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들은 거의 겁을 먹은 모습으로 옆에 서 있었고, 장군은 그야말로얼이 빠진 상태였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놀란 얼굴이었다. 좀 멀찌감치 서 있던 몇 사람은 몰래 킥킥대며 소곤거리고 있었다. 레베제프의얼굴은 감격의 절정에 이른 표정이었다.
"난장판과 추태는 말이죠, 마님,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습니다." 레베제프의 조카가 의미심장하게 말했으나, 역시 좀 당황한 듯했다.
"그래도 이런 정도는 아니지! 이런 정도는 아니라고, 이봐, 지금 네놈들이 보여준 것 같은 그런 난장판은 아니란 말이다!" 리자베타 프로코피예브나는 히스테리라도 일으킨 듯 표독스럽게 말을 받았다. "나를좀 내버려두라니까." 그녀는 자기를 말리려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소리쳤다. "아니, 예브게니 파블르이치, 당신 자신이 방금 말한 대로, 심지어 변호인이 법정에서, 가난 때문에 여섯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더 자연스러운 일은 없다고 제 입으로 선언했다면, 이제 정말 말세가 됐군요. 나는 여태 그런 소리를 들어본 적도 없어요. 하지만 이제 나도 모든걸 깨달았어요! 그래, 이 말더듬이 녀석이 과연 사람을 죽이지 못할 것같아요? (그녀는 그저 어리둥절해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부르돕스키를 가리켰다.) 내기를 해도 좋지만, 이 녀석은 사람을 죽이고도 남아요! 이 녀석은 아마 당신의 돈 만 루블을 받지 않을 거예요, 양심의 명령에 따라 받지 않는다는 거겠죠. 하지만 한밤중에 와서 당신을 죽이고 귀중품함에서 그 돈을 꺼내갈걸요. 양심의 명령에 따라 꺼내는거라고요! 이 녀석에겐 그게 비양심적인 일이 아니니까! 이것은 ‘고결한 절망의 폭발‘이라느니, ‘부정‘이라느니, 하고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릴 지껄이겠죠... 쳇! 모든 게 정반대로 뒤집혔고, 모두가 거꾸로 서512 - P514

서 건기 시작했어요. 집안에서 고이 자라던 처녀가 느닷없이 길 한복판에서 마차에 뛰어올라, ‘엄마, 나 며칠 전에 카를르이치인가 이바느이치인가 하는 사람하고 혼인했어요, 안녕히 계세요!‘라고 하는 게, 그래 당신들 생각엔 잘하는 짓인가요? 존경할 만하고 자연스러운 행동인가요? 여성 문제라는 소리인가요? 여기 이 꼬마(그녀는 콜라를 가리켰다), 요 녀석까지도 며칠 전에 바로 그게 ‘여성 문제‘라며 대들더군요.
아니, 아무리 바보 같은 어미일망정, 그래도 사람대접은 해줘야지!
네놈들, 아까 들어올 때 고개를 뒤로 딱 젖힌 그 꼴은 대체 뭐냐? ‘감히가까이 다가오지 마라‘, 우리가 납신다. 이거겠지. ‘우리에게 모든 권리를 내놔라, 감히 우리 앞에서 입을 놀릴 생각도 마라. 우리한테 모든 존경을 표하라, 이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존경까지도 표하라, 하지만 우리는 너를 가상 비천한 하인보다 더 못하게 대할 것이다!‘ 이런 태도였단말이다. 진리를 추구하고 권리를 주장한다면서, 정작 그 기사에선 이사람에 대해 이슬람교도처럼 온갖 중상모략을 했잖느냐 말야. 뭐가 어째? ‘우리는 구걸하는 게 아니라, 요구하는 겁니다. 당신은 우리한테서어떤 감사의 말도 듣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건 당신이 당신 자신의 양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하는 일이니까요!‘라고? 흥, 무슨 그따위도덕이 다 있어! 하지만 만약 너한테서 어떤 감사의 말도 들을 수 없다면, 공작도 너한테 이렇게 대답할 수 있다는 걸 알아둬. 자기는 파블리셰프를 전혀 고맙게 여기지 않는다. 파블리셰프 역시 자신의 양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선행을 한 것뿐이니까, 라고 말이야. 하지만 네놈은 오직 공작이 파블리셰프에게 품은 감사의 정만을 믿고 있었을 뿐이야. 공작은 너한테 돈을 꾼 적도 없고, 너한테 빚을 진 것도 없으니, 공작의 - P515

그럼 아마 이런 말을 더 할 수 있겠죠." 예브게니 파블로비치는 미소지으며 말을 이었다. "체렌치예프 씨, 당신의 동료들로부터 내가 들+모든 것, 그리고 방금 당신이 그토록 의심할 바 없는 재능을 동원해명해준 모든 것은, 내가 보기엔, 권리의 대승리 이론으로 귀결되는같군요, 모든 것을 뒤로 물리치며, 모든 것에 관계없이, 심지어 다른모든 것을 배제하고, 심지어 그 권리라는 것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지조#연구해보지 않으면서 말입니다. 안 그런가요? 혹시 내가 착각하고나요?"
