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학하기 전, 어머니는 내게 수학 과외를 해 달라고 나방을 설득하는 데 꽤나 시간을 들였다. 수학은 내가 못하는 과목이었고, 사실 나방이 나를 가르치려는 노력을 접은 뒤에도 오래도록 그렇게 남았다. 우리의 후견인은 내게 기하학의 정리를이해시키기 위해 삼차원에 가까운 그림들을 그렸는데, 그가 지넌 내면의 복잡성을 엿볼 수 있었던 건 오로지 이때뿐이었다. - P20
우리가 새 학교로 떠나기 얼마 전 저녁이었다. 어머니는 거실 구석에서 우리 셔츠를 다림질하고, 나방은 어디 나가려는 것처럽 계단 아래에 서서, 반쯤만 우리 가족에 속한 듯한 모양새로 엉거주춤하게 있었다. 그러다 입을 열더니, 통금 시간에 어둠 속에서 남자들을 싣고서 ‘버크셔 부대‘로 데려가려기 위해 해안을 향해 야간 운전을 하던 어머니의 운전 기술이 어땠는지 이야기했다. 그때 어머니가 졸음을 피한 건 순전히 ‘초콜릿 몇 조각과 열린 차창에서 들이치는 찬바람‘ 덕분이었다고했다. 나방이 이야기를 이어 가는 동안 어머니는 그의 묘사에유심히 귀를 기울였다. 심지어 칼라를 태우지 않으려고 오른손에 쥔 다리미를 허공에 든 채, 그늘이 드리운 그 이야기에완전히 집중했다. 그때 알았어야 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시간을 의도적으로 뛰어넘었다. 언젠가는어머니가 베드퍼드셔의 칙샌즈 수도원, 그리고 그로스브너 하우스 호텔 옥상의 "새 둥지"에서 헤드폰을 끼고 이쯤에서누나와 나는 이곳이 ‘화재 감시‘와는 별 상관이 없는 곳이라는 걸 짐작하고 있었다 무전기에서 나오는 복잡한 주파수에 귀를 바싹 기울이며 독일군의 메시지를 가로채 영국 해협너머로 전송하는 일을 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우리는 어머니가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기술을 지닌 존재임을 알아 가고있었다. 그 아름답고 흰 팔과 섬세한 손가락으로, 명확한 의]아래 사람을 쏘아 죽인 적도 있었을까? - P21
하게 뛰어 올라가는 모습에선 운동에 익숙한 몸놀림이 엿보였다. 전에는 미처 눈치채지 못한 점이었다. 아버지가 떠난 뒤부터 학기 시작을 앞두고 자신도 떠나기 전까지 한 달 동안, 우리는 어머니에게서 더욱더 놀랍고 개인적인 면모를 발견했다. 어머니가 지난날을 회고하는 나방을 지켜보며 뜨거운 다리미를 허공에 들고 있었던 짧은 순간은 우리에게 지워지지 않는인상을 남겼다. - P22
그는 서늘한 지하실에서 내 손을 계속 잡고 있었다. 나는그를 뿌리치고 위층으로 돌아가, 불 꺼진 거실의 가스난로 앞에 앉았다. 곧 지하실에서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는 거실을 지나쳐 자신의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만약 내 유년 시절에서 제일 먼저 기억나는 장면을 하나 들라고 한다면, 나는바로 그날 누나가 사라진 뒤 밤의 어둠에 잠겨 있던 집안 정경을 꼽을 것이다. - P39
10월의 돌풍이 몰아치는 저녁, 담으로 둘러싸인 정원의 어둠에 잠겨 있노라면 담장이 부르르 떨며 동해의 바람을 머리위로 몰아 보내는 게 느껴졌다. 그러면 더욱 따뜻해진 이어둠 속에서, 그 무엇도 내가 발견한 고독을 침범하거나 부술 수없다는 느낌이 든다. 마치 과거로부터 보호받는 듯하다. 나방에게 연이어 질문을 던지며 미지의 문을 억지로 열려고 애쓰던 때, 가스난로 불빛이 비치던 그의 얼굴을 떠올리기가 아직두려웠던 시절의 과거. 혹은 십대 시절 연인을 움직여 깨우던과거. 비록 그 시절을 돌이켜 보는 일이 거의 없긴 하지만 말이다. - 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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