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은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다가 이 글에 대한 제목을
<책을 읽는다는 것>으로 바꾸었다.
최근의 읽었던 책에 대한 내용들은 모두 겹치는 내용들이었다.
아마도 난 삶을 대하는 태도를 그들에게서 배우고 싶었나보다.
한가지 공통적인 주제를 꼽자면, 【사색】을 무척이나 강조한다.
자신의 내면을 풍부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자신 스스로 생각하기" 이다.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 말이다. 책을 "읽는다"에서 끝나지 않고 이 책에 대해,
"비판적인 사고 방식"을 가져야 한다고 말이다.
일단 <런던 통신(1931-1935)>을 읽은 것부터 이야기해보자.
4-5쪽 짜리 짧은 에세이를 모아 놓은 책이며,
이전에 읽었던 <게으름에 대한 찬양>과 겹치는 부분이 많았기에,
과거에 쓴 <게으름에 대한 찬양>의 독후감을
(라고 쓰고 내용 요약이라고 적는다.) 여기다가 대신 옮겨본다.
현대 세계가 복잡해지면서 이를 위해 전문가가 탄생하였다.
또 정반대로 과거의 통찰이나 지식들은 점차 '무용'한 지식들로 변화되어가면서,
세상의 지식들은 점점 파편화되어가고 사회의 흐름은 전문가들이 쓰는 용어들로
점철되어 알수없게 변해간다.
현대 사회에서 교육의 목적 또한 '전문가' 양성이 우선이고,
'교양'은 뒷전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즉, 전문가가 되기 위한 길은 유용한 지식이며,
교양은 무용한 지식이라는 뜻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유용한 지식은 무엇이며 무용한 지식은 무엇일까 ?
진정 우리에게 필요한 지식은 '인생의 목적에 관한 지식'이지만
과연 전문가들이 그런 지식을 얼마만큼 가지고 있으며
또 얼마만큼 사회를 공정한 시각으로 바라볼까 ?
러셀은 오래된 옛말로 대변한다. "우리의 스승들을 교육시켜라."
현대 사회의 국가를 총괄하기 위해 여러 분야의 전문가가 탄생하였지만,
그들의 파편화되어진 지식들은 통합되지 못하고,우왕좌왕하는 사이에
(독재)공산주의와 같은 극단적인 형태의 국가가 태어난다고 경고한다.
그러한 국가들의 특징을 몇 가지 써보자면,
1. 감성과 인식이 아닌 '의지'를 통해 선을 추구하며, 행복이 아닌 권력을 추구한다.
2. 논쟁보다는 힘으로 찍어누르는 것이 더 선호한다.
3. 이런 사회를 위해 '틀'에 끼워맞춘다.
이러한 국가의 난동(?) 속에 개인은 비틀리고 희생 당하게 된다.
개인들에게 근로의 미덕을 설파하고, 일을 생계 수단의 목적으로 전락시킨다.
즉 "노예 국가"로 변해버린다는 것이다.
부조리하게 특권 계층을 유지하는 기반이 되어 전근대화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게 세상은 획일화 되어가고 새로운 창조로 이어져야 할 많은 것들이
그저 생산을 위한 낭비로 점철되어 버린다.
그 이유는 사회의 흐름이
"사는 것"보다 "파는 것"을 더 좋아하게 만들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무언가를 가졌다는 기쁨보다 팔면서 얻게 되는 힘이
세상에 더 가치있게 변해가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이즈음에서 러셀은 하루 4시간 노동를 주장한다.
세상의 가치는 노동이나 이득따위가 아니라고 말이다.
중요한 가치는 바로 "배움"이다. 만약 4시간 노동이 이루어지고
남은 시간을 사색적인 통찰이나 배움으로 채운다면,
우리와 전문가 사이의 '지식의 격차' 또한 줄어들 것이다.
이렇게만 된다면 복잡하게 실타래처럼 꼬인 현대 사회도 그 누구든
그 구조를 쉽게 파악하고 이해하게 될 것이다.
TV나 컴퓨터와 같이 그저 정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고,
집단으로 무언가를 구경하는 여흥거리를 그것을 대신하여
폭넓은 지적 관심사를 여흥거리로 추구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현대사회의 복잡성은 민주주의의 성공을 가로막는다.
우리 스스로 깨우치고 노력해야 한다.
실용적인 지식은 기술을 발전시키지만
당장은 아무 의미도 없을것 같은 교양들은 언젠가
인생의 비극적인 단면을 헤쳐나갈 힘을 만들어줄것이다.
사회의 문제점에 대한 타개책이나 권유하는 책들은 수도 없이 나오지만
계속 악순환되는 이유를 러셀은,
세계를 술버릇을 고치고자 애쓰지만
연신 술을 권하는 옛 친구들에 둘러싸여 번번히 옛습관으로 돌아가고
마는 술꾼과 같은 상태라고 비유한다.
문제의 해결은 바로 이 술꾼들을 쫓아내는데 있다고 말이다.
현대 사회에서 진짜 필요한 지식은, 위에서 말하는 교양이다.
당장은 쓸모 없어 보여도, 삶의 어느 부분에서, 반짝 빛나는 그런 존재 말이다.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진정한 무지는 "자기 자신을 모르는 것"이라고 말이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도 모르면서 그저 책이나 타인이 주는 정보들을
그저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지식에 대한 경계를 말이다.