물론 착각이죠, 나는 무슨 얘기인지도 모르겠군요. 그래서요?"
저쪽 구석에서도 투덜거리는 소리가 일었다. 레베제프의 조카는 낮온소리로 뭐라고 중얼댔다.
"아니, 더 할 말은 별로 없습니다." 예브게니 파블로비치가 말을 계다. "내가 지적하고 싶었던 건 다만, 이러한 이론은 곧바로 힘의 권즉 개개의 주먹과 개인적 욕구의 권리로 단번에 비약할 수 있다는니다. 하긴 세상에서 웬만한 일은 대개 그런 식으로 결말이 나곤 했개요 프루동도 힘의 권리에서 멈췄으니까요. 미국전쟁 때에도 가장・보적이라는 많은 자유주의자가 자기들은 농장주의 편이라고 선언했흑인은 어디까지나 흑인의나는 백인의 것이라는 관점에서
"그런데요?"
‘내 말은, 그러니까 당신도 힘의 권리1종보다 열등하며, 따라서 힘의 권프랑스 사회주의자 피에르조제프 프루동 최초로 스이며, 사유재산을 배격하고 정의를 가치의 척도로 삼하진 않겠지요?"
아나키스트라고 칭한 사상고 주장했다.
- P529

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아하, 바로 이럴까봐 염려했다고요! 당신 생각에 ‘분명히 이렇게 될줄 알았다고요? 그럼 잘 알아두시지요, 내가 여기 있는 사람 중에 누군가를 증오한다면, 그는 입에서 거품을 튀기면서 쉰 목으로 쇳소리를 내지르며 울부짖었다. "(나는 당신들 모두를, 모두를 증오해요!)-하지만 당신, 바로 당신, 예수회원의 영혼을 가진 자, 당밀 영혼을 가진자, 백치에, 백만장자에, 자선가인 당신을 이 세상 누구보다 그 무엇보다 가장 증오해요! 나는 오래전에 당신 소문을 들었을 때부터 당신이한사람을 꿰뚫어보고 증오했어요. 내 마음속의 증오를 전부 동원해 당신을 증오해왔단 말예요………… 방금 있었던 일도 죄다 당신이 꾸민 수작이에요! 나를 발작 상태로 몰고 간 것도 당신이라고요! 당신은 죽어가는 사람을 망신시켰어요. 내가 아까 비열하게 소심해졌던 것도 당신,
당신, 당신 때문이라고요! 내가 계속 살게 된다면, 나는 당신을 죽일 거예요! 당신의 선행 따윈 필요 없어요. 나는 누구한테든, 당신 듣고 있나요 누구한테든 아무것도 받지 않겠단 말예요! 아까는 열에 들떠 헛소리를 한 것뿐이니까, 감히 우쭐대지 말라고요!..... 나는 당신네 모두를 증오해요. 영원히!"
그러면서 그는 아예 숨을 쉬지 못하고 헐떡였다.
"아까 눈물을 보인 게 창피해진 거예요!" 레베제프가 리자베타 프로코피예브나에게 소곤댔다. "분명히 이렇게 될 줄 알았습니다!‘라뇨 야아, 정말, 공작님도 대단해요! 마음을 꿰뚫어본 겁니다요......"
