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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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맨부커상 작품으로 책으로 먼저 읽고 개봉일인 8/10날 설레는 마음으로 영화를 보았다. 책의 충격적 반전을 알고 있기에 보는내내 조마조마한 심정이었다.

사랑얘기 같으나 결론은 ‘어떻게 살것인가‘에 질문을 던지는 삶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되었다. 마지막 백발의 노년을 살아가는 토니를 보며 생을 마감할 때 나는 무엇을 남기고 싶을까를 생각해본다.

열심히 살아가며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고 싶어졌고, 좋은 기억을 남기는 삶이 되도록 부지런히 나를 만들어 나가야 하겠다는 의지를 갖게 해준 책이고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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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으면 - 낮의 이별과 밤의 사랑 혹은 그림이 숨겨둔 33개의 이야기
황경신 지음 / 아트북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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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우면 외로운 대로,
그리우면 그리운 대로,
절망스러우면 절망스러운 대로
그 속에 철저히 침잠해 있으리라는 거였다.‥˝
_이정하

이게 선택의 문제인지
참고 견뎌야 하는 문제인지
모르겠다.
해야만 하는 것이 있다.
시간을 견디는 것.
뭔가를 잃어버리기 위해서는
우선 뭔가를 가져야 한다.
오늘 아침 예전에 책을 읽다가
필사하며 적어둔 글이 마음을 두드린다.

「사랑에 빠져 있을 때 나는 우리의 사랑이 머지 않아 끝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이 나의 길지 않은 생의 마지막 사랑 우리가 영원히 서로를 갈망할수 없다는 것 사랑이 지속되는 기간이 짧으면 짧을수록 닥쳐올 미래가 내포할 고통이 적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멈출 수가 없었다

사랑이란 어느 날 갑자기 예고도 없이 닥쳐오는 거센 바람과 같은 것이라고 지도를 보고 길을 잡고 냉정한 태도로 방향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은 없는 거라고 자신에게도 상대에게도 그런 기대는 하지 않는게 좋다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질 수 없는 그러나 갖지 않으면 도저히 행복해질 수 없는 무엇에 대한 열망이 나의 영혼을 흔들었다 그는 비로소 나를 바라 보았다 미안하다 그의 얼굴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

사랑은 나에게 온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줬으나 나는 그 세상이 얼마나 쉽게 부서지고 깨어지는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랑은 나의 몸과 영혼을 가장 높은 곳까지 이르게 했으나 우리의 사랑은 밀랍으로 만들어진 날개와 같은 것 그리고 불행하게도 태양을 향해 날아가는 것이 사랑의 속성이다

그러나 이제 나는 안다 사랑은 언젠가 끝이 나는 것이며 우리는 모두 언젠가 떠나야 하는 것이며 그 이후에도 나의 삶은 계속 된다는 것을 그는 나를 떠났으나 그를 사랑하던 나는 사랑과 함께 죽지 않았다 나는 살아 남아 사랑을 위해 슬퍼하고 기뻐하며 살아간다 그것이 사랑이 내게 행한 방식이므로 모든 것은 지나간다 다만 영원과 흡사했던 그 한 순간만이 하나의 풍경으로 남아 텅 빈 삶의 한쪽 벽에 조용히 걸려있는 것이다

사랑을 위해 슬퍼있는 것은 살아 남은 사람들의 몫이다

어느 날 문득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서서 언젠가의 그 시간을 되돌아볼때 내가 그에게 후회는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아픔이고나 슬픔이거나 갈증이거나, 그러한 아름다움까지는 아니더라도.

수많은 밤들이 있었다 수많은 낮들이 있었다 기억해둘 만한 일들 기억에서 사라진 일들이 있었다 붙잡고 싶었지만 희미해진 기억들이 있고 기억하고 싶지 않으나 지울 수 없는 일들도 존재한다 가지마다 탐스럽게 매달린 사과들이 있었고 연두에서 초록으로 황금빛으로 다시 갈색으로 변해가는 들판의 풀들이 있었다 찾으려 했던 길들 기다리는 시간 가눌 수 없는 열정 속도를 늦추지 않는 세월 빛바랜 무정 뜨거워졌다가 차가워진 마음들이 있었다

