다면, 그땐 네가 저이를 갖는 거야, 내가양보하겠어, 그런 사람은 필요 없으니까!......"
그녀도 아글라야도 무언가를 기다리는 표정으로 제자리에 멈춰 서서, 둘 다 미친 사람처럼 공작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이 도전적인말이 갖는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아니, 분명히 그렇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는 다만 자기 눈앞에서, 미치광이와도 같은 절망적인 얼굴을 볼 뿐이었다. 그것은 언젠가 그가 아글라야에게 말한 것처럼 그의 ‘심장을 영원히 꿰뚫어버린 얼굴이었다. 그는 더이상 견딜수가 없어서, 나스타시야 필립포브나를 가리키며 애원과 책망이 뒤섞인 어조로 아글라야에게 말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이 여자는...... 너무나 불행한 사람 아닙니까!"
하지만 그는 겨우 이렇게 말했을 뿐, 아글라야의 무서운 시선을 받고는 그대로 벙어리가 돼버렸다. 그녀의 시선 속에는 너무나도 극심한고통과 동시에 한없는 증오가 서려 있어서, 그는 두 손바닥을 탁 치고소리를 지르며 그녀에게 달려갔다. 그러나 이미 때늦은 일이었다! 그•녀는 그가 한순간이나마 동요하는 모습을 참을 수 없던 나머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아아, 하느님!" 하고 외치고는 그대로 방에서 뛰쳐 - P456

나갔다. 로고진이 집 현관문의 빗장을 열어주려고 그 뒤를 쫓아나갔다.
공작도 쫓아나갔으나, 문지방에서 누군가의 두 팔이 그를 부둥켜안았다. 절망에 일그러진 나스타시야 필립포브나의 얼굴이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고, 새파래진 입술이 달싹거리며 이렇게 물었다.
그 여자를 쫓아갈 건가요? 그 여자를?......"
그녀는 의식을 잃고 그의 팔 안에 쓰러졌다. 그는 그녀를 안고 방으로 데려가 안락의자에 앉히고는 희미한 기대를 품은 채 그녀를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탁자 위에는 물이 든 컵이 놓여 있었다. 방에 돌아온로고진이 그것을 집더니, 그녀의 얼굴에 물을 끼얹었다. 그녀는 눈을떴으나, 일 분가량은 뭐가 뭔지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주위를 둘러보고 몸을 부르르 떨더니 소리를 내지르며 공작에게 몸을 던졌다.
"당신은 내 거야! 내 거!" 그녀가 외쳤다. "그거만한 아가씨는 가버
"렸나? 하-하-하!" 그녀는 발작적으로 웃어댔다. "하-하-하! 하마터면이 사람을 그 아가씨한테 내줄 뻔했어! 하지만 왜? 뭐 땜에? 내가 미쳤던 거지! 미쳤던 거야!...
넌 썩 꺼져버려, 로고진, 하-하-하!"
로고진은 그들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아무 말 없이 모자를 집어들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십분 뒤 공작은 나스타시야 필립포브나 곁에앉아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그녀를 바라보며, 마치 어린아이한테 하듯이 두 손으로 그녀의 머리와 얼굴을 어루만져주고 있었다. 그녀가 옷으면 그도 웃고, 그녀가 울면 그도 따라 울먹였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않고 묵묵히, 그녀의 발작적이고 환희에 들뜨고 두서없는 웅얼거림에열심히 귀를 기울였는데, 무슨 말인지 거의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그저제4부 457 - P45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