하지만 리자베타 프로코피예브나는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녀는 거만하게 허리를 쭉 펴고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서서, 경멸과 호 - P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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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봐, 자네에게 할 말이 있어!" 로고진은 갑자기 활기를 띠고 두 눈을 번쩍이기 시작했다. "어째서 자네는 나한테 그렇게 양보하려고 들지? 나는 그걸 모르겠어. 그 여자에 대한 사랑이 완전히 식은 건가? 전에는 그토록 애타하더니 나도 봤단 말이야. 대체 이번엔 뭐 때문에 죽을힘을 다해 이 페테르부르크로 달려왔나? 연민 때문인가? (로고진의얼굴은 심술궂은 냉소로 일그러졌다.) 헤헤!"
"내가 자네를 속이고 있다고 생각하나?" 공작이 물었다.
"아니, 자네를 믿어, 하지만 뭐가 뭔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가. 가장 확실한 건, 자네의 연민이 나의 사랑보다 훨씬 강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지!" - P384

당장이라도 터져나올 듯한 어떤 증오감이 그의 얼굴에서 활활 타올랐다.
"그런데 자네의 사랑은 증오와 다를 바 없어." 공작은 빙긋이 웃었다.
그 사랑이 사라져버린다면, 그때는 사태가 더 불행해질지도 모르지.
파르폰 형제, 자네한테 말해두고 싶은 건......"
내가 칼부림이라도 할 거라고?"
공작은 몸을 흠칫 떨었다.
‘자네는 지금의 이 사랑 때문에, 지금 자네가 받고 있는 이 모든 고통때문에, 그녀를 몹시 증오하게 될 걸세. 내가 제일 이상하게 여기는 점은 어떻게 그녀가 또다시 자네와 혼인하려 하느냐는 거야. 어제 그 얘기를 들었을 때는 차마 믿어지지 않았고 마음이 몹시 무거웠어. 그녀는 혼례를 눈앞에 두고 이미 두 번이나 자네를 마다하고 달아나지 않았나. 그러니 그녀에게 어떤 예감이 있다는 얘기야!.. 그런 그녀가지금 자네한테서 뭘 바라는 걸까? 자네의 돈? 그건 얼토당토않은 소리지. 게다가 돈이라면 자네가 이미 웬만큼 낭비해버렸을 테니까. 그럼그저 남편이 필요해서? 하지만 남편 될 사람은 자네 말고도 얼마든지구할 수 있어. 누구든 자네보다야 낫겠지. 왜냐하면 자네는 반드시 찔러 죽이고야 말 테니까. 아마 그녀도 이젠 그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을걸세. 아니면 자네가 그녀를 너무나 열렬히 사랑하기 때문에? 하긴 그바로 그런 사랑을 원하는 여자들이 있다고게 이유일 수도 있겠지..
들었으니까.... 다만......" - P385

이온 마음을 다해 기도드리는 것을 하느님이 하늘에서 내려다보시고기뻐하시는 것과 언제나 똑같으니까요‘라고 하는 거야. 이게 그 아낙이내게 한 말이라네. 거의 글자 그대로 그렇게 말했어. 이건 너무나 심오하고 너무나 섬세하고 진정으로 종교적인 사상이야, 그리스도교의 모든 본질이 한데 표현된 그런 사상이란 말일세. 다시 말해, 하느님을 우리의 친아버지로 여기는 해석과, 아버지가 친자식에게 느끼는 기쁨을하느님도 인간에게 느끼고 계시다는 인식이 남김없이 표현된그야말로 그리스도의 가장 중요한 사상이지! 그런데 이걸 말한 게 단순한아낙이었어! 물론, 어머니이지…………… 그리고 누가 알겠나. 어쩌면 이 아낙이 아까 그 병사의 아내인지 말일세. 들어보게, 파르푠, 자넨 아까 나한테 물었지, 이게 내 대답일세, 종교적 감정의 본질은 그 어떤 논증과도 그 어떤 과실이나 범죄와도, 그 어떤 무신론과도 아무 관계가 없네.