나는 지우면 지워지는 사람이 되고 싶었으나 동시 내가 존재하는 세계를 그에게 확실하게 인지시키고 싶었다 아니다 나는 그 어느 쪽도 원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전부를 원했다 그 전부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로 내가 그런 생각에 갈팡질팡 매달려 있는동안 시간은 나를 대신하여 순교자처럼 죽어 갔다

당신을 보았기 때문에 모든것이 시작되었다 그것을 인정하기까지 그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의 심장이 뛴다고 해서 내가 누군가의 삶에 편입 되었다거나 누군가가 내 삶으로 편입 되었다는 것을 쉽게 수긍할 정도로 내가 순진하지 않은 덕분이다 덕분에 어떤 시작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동시에 끝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라고 나의 가엾은 심장에게 타이를 수 있었다

자신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는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하지 않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누군가 말했다

누군가가 하지않는 이야기에 더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면 누군가의 부재는 누군가의 존재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려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지 않은 이야기들에 대한 무수한 짐작들이 모두 진실이 아닌 것처럼 누군가의 부재는 그 사람에 대한 감정을 과대평가하거나 과소평가 하게 만든다 그 간극에서 어떻게 살아 남을 것인가

그 모든 ‘있음‘들 뒤에 모든 ‘없음‘들이 온다. 그러니까 그 ‘있음‘들에 대해 일일이 다정한 이름을 붙여줄 필요는 없을 지도 모른다. 후회라거나, 슬픔이라거나, 사랑 같은 이름들...다만 그저 이렇게 이 하나의 문장으로 마침내 한 사람의 얼굴을 기억하려 한다 그가 여기 있었다

온몸의 촉수를 곤두세우고 완전히 한 사람에게 집중할 때 표정과 표정사이 단어와 단어사이 문장과 문장 사이 동작과 동작 사이의 템포와 리듬을 감지할때 그리하여 그 속으로 완벽하게 녹아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을 때 의도적인 어긋남으로 템포와 리듬을 흐트러뜨림으로써 그 사람을 그 흐트러뜨리는 일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맥락 없고 엉뚱하면서도 핵심에 근접한 예기치 못한 질문을 받고 당황하는 사람의 얼굴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것은 평면으로 저장될 운명을 가진 기억이 어떤 질감과 색채를 얻어 입체로 바뀌는 순간이다 그 기억에 손을 대면 거칠거나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진다 물론 자칫 잘못하면 손가락을 베일 수도 있다

눈을 감으면 아득히 멀어지고 아득히 가까워진다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것이 진짜 삶이다 어떤이는 모든 것에서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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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위안 - 불안한 존재들을 위하여
알랭 드 보통 지음, 정명진 옮김 / 청미래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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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이라고 해서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들이라고 해서 다 나쁜 것은 아니다._

몸이 고장나 아프면 전문가인 의사를 찾듯,
마음이 다치고 아프면
철학자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이 책,
「철학의 위안」/알랭드 보통
철학가들이 마음의 전문가라는 생각을
전에는 한번도 못해봤을까..?!

알랭드 보통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진리의 절대성을 추구한 소크라테스부터

자족함을 통한 정신적 쾌락을 말했던 에피쿠로스,

스토아 학파의 대성자로, 자신의 힘으로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은 운명으로 받아들이라했던 순명(順命)의 현자 세네카,

인간성과 인간이 살아가는 방법을 탐구한 에세이스트, 몽테뉴,

끝없는 욕망의 연쇄로서 생(生)은 고통이며, 그 고통으로부터 해방은 죽음이라고 단정한 염세주의 철학자로 알려진 쇼펜하우어,

행복은 고통 없이는 얻을 수 없으며, 삶을 승화시키는 것은 고통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있다고 생각한 니체까지 아주 심도있지만 편하게 만나볼 수 있다.

그들의 사상을 통해
행복의 본질을 탐험한 알랭드 보통.
결론은 이렇더라.
행복은 올바른 인식에서 시작해야 하며,
진리와 진실을 추구해야 하고,
삶을 자족하는데서 얻을 수 있다라는 것.

난 이렇게 받아들인다.

올바른 인식이란
인간의 본질,본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자신이 처한 상황 내지 현실에 대한 올바른 인식 곧 이성적 판단이라고.