러셀이 말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당장 필요한 지식은 맹목적이다.
그렇기에 어떠한 것을 읽고서 단지 정보로 환원되는 것은 위험한 행위이다.
무언가를 읽고서 머리에 들어오지 않아서 '어쩐지 싫은 느낌'이 드는 것이야말로
'독서의 묘미'이며, 읽고 감명을 받아도 금방 잊어버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자기 방어'이다.그래서 반복해서 읽어서,
'자연스러운 자기 방어'를 깨뜨려서 익숙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색을 즐거움 아닐까 ?
너무 책을 무시하고 쉽게 쉽게 페이지를 넘겼던 자신에 대하여 반성하게 되는 시간이다.
그리고 <독서의 기술>이라는 책은 나에게 피니쉬 펀치 까지 날린다.
'책을 수동적으로 읽지말고 능동적으로 분석적으로 읽고, 공정하게 비평하라.
그리고 읽으면서 부족했던 부분들을 다른 책들을 통해 통합적으로 읽어라'가
주된 요지인 책인데, 초장부터 나를 깨갱하게 만든다.
배움을 통해 얻는 정보와 깨달음은 다르다면서 시작한다.
그저 책 읽기가 정보를 얻기에 급급한 책읽기는 아예 안 읽는 사람이나
다를 바 없다면서 늘 닥치는대로 읽지만 잘 읽지는 않는 아는 체하는
무지한 사람들을 알렉산더 포프라는 사람은
"무식하게 책만 읽은 멍청이들" 이라고 말하며, 몽테뉴는
"지식을 얻지 못한 ABC 수준의 무지와 지식을 얻고난 후 박사 수준의 무지"
라고 비꼬기도 했다.
읽기의 본질은 쓰는 사람의 머릿 속을 헤집어서 지식을 체득하는 것이기에,
'자신이 아닌 타인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다.
그렇게 '타인의 눈'으로 세상을 간접적인 경험하기 위한 독서의 힘을 무시하고
저자와의 소통을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그저 '읽었다'에 그치는 독서. 즉, 목적성 없이 '그냥' 읽는 독서나 재미를 추구하는
독서 속에서는 자기 자신의 정신 세계를 확장시키기 못한다.
독자의 머리를 넘어서는 책을 붙들고 늘어지라고 책이 말한다.
타인의 사고의 방식이나 흐름의 모든 것이 담겨있는
하나의 저작물에서 무언가를 배우려는
'목적성을 지닌 능동적인 독서'가 필요하다고 말이다.
그렇기에 정말로 훌륭하다고 생각되는 책을 위와 같은 방식으로
'그냥' 읽고 다 이해했다고 장담하지 말고, 정말로 그런지 스스로 판단해보고
이 판단에 책임을 지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미성숙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는데
나의 가슴에 콕 박히는 문장들이다.
또 저자가 사용한 단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말'을 전달받는데 지나지 않는다는 것.
언어를 통해 어떤 사고를 전달 받았는지 관심도 없고,
그 말이 언급하는 실제적인 경험도 이해하지 못한 채,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그저 언어에 치중하고 말을 가지고
그냥 노는 수준이 불구하다고, 저자의 언어를 자신의 언어로
바꾸는 노력을 소홀하면 안된다고 충고하는데. 마찬가지로 비수를 찔린다.
책을 쓰는 사람은 일방적으로 독자에게 설명해주어야 하는 입장이고,
독자는 그 일방적인 소통을 새겨듣거나 걸러듣거나,
혹은 비판을 하는 등등 선택할수 있는 권한이 많기에
어떻게 보면 갑과 을의 관계에서 을의 관계에 놓이게 되겠지.
독자인 갑이 제대로 이해하고 분석하지도 못한 채
비평의 단계로 넘어가는 것은 편협적인 일이 될지도 모르겠다.
정보화 사회에서는 점점 정보를 찾는 속도는 증가하기에,
약간의 검색만을 가지고도 수많은 자료가 튀어나온다.
이 단편적인 조각들만 조금씩 쌓아놓고 보면,
누구나 자신을 둔갑하고 그럴싸하게 그 분야에 대해 그럴싸한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런 짜깁기로 만들어진 실력이란 얼마만큼 발휘될까?
그들은 무장 해제 상태이다. 그들에게 남은건 교양 없음과 무지일뿐,
자기자신만 더 초라해지게 될 것이다.
무언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하려면, 그 무언가에 대한 깊은 사유는 필연적이다.
누군가의 생각만을 가지고 떠들어봐야 앵무새 밖에 더 될까 ?
단편적으로 흩어진 지식들을 주워모아 프레임에 틀어박힐수록
스스로를 '나는 생각하는 능력이 없소!'라는 이야기 밖에 안된다.
맥가이버가 생각난다. "생각해, 생각해, 맥가이버."
결국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은 "삐딱하게 보는 것"이다.
편안하게 읽지만 말고, 이 책에 불편한 점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좋은 점은 무엇이며, 다시 읽을 때는 또 불편했던 부분이 왜 불편했었는가에 대한 변화와...
헥헥...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반복되는 독서.
진정한 의미의 "책 읽기"는 위험하다. 삶을 송두리째 뒤짚어 엎어버릴지도 모른다.
"왜 ?"라는 한 마디는 사실 엄청나게 대단한 말이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