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문제를 계속 추적해볼 생각이오." 뷔르겔이 말했다. "이곳에서는 전문 인력을 활용하지 않고 썩히는 일은 절대없어요. 당신에게도 틀림없이 속상한 일이겠군요. 상황이 그렇다니 괴롭겠네요?" "괴롭지요." K는 천천히 말하면서 혼자 빙그레 웃었다. 지금은 그 문제로 괴로울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뷔르겔의 제안은 그에게 별다른 인상을 주지 못했다. 그것은 아주 어설픈 제안이었다. 그는 K를 초빙하게 된 구체적인 경위, 그의 초빙을 계기로 마을 공동체나 성이 당면한 어려움, K가 이곳에 머무는동안 이미 일어났거나 또는 일어날 조짐을 보였던 여러 분쟁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그 모든 것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아니 비서라면 으레 알고 있으리라는 태도도 보이지 않으면서 뷔르겔은 작은 메모지를 활용해 즉흥적으로 그 일을 해결해주겠다고나섰다. "당신은 벌써 여러차례 실망해본 모양이군요." 뷔르겔은이렇게 말하며 다시 한번 사람 보는 안목이 있음을 입증해보였다.
K가 이 방에 들어설 때부터 뷔르겔을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고 틈틈이 자신에게 다짐한 것에도 부합하는 바였다. 그러나 지금 상태에서 K로서는 자신이 피곤하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제대로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그렇지 않아요." 뷔르겔은 마치 K의 어떤 생각에 대답하면서 그를 배려해 이야기하는 수고를 덜어주려는 듯 말했다. "실망했다고 풀이 죽어 단념해서는 안돼요. 이곳에서는 여러일들이 사람을 기죽이는 식으로 이루어지는 것 같아요. 그리고 새로 들어온 사람에게는 그 장애물들이 도저히 뚫고 나갈 수 없는 것처럼 보이겠죠. 사정이 정말 어떠한지 조사해볼 생각은 없어요. 어쩌면 겉으로 드러난 모습이 현실에도 제대로 부합하는 것일 수 있
으니까요. 나의 위치에서는 그 점을 확인하는 데 필요한 적당한 거리가 확보되어 있지 않아요. 하지만 이 점은 잘 알아두세요. 가끔은전체 상황과는 무관한 그런 기회도 생겨난다는 것을요. 그러한 기회가 오면, 한마디의 말, 한순간의 눈길 한번의 신뢰 표시만으로도•기력을 소진하면서 평생의 노력을 기울인 것보다 더 많은 걸 성취할 수도 있지요. 정말 그래요. 물론 이런 기회들은 결코 활용되지않는다는 점에서 다시 전체 상황에 부합하지만요. 그런 기회들이왜 활용되지 않는지는 나로서는 늘 놀라울 뿐이죠." K는 그 이유를몰랐다. 그는 뷔르겔이 말한 내용이 자신과 아주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걸 알아차렸지만, 지금은 자신과 관련된 모든 것에 심한 반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