또 진리와 진실의 추구는
유형의 물건이나 돈같은 눈에 보이는 것보다는
무형의 것 즉 자유,사랑,우정, 배려, 나눔,미학,..눈에 보이진 않지만 훨씬 소중한 이 가치들을 추구하며, 획득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마지막의 삶을 자족한다는 말은
말 그대로 만족하는 삶을 살아야 행복에 이른다는 말이지 싶다.

고딩때나 배웠던 철학자들의 사상을 한자한자 읽으며 따라가는 일 처음엔 쉽지 않았으나 최고의 스승은 ‘필요성‘인지라 내 호기심에 읽어나갈 수 있었다. 행복이 필요하기에_

종일 창밖 하늘을 바라보다 책보다를 반복한
하루가 저물고
멋진 석양사진까지 찍어,
이 소중한 하루를 갈무리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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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두막 (100쇄 기념 특별판 리커버)
윌리엄 폴 영 지음, 한은경 옮김 / 세계사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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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폴 영의 ˝오두막˝을 읽으며 참으로 이런 책을 만난것에 감사함을 고백하고, 자꾸만 읽다말고 책을 덮고 깊은 묵상을 하고, 영혼의 떨림에 간혹 눈물지으며 가슴깊이 파고드는 보이지 않는 다정한 위로의 손길을 느꼈다.
가늠조차 할 수 없는 하나님의 한량없는 사랑과 은혜를 깨달으며 늘 만져주시는 그분의 따뜻한 시선에 오늘도 의지하며 삶으로 나아가본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안에서 연결된 존재다. 나를 둘러싼 모두를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왜 당신은 우리 인간들을 사랑하죠? 대체 왜 나를 사랑하는 건가요? 나는 아무것도 드릴게 없는데요?

-당신이 우리에게 아무것도 줄 것이 없다는 게 무척 자유로울 거예요. 적어도 우리에게 더할 것도, 앗아갈 것도 없죠....무언가를 해내야 한다는 부담감이 줄어들 거고요. 우리는 이미 우리 자신 안에서 완전히 충만에요. 인간은 자신의 독립성과 뭔가 해내고자 하는 욕구에 따라 언어를 재구조화하는 경향이 있지요....우리가 왜 십계명을 만들었다고 생각하죠?

-내 생각에, 적어도 내가 배운 바로는, 사람들이 당신의 선한 은총안에서 정의롭게 살기를 바라며 복종해야 할 규칙을 만든것이 아니었나요?

-당신 말이 맞지는 않지만, 맞는다고 가정할 경우 우리의 선한 은총안에 들어올 정도로 정의롭게 사는 사람이 과연 몇명이나 된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많지는 않겠죠. 사람들이 전부 나와 같다면요.

-실은 한명 뿐이었어요. 바로 예수죠. 예수는 그 율법에 문자 그대로 복종했을 뿐만아니라 그 정신까지 완전하게 구현했어요. 하지만 그가 그렇게 하기위해 전적으로 내게 의지했다는걸 당신도 이해해야 해요.

-그러면 우리에게 그 계명들을 왜 준 거죠?

-사실 우리는 당신들이 스스로 정의로워지기 위한 노력을 포기하길 바랐어요. 그 율법은 당신들이 우리와 분리된 채 살아갈때, 얼마나 더러운 꼴이 되는지를 보여주는 거울이죠. 규칙은 단 한번의 실수에도 자비나 은총을 베풀지 않아요. 당신이 우리와 분리된 채 살아갈 때 그 약속은 헛되다는 점을 잊지 말아요. 예수는 율법의 요구를 잠재웠어요. 이제 율법에는 비난하거나 명령할 힘이 더 이상 없어요. 예수야말로 약속이자 이행이죠.

-내가 더 이상 규칙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뜻인가요?