여기엔 그런 것들과는 다른 무엇, 그리고 영원히 다를 무엇이 있어. 여기엔 무신론 따위가 영원히 건드릴 수 없으며 영원히 엉뚱한 소리만 하게될 그런 무엇이 있는 거야. 그러나 중요한 점은, 그것이 러시아인의가슴속에서 가장 분명하고 가장 쉽게 발견된다는 사실이라네, 이게 바로 나의 결론이야! 이것이야말로 내가 우리 러시아에서 얻고 있는 가장중요한 신념의 하나지. 해야 할 일이 있네, 파르푠! 우리 러시아땅에서 해야 할 일이 있어, 내 말을 믿어주게! 우리가 모스크바에서 만나 얘기를 나누곤 했던 시절을 떠올려보게..
나는 이번에 이곳으로 돌아•오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네! 이런 식으로 자네와 만나리라곤 정말 꿈에도 생각지 못했어! 뭐, 하지만 어쩌겠나!...... 이만 가보겠네.
잘 있게나! 부디 하느님께서 자넬 버리지 않으시길!" - P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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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는 한번 욕을 내뱉기 시작한 뒤 아무런 저항에 부딪히지 않자,
어떤 종류의 인간들에게서 늘 볼 수 있는 모습처럼, 점차 자제력을 완전히 잃어갔다. 조금만 더 내버려두면 침이라도 뱉기 시작할 정도로그는 이미 미치광이처럼 노기등등했다. 하지만 바로 이 광포한 분노때문에 그는 눈이 멀어 있기도 했다. 그렇지 않았던들 자기가 그토록멸시하는 이 ‘백치‘가 때로는 무언가를 너무도 빠르고 세심하게 이해할뿐더러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게 전달할 줄 안다는 사실에 벌써부터주의를 기울였을 터였다. 그러나 이때 갑자기 뭔가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당신한테 말해둘게 있습니다. 가브릴라 아르달리오노비치." 공작이불쑥 입을 열었다. "나는 전에는 정말로 건강이 매우 안 좋아서 사실 거의 백치에 가까웠습니다. 하지만 이젠 이미 오래전에 회복됐고, 그래서나에게 맞대놓고 백치라고 부르면 조금 불쾌합니다. 당신이 겪고 있는실패를 고려하면 양해해줄 수도 있지만, 당신은 홧김에 벌써 두어 번이나 나한테 욕을 했습니다. 나는 이런 것을 아주 싫어합니다. 특히 당신처럼 처음부터 대뜸 그럴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마침 우리는 네거리에와 있으니, 여기서 헤어지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당신은 오른쪽으로해서 집에 가고, 나는 왼쪽으로 가겠습니다. 수중에 25루블이 있으니,
가구 딸린 여관방 정도는 아마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가냐는 몹시 당황했고, 수치심에 얼굴이 시뻘게지기까지 했다.
"용서해주십시오, 공작." 그는 욕설의 말을 지극히 공손한 말씨로 -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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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얼마나 자주 책장에 꽂힌 문고본들로 돌아가라스티냐크와 펠리시 카르도와 보트랭과 함께 시간을 보냈던가. 지금 보트랭은 어디 있지?" 언젠가 어머니는 잠에서 막 깨어나, 누구와 대화하는지도 모르는지 비몽사몽 상태로 내게 물었다. 아서 코난 도일은 발자크의 소설을 절대로 읽지 않는다고,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주요 인물들이 어디에서, 언제 처음 등장하는지 찾기도 너무 어렵다고 말했다한다. 하지만 어머니는 ‘인간 희극‘ 총서 전체를 꿰고 있었다.
