벙어리처럼 그녀 앞에 말없이 서 있던 공작은 갑자기 얼굴이 새파래졌다. "그런 말을 들을 가치가 있는 사람은 여기에 아무도 없어요!" 아글라야가 폭풍처럼 퍼부어댔다. "여기 있는 사람은 죄다, 죄다, 당신의 새끼손가락만도 못하단 말예요, 당신의 지혜, 당신의 마음씨에 죄다 미치지 못한다고요! 당신은 누구보다 정직하고, 누구보다 고결하고, 누구보다 훌륭하고, 누구보다 선량하고 누구보다 현명해요!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당신이 방금 떨어뜨린 손수건을 몸을 굽혀 주워들 자격조차 없어요...... 대체 무엇 때문에 당신은 자신을 비하하고, 누구보다 낮은 위치에 자신을 세우는 거죠? 어째서 당신 내면에 있는 모든 것을 왜곡하는 거예요. 어째서 당신에겐 자부심이란 게 없냐고요?" "맙소사, 재가 미친 거 아냐?" 리자베타 프로코피예브나는 손뼉을 탁쳤다. "가난한 기사! 만세!" 콜랴가 열광해서 외쳤다. "잠자코 계세요!.. 다들 어떻게 감히 나를 여기서, 어머니 집에서모욕하냐고요!" 아글라야는 느닷없이 리자베타 프로코피예브나에게대들었는데, 이미 그 무엇도 신경쓰지 않고 앞을 막는 건 전부 뛰어넘으려는 히스테리 상태에 빠져 있었다. "왜 다들, 다들 하나같이 나를 괴롭히냔 말예요! 공작, 왜 저 사람들은 이 사흘 내내 당신 때문에 나를귀찮게 하는 거죠? 나는 절대로 당신한테 시집 안 가요! 똑똑히 알아둬요, 절대 안 간다고요! 그걸 알란 말예요! 당신 같은 우스꽝스러운 사•람한테 과연 시집갈 수 있겠어요? 지금 거울이라도 한번 보시죠, 당신・어쩨서, 어째서 그 사람들은 내가 당신한이 어떤 꼴로 서 있는지! - P42
데 시집갈 거라며 나를 놀려대는 거죠? 당신은 분명 그 이유를 알겠죠! 당신도 그 사람들과 작당해서 음모를 꾸미고 있을 테니!" "아무도 널 놀린 적 없어!" 아젤라이다가 깜짝 놀라서 중얼거렸다. "그런 생각을 한 사람도 없고, 그런 말이 나온 적도 없어!" 알렉산드라 이바노브나가 소리쳤다. "누가 얘를 놀렸지? 언제 애를 놀렸어? 누가 감히 얘한테 그런 소릴했느냐 말야? 아니면 얘가 헛소리라도 하는 거냐?" 리자베타 프로코피예브나는 분노에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모두를 향해 물었다. "다들 그랬잖아요. 모두 하나같이 그랬잖아요, 이 사흘 내내 그랬잖아요! 나는 절대로 절대로 저 사람한테 시집가지 않을 거예요!" 이렇게 외치더니 아글라야는 비통한 눈물을 쏟으며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의자에 주저앉았다. "하지만 저 사람은 아직 너한테 청혼을…………… "나는 당신께 청혼한 일이 없습니다. 아글라야 이바노브나." 공작의입에서 얼떨결에 이런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뭐어?" 리자베타 프로코피예브나는 경악과 분노와 공포에 휩싸여한 음절 한 음절 띄엄띄엄 말했다. "뭐어요?" 그녀는 자기 귀를 믿고 싶지 않았다. "내가 말하고 싶었던 건.. ・내가 말하고 싶었던 건, 공작은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나는 다만 아글라야 이바노브나에게 분명히 밝혀두고 싶었고...... 삼가 해명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럴 생각은.. 아글라야 이바노브나에게 청혼할 영광을 얻을 의도는 전혀 없었을뿐더러・・・・・・ 앞으로 언젠가 같은 생각조차 전혀 없었다고 말입니다...... 이 - P43