-당신은 예수 안에서 어떤 법에도 지배되지 않아요. 그 안에선 모든 것이 합당하죠. 자유를 두려워 하는 자들은 우리가 그들안에 살 수 있다는 걸 믿지 못하는 자들이에요.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한다는 것은 독립성을 선언하고 통제를 지속한다는 뜻이죠. 율법은 다른 사람들을 심판하고 자신이 그들보다 우월하다고 믿게하죠. 당신은 다른 사람들보다 자신이 더 높은 기준에 맞춰 산다고 믿고 있어요. 책임이니 기대니 하는 난해한 표현을 이용해서 규칙을 강화하는 것은 불확실성에서 확실성을 이끌어내려는 헛된 시도에 불과하죠. 당신이 생각하는 바와는 달리 나는 불확실성을 아주 좋아해요. 규칙은 자유를 가져오기는커녕 남을 비난하는 힘만 갖고 있어요.

나는 동사예요.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에요. 미래에도 마찬가지죠. 나는 동사예요! 나는 살아있고 역동적이며 늘 활동적이고 또 움직이죠. 나는 생명체가 있는 동사예요. 나의 본질이 동사이기 때문에 나는 명사보다 동사에 맞춰져 있어요. 고백하기, 회개하기, 살기, 반응하기, 성장하기, 도약하기, 변화하기, 씨뿌리기, 달리기, 춤추기, 노래하기 등의 동사죠. 그런데 인간들에겐 은총이 가득하고 생명력이 넘치는 동사를 죽은 명사나 규칙 탓에 냄새가 나는 원칙으로 바꾸는 재주가 있어요. 그러고 나면 성장하고 살아있는 것은 죽게 되죠. 명사는 창조된 우주와 물리적인 실제로 인해 존재할 수 있어요. 하지만 우주가 명사 덩어리라면 그건 죽은거나 마찬가지죠. ‘내가 존재‘하지 않으면 동사도 사라져요. 동사야 말로 이 우주를 살아있게 만드는 거죠.

어떤 것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동시키려면 살아 움직이는 것을 도입해야 해요. 명사이기만 한 것을 역동적이고 예측할 수 없는 것으로 이동시키는 것 , 살아있는 현재 시제로 이동시키는 것은 율법에서 은총으로 이동시키는 것과 마찬가지 인거죠.
내 단어는 살아있고 역동적이어서 생명과 가능성이 가득하지만 당신의 단어는 죽어있고 율법과 두려움, 심판이 가득해요. 그래서 성경에는 책임이라는 단어가 없어요.
종교는 법으로써 스스로 힘을 부여해 자신이 생존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통제해야 해요. 나는 당신에게 부름받을 능력을 주었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자유롭게 사랑하고 매순간을 섬기는 일이지요. 그 매순간은 각기 다르고 독특하고 훌륭해요. 내가 만약 당신에게 책임감만 부여한다면 나는 당신과 함께 있을 수 없어요. 책임감이란 수행해야 할 의무이자 충족되어야 할 의무가 되고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어요.

이번에는 우정을 예로 들어서, 명사에서 생명의 요소를 제거하면 극단적으로 관계가 바뀌고 만다는 것을 보여줄께요. 나와 당신이 친구라면, 우리 관계 속에는 기대감이 존재해요. 서로를 마주 보고 있을 때나 떨어져 있을 때도 우리에겐 함께 웃고 떠들거라는 기대감 있죠. 이런 기대감은 구체적으로 정의되지 않아요. 그것은 살아있고 역동적이죠. 더욱이 우리가 함께 있으므로 생겨나는 모든 것은 다른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독특한 선물이죠. 그런데 내가 그 ‘기대감‘을 ‘기대‘로 바꾸면 어떻게 될까요? 말로 표현하건 안 하건 간에요. 그러면 우리 관계에 갑자기 규율이 들어오죠. 당신은 이제 나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기대를 받게 되요. 그리고 살아있는 우리의 우정은 규칙과 요구사항이 딸린 죽은 것으로 급속히 변질되죠. 이제 우정은 당신과 나에 대한 것이 아니라 친구라면 의당 해야 할 것, 혹은 좋은 친구의 책임에 대한 것이 되겠죠.

-하지만 아무런 기대와 책임이 없다면 모든것이 무너져버리지 않을까요?

-당신이 나와는 별개로 율법이 지배하는 세계에 속한다면 그렇겠죠. 책임과 기대는 죄책감과 수치심, 심판의 기본이 되죠. 또한 성취를 정체성과 가치의 기초로 여기게 하는 본질적인 뼈대가 돼요. 당신은 다른 이의 기대에 못 미치는 삶이 어떤지 잘 알고 있을 거예요.