나는 그 총서 가운데 어느 책에서 어머니가 기록되지 않은 자기 삶을 발견했을지 궁금해졌다. 그 소설들 속 흩어진 인물들중 누구의 인생을 통해 어머니는 자기 자신을 더 분명히 이해할 수 있었을까? 어머니는 ‘인간 희극‘에서 「소의 무도회에는라스티냐크가 나오지 않으며, 그럼에도 끊임없이 언급된다는사실을 알고 있었을 터였다. 나는 충동적으로 「소의 무도회」를 책장에서 꺼내 훑어보았다. 그런데 122쪽과 123쪽 사이에누군가 손으로 그린 지도가 꽂혀 있었다. 가로 15센티미터, 세로 20센티미터 종이에, 백악 언덕처럼 보이는 것이 그려져 있었다. 지명은 적혀 있지 않았다. 아무 의미 없는 종잇조각일지도 모른다. - P230

그러다 마시의 가족이 다시 누워 있는 그를 날라서 수레에태워 사라졌다. 로즈의 집 안에 다시 정적이 들어찼다. 이후몇 달 동안 로즈와 부모는 펠론가 남자들이 새로 둥지를 틀숲을 발견한 까마귀들처럼 멀리 떨어진 마을로 가서 또 다른집 지붕을 고치고 있다는 소식을 왕왕 들었다. 그러나 막내마시는 자유 시간만 주어지면 절뚝이는 걸음걸이를 고치려고노력했다. 어둠 속에서 깨어나 자기 가족이 이엉을 올린 집들을 지나쳐 걸어가거나, 어둠이 흩어지고 새들이 지저귀는 리버 밸리로 내려가곤 했다. 마시 펠론은 바로 그렇게 긴장감이흐르는 새로운 빛이 번지는 시간에 대한 묘사를 책에서 찾기시작했다. 작가들이 줄거리에서 벗어나 그처럼 특별한 시간을묘사하려 하는 걸 보면 이 역시 작가들의 어린 시절 기억에서나온 게 아닐까 싶었다. 그는 저녁마다 책을 읽는 습관이 생겼다. 책을 읽는 동안에는 형들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엉을 엮고 이는 기술을 알면서도 자신은 가족과는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 P237

마시 펠론이라는 사람은 주변 세상을 공부하고 흡수하고 싶어 했다. 이 년 뒤 청년이 된 그를 다시 만난 로즈의 가족은 마시를 못 알아볼 뻔했다. 주위를 조심스럽게 지켜보는 태도는 여전했지만, 벌써 진중해졌고, 더 넓은 세상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알고 싶은 호기심에 찬 사람으로 바뀌어 있었다. 로즈의 부모는 그가 어린 시절 부상을 입고 고독을 누렸을 때처럼 그를 다시금 거둬 주었다. 그의 총명함을 알아보고 대학 교육에 드는 비용을 지원해 주기로 한 것이다. 그는자기 가족을 근본적으로 떠난 셈이었다. - P238

두운 도로를 따라 차를 몰다가 옆자리에 앉은 그의 담뱃불을붙여 주느라 희끗한 손이 속도계 아래에서 황금빛으로 빛날때, 팰론은 그녀를 욕망했다. 그녀의 구석구석을 그녀의 입,
귀, 푸른 눈, 허벅지의 떨림, 걷어 올려진 채 구겨진 치맛자락까지 그를 만족시키기 위해 그런 걸까? 그는 자신의 손이그런 부위에 있기를 바랐다. 그러한 떨림을 제외한 모든 것이머릿속에서 빠져나갔다.
그가 자신에게 용납하지 않은 한 가지는, 그녀에게 어떻게보일까 하는 생각이었다. 여느 때 같았으면 지성이든 인품이든 자신의 무엇인가가 여자를 끌어당겼다면 그걸로 그녀를 유혹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단순한 남자로서 유혹하기는 불가능했다. 그는 자신이 늙었다고 느꼈다. 망설임도 동의도 없이 그녀를 집어삼킬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생각에 잠긴 그의 눈동자뿐이었다.