은 대답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무슨소리를 입속으로 우물거린 모양인데, 그러자 장교는 그를 아주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예브게니 파블로비치에게 시선을 돌렸다. 순간, 장교는 자기 친구가 왜 공작에게 자기를소개할 생각을 했는지 퍼뜩 알아채고는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짓더니, 다시 아글라야에게 말을 건넸다. 이때 아글라야가 얼굴을 확 붉힌 것을알아챈 사람은 예브게니 파블로비치뿐이었다. 공작은 다른 사람들이 아글라야와 얘기를 나누면서 그녀의 환심을사려 애쓰고 있다는 것조차 알아채지 못했고 자기가 그녀 옆에 앉아있다는 사실마저 때로는 거의 잊다시피 했다. 이따금 그는 어디론가 훌훌 떠나서 여기서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는데, 그저 혼자서 상념에 잠길 수 있고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알 수 없는 곳이라면, 음울하고 황량한 곳이라도 마음에 들 것 같았다. 아니면 하다못해 자기 집 테라스에라도 가 있었으면, 다만 거기에 아무도, 레베제프도 그의 아이들도 찾아오지 말았으면 싶었다. 거기서 자기 소파에몸을 던지고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채 하루 낮이 가고 밤이 가고 다음날 낮이 다 지나갈 때까지 마냥 그렇게 누워 있고만 싶었다. 순간순간산들이, 그 산속에 있는 친숙한 어느 한곳이 꿈결처럼 생각나기도 했는데, 그가 언제나 즐겨 떠올리고, 아직 거기서 살고 있을 때 즐겨 올라갔던 장소였다. 그곳에서 발아래로 내려다보곤 했던 마을, 아득히 내려다보이던, 하얀 실줄기처럼 어렴풋이 빛나던 폭포, 흰 구름, 버려진 옛성채. 오, 지금 그곳에 가서 한 가지만을 생각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오! 평생토록 그것만을 천년을 두고 그것만을 생각해도 족하만! 그리고 이곳 사람들이 자기를 완전히 잊는다 해도 상관없다. 그래 - P49
가를 불현듯 깨달았다. 거기엔 공포를 표현할 어휘가 빠져 있었다. 그렇다. 그것은 공포였다! 그는 지금 바로 이 순간에 그 공포를 완전히 느꼈다. 그는 이제 나름의 독특한 이유에서 믿고 있었고, 완전히 확신하고 있었다. 이 여자는 미쳐버린 것이다. 만약 어떤 여자를 세상 그 무엇보다 사랑하거나 그런 사랑의 가능성을 예감하는 자가 갑자기 그 여자가 사슬에 묶여 철창 속에 갇힌 채 감시인의 몽둥이 아래 위협당하는 모습을 목격한다면 어떨까 그런 느낌이야말로 지금 공작이 느끼는 바와 어느 정도 비슷할 것이다. "왜 그러세요?" 아글라야가 공작을 돌아보면서 천진스럽게 그의 팔을 잡아당기며 빠르게 속삭였다. 그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 순간 이상하리만큼번쩍이는 그녀의 새까만 두 눈을 들여다보며 미소를 지어 보이려 했으나, 순식간에 그녀를 까맣게 잊은 듯 갑자기 다시 눈을 오른쪽으로 돌려 또다시 자신의 가공할 환영을 쫓기 시작했다. 나스타시야 필립포브나는 이 순간 아가씨들이 앉아 있는 의자 바로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예브게니 파블로비치는 알렉산드라 이바노브나에게 뭔가 분명 아주우습고 재미난 얘기를 빠른 소리로 신이 나서 계속하는 중이었다. 공작은 아글라야가 갑자기 반쯤 속삭이는 소리로 "아니, 저 여자가......" 하고 말한 것을 기억했다. 이것은 불분명하고 입 밖으로 내다 만 말이었다. 아글라야는 곧바로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았으나,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했다. 나스타시야 필립포브니는 딱히 아무에게도 눈길을 주지 않는 양지나가다가 문득 그들 쪽으로 몸을 홱 돌렸는데, 마치 그제야 예브게니 -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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