-당신이 나에 대해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는다는 뜻인가요?

-나는 당신뿐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무엇을 기대 해 본적이 없어요. 기대라는 말에는, 미래나 결과를 모르면서 바라는 결과를 얻기위해 행동을 통제하려 한다는 뜻이 전제되어 있어요. 인간은 대개 기대를 통해 행동을 통제하려고 애쓰죠. 우리는 당신과 당신에 대한 모든것을 이미 알고 있는데 또 무엇을 기대하겠어요? 그야말로 바보같은 짓이죠. 더군다나 내가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기 때문에 당신은 한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었죠.

-뭐라고요? 나에게서 실망한 적이 한번도 없다고요?

-한번도요! 나는 우리 관계 안에서 끊임없이 살아있는 기대감만 갖고 있을 뿐이에요. 나는 어떤 상황, 어떤 환경에서도 적절히 대응할수 있는 능력을 당신에게 주죠. 당신이 기대와 책임감에 의지 할 만큼. 당신이 나를 알지도 신뢰하지도 못할 만큼. 또한 당신이 두려움 안에서 살 만큼.

-하지만 당신은 우리가 우선권을 가지길 바라지 않나요? 당신도 알겠지만 하나님이 최우선이고 그 다음엔 누구이고 하는 식으로 말이에요.

-우선권을 갖고 살면 모든 것을 위계질서나 피라미드로 보게 되죠. 이문제에 대해 우리는 이미 이야기했죠. 하나님을 최우선으로 둔다는 것이 실제로 어떤 의미가 되고 또 어느 정도가 되어야 충분할까요? 당신의 최우선 관심사를 실행하기 전에 나에게 과연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하죠? 나는 당신의 일부, 당신의 삶의 일부를 원하는 게 아니에요. 당신은 나에게 가장 큰 부분을 줄 수 없고, 만약 그렇게 한다더라도 그건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에요. 나는 당신의 전부, 당신의 모든 부분과 당신의 시간 전부를 원해요. 나는 여러 가치를 나열한 목록중에서 첫번째가 되고 싶은게 아니라 모든 것의 중심이 되고 싶은거예요. 내가 당신 안에서 살 때 우리는 당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을 함께 겪으면서 살 수 있어요. 나는 피라미드의 꼭대기보다 모빌의 한가운데가 되고 싶어요. 친구와 가족, 직장, 생각, 행동 등 당신 삶의 모든 것이 나와 연결되어 존재의 춤 안에서 바람과 함께 안과 밖, 앞과 뒤로 움직이죠. 그리고 내가 바로 그 바람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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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즈 라캥
에밀 졸라 지음, 박이문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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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낯에 퍼지는 태양빛이 선선한 바람과 공존하는 가을이다. 모든 것들이 숙성하는 계절, 물기를 걷어낸 건조한 햇볕에 색깔을 바꾸며 각자의 소임을 다한 생명들이 중력에 의해 떨어지기 직전까지 성장하며 익어가고 있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중력에 영향을 받아 종국에는 대지에 묻힐 운명들이지만, 성장한다는 것은 중력에 반해 하늘을 향해 위로 위로 나아가는 일로 우리의 삶또한 같은 선상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성장만이 삶에서 추구해야할 진정한 가치임에 틀림없다.

아름다운 결실의 계절인 가을의 문턱에서 지난시간을 되돌아보며 얼마나 치열하게 진실되게 살아왔는지 어떤 열매들이 나에게 있는지 어떤 성장을 했는지 가만히 멍때리며 상념에 빠져본다.

어제 문학시간에 에밀 졸라의 ‘테레즈 라캥‘ 원작배경의 영화 2014년작 ‘In secret‘을 보며 같이 읽었던 플로베르의 ‘엠마 보봐리‘와 함께 ‘여자의 운명이란 무얼까‘ 내지는 삶에 있어서 사랑이, 육체의 욕망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결국 자멸해버리는 주인공들을 보며 영화가 끝나고 다들 할말을 잃었다. 다행히 우린 육적인 존재만이 아니라 영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상기하며 영혼의 내밀한 부분을 살피고 성장시켜야 하겠다는 의지를 다시금 되새겼다는 정도로 한줄평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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