그렇다면 로즈, 내 어머니는? 그녀는 무엇을 느꼈을까? 펠론이 그녀를 이 모험으로 끌어들인 걸까, 아니면 그 반대였을까? 여전히 모르겠다. 나는 그들이 선생과 학생으로서 이 떨리는 우주에 들어섰다고 믿고 싶다. 이는 단지 육체적인 사랑과 욕망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을 둘러싼 일과 관련된 기술과 가능성들을 아우르는 문제였다. 서로 연락이 끊어지면퇴각하는 방법. 열차에서 상대방이 찾을 수 있을 만한 곳에무기를 은닉하는 기술, 사람에게서 비이성적인 반응을 끌어내기 위해 부숴야 하는 손뼈나 얼굴뼈. 이런 모든 것, 더 나아가어둠 속에서 둘 사이에 모스 부호가 교신된 듯이 그녀가 깨어나기를소망하는 그의 바람. - P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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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하룻밤 자자"
그녀가 말했다. 개들이 몸을 웅크리고 잠들자 우리는 옆 바닥에 누워 잤다. 우리를 둘러싼 동물들이 우리가 동경하던 삶이자, 우리가 원하던 친구이며, 그 시절 런던에서 불필요하고도필수적이며 사람들에게 잊히지 않은 자연적이고 인간적인 순간이라는 듯이 깨어나 보니 개 한 마리가 갸름한 얼굴을 내 얼굴 옆에 누인 채 꿈속을 분주히 돌아다니며 차분히 숨 쉬고 있었다. 그러다 잠에서 깬 나의 숨소리가 달라졌음을 알아차리고눈을 뜨더니, 자세를 바꾸고는 앞발을 내 이마에 살짝 내려놓았다. 나를 향한 세심한 연민이나 우월감을 뜻하는 제스처 같았다. 그 손짓이 지혜롭게 느껴졌다.
"넌 어디서 왔어? 어느 나라? 말해 줄래?"
나는 녀석에게 물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애그니스가 옷을입은 채 주머니에 두 손을 꽂아 넣고 서서 내가 하는 행동을지켜보며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榮輝월즈엔드의 애그니스. 애그니스 스트리트의 애그니스 밀힐의 애그니스 칵테일 드레스를 잃어버렸다던 라임버너 야드의 애그니스. 내 삶에서 이 부분은 화살도 나방도 공유해서는안 된다는 사실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부모님이 사라진후 내가 살아가는 세상이 있었다. 그리고 애그니스의 세상은내가 홀로 도피하는 곳이었다. - P119

그는 애그니스의 부모님과도 잘 지냈지만 애그니스를 굉장히 좋아했다. 그래서 나도 애그니스를 사랑하게 되었다. 화살의 눈으로 그녀의 이런저런 측면들을 인식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는 사람들의 면면을 재빨리 파악하는 능력이 있었다. 식사 후 애그니스는 우리를 배웅하러 아파트 계단을 함께 내려가 차 앞까지 갔다. "그럼 그렇지! 저번에 개들을 데려왔던 그모리스네!" 화살에게 아버지 행세를 시키면서 내가 느꼈던 초조함은 그녀의 한마디에 잦아들었다. 그날 이후로 애그니스와나는 내 아버지의 과장스러운 예의를 언급하며 킥킥거리곤 했다. 그래서 나는 이 가짜 아버지가 빌린 바지선을 누나와 함께타고 강을 떠다닐 때면 우리 셋이 그럴듯한 가족으로 보이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 P139

화살은 신문이나 개 경주 소식지를 볼 때면 다리를 꼬고앉아 한쪽 허벅지 위에 종이를 펼쳐 놓고 피곤한 사람처럼 한손으로 머리를 괴고 있었다. 늘 똑같은 자세였다. 어느 날 오후 배를 탈 때 애그니스가 일요 신문의 흥미진진한 기사들에파묻혀 있는 화살을 스케치하는 것 같길래, 나는 일어나서 그녀 뒤를 지나쳐 걸어가며 그림을 흘긋 내려다보았다. 폭풍이불던 날 정육점 포장지에 그려 준 그림을 제외하고 내가 본 그녀의 유일한 그림이었다. 그런데 내 생각과 달리 그림에 담긴사람은 화살이 아니라 나였다. 무언가 혹은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는 청년. 자기 자신을 아는 데는 그다지 관심이 없고 타인들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그 사람이 내 진짜 모습, 혹은미래의 내 모습인 듯했다. 그때도 나는 그 그림이 진실을 담고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건 나를 그린 그림이 아니라 나에 대해 그린 그림이었다 -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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