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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 The Bees - 랄린 폴 장편소설
랄린 폴 지음, 권상미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10월
평점 :
절판
벌(bee)이라는 곤충에 대해서 어떤 생각이 드는가.

로열젤리
꿀
벌꿀
벌집
꿀벌
말벌
일벌
여왕벌
양봉
집단생활
육각형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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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벌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벌에 대해서 아는 것은 이 정도일 것이다.
어렴풋이 여왕벌이 있고, 일벌이 있다는 것으로 그들 나름의 계급체계가 있을 것이라고까지
짐작한 사람이 있다는 그 사람은 꽤나 벌에 관심이 있는 편일 것이다.
여왕벌과 일벌의 존재를 알고 있다 하더라도 계급사회라고까지 생각의 연장이 이어지기 위해서는
벌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어야 가능하지 않을까?
원래 소설과 같이 쉽게 읽히는 책은 좋아하지 않는다.
다만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있거나,
김훈 작가의 <남한산성>과 같이 실감나는 묘사나 화려한 미사여구로 다양한 상상력을 불러 일으키는 작품은
한 번 접하게 되면 자리를 깔고 다 읽을 때까지 빠져드는 편이다.

이번에 소개할 "벌(The bees)"이 바로 그런 작품이라 생각한다.
현대사회는 능력만 있다면 언제든 현재의 위치를 뛰어넘을 수 있는 세상이라고 한다.
그러면서도 빈익빈 부익부 현상으로 더 이상 개천에서는 용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교육, 문화 등 다방면에서 차이가 심하게 벌어졌다며 "신 계급사회"를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점에서 "벌(The bees)" 속에서 등장하는 벌들의 모습이 우리네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소설 속 벌은 철저한 위계질서 속에서 계급을 초월할 수 없고, 계급별로 맡은 바 직무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런데, 최하층인 플로라 계급에서 특이한 벌이 태어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쯤되면 다들 짐작하겠지만 바로 이 책의 주인공이다.

다른 최하층 벌들과는 달리 말을 할 수 있고, 여왕의 아이들에게 수유를 할 수 있고,
몸집이 커서 말벌의 침입도 머리를 굴려서 막아낸다.
정이 많아 죽어가는 늙은 보급병의 곁을 지켜주기도 하고
여왕을 알현하여 그녀의 말을 경청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호기심이 많아 최하층 벌로서는 해서는 안될 행동을 수없이 벌인다.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순응하며 살기 보다는
순간 순간의 호기심에 따르고,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한다.
물론 그녀가 권력에 굴하지 않는 고고한 자세만을 보이는 것도 아니고
그녀가 너무나 뛰어나서 모든 역경과 고난을 뛰어넘는 것도 아니다.
그냥 열심히 살아가려는 우리의 모습이 그대로 투영된 것 같아서
읽다 보면 마치 일기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 때도 있다.
그래서 그럴까.
눈을 잡아 끄는 명언, 명언이 아니더라도 다시 한번 생각하게끔 하는 말들이 많았다.

"좋다, 네 일족에게 지식은 고통만 야기하느니."
지식은 오랜 세월 동안 기득권층이 자신들끼리만 공유하고 하위 계층과 공유하기를 꺼려하는 것이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랬다.
인문학을 위시한 지식들은 기득권층이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근간이었기 때문이다.
지식을 공유한다는 것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부와 권력을 공유한다는 것과 진배없는 것으로
그만큼 지식이라는 것은 중요한 것이고, 살아가는 데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현대사회에 들어 지식정보화 사회라고 할 만큼 수많은 지식들과 정보가 범람하면서
지식을 쉽게 접할 수 있는 길이 생겼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식의 가치가 떨어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범람하는 지식 속에서 자신에게 필요한 지식을 찾고, 정돈하는 과정이 어려워졌다.
한편, 현재도 기득권층은 자신들만이 공유하고 있는 지식이 있으며,
자신들 외의 사람들이 이 지식에 접근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낀다.
여사제가 플로라에게 던지는 이 말을 들었을 때 내가 느낀 바가 바로 이러했다.
지식의 중요성은 물론 기득권층이 이전에 보여왔던 폐쇄적인 지식전달체계.
그리고 현재에 이르러서도 기득권층은 자신들의 지식에 접근하려는 외부인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단 한마디의 말로 드러내고 있는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제 생각을 숨길 수 있다니. 참으로 묘한 자매로고.."
벌들은 호르몬을 분비해서 자신이 찾은 꽃/꿀의 위치를 알린다고 들었다.
이 점에 착안해서 글 속에서는 최상위 벌(사제)들은 하위 벌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하지만 플로라는 자신의 알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숨긴다.
여왕의 딸이자 신하로서 여왕만을 위한 삶을 살던 그녀가
여왕만이 할 수 있는 번식의 과정을 거치면서
한층 성장해 나가는 부분이자 지금까지 자신이 믿어왔던 신념이 무너지는 장면이다.
이후에 그녀가 다시금 일어서는 장면에서 깊은 감동을 느꼈다.
자세한 내용은 책을 참조해주기를 바란다.
((스포일러가 되고 싶지는 않다))
이 처럼 글 곳곳에서 우리 사회의 모습이 엿보이고
또 우리의 모습이 곳곳에 숨어있다.
국가의 안녕을 위해 자신의 몸의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꿀을 찾아 나서는 보급병들
궂은 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묵묵히 살아가는 청소병들
국가의 자산이 되는 알/애벌레를 보육하는 보육병들
다양한 모습으로 자신의 위치에서 역할을 수행하는 그들을 보면서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이런 훌륭한 책을 데뷔작으로 내어 놓은
랄릴 폴은 인도계 영국인으로
벌(The bees)은 화제의 데뷔작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크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영국과 미국을 오가면서 시나리오 작가 겸 극작가로 언론의 극찬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첫 소설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개연성이 분명하면서도 감성적이다.

영어공부한다는 마음으로..
랄린 폴이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는 자료가 되지 않을까 하여
이 책 The bees에 대한 인터뷰 영상을 첨부하면서 글을 마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