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먹으라
유진 피터슨/IVP 2006년
*내용요약*
성경을 먹는 거룩한 공동체
책을 먹는 다는 것은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우리 인생의 조직에 동화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건강하다면 우리가 먹는 음식이 무의식적으로 우리의 신경과 근육에 흡수되어 말과 행동을 하게 되는 것과 같다. 성경을 먹게 되면 우리는 건강함과 온전함 생명력과 거룩함 지혜와 소망을 주게된다 에스겔, 예레미야 그리고 사도요한이 성경을 먹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겔2, 렘15장) 이 책을 먹게되면 이 책에 나오는 모든 단어가 우리 안에서 무엇인가를 할 것이다 우리의 영혼과 몸에 건강함과 온전함 생명력과 거룩을 줄 것이다.
기독교의 위기
오늘날 기독교 공동체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급박한 과제 중 하나는 성경을 자기 주권적인 목적을 위해서 사용하는 태도를 버리고 그 성경을 철저히 살아내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단언함으로써 그러한 자기 주권성에 대항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사건이 일어난다 언어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일차적인 방법이다. 따라서 지각을 날카롭게 하고 이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를 형성하는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독서습관을 계발하는 것이 기독교공동체의 관습이다.
성경읽기의 목적
칼바르트가 궁극적으로 주장한 것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우리 삶에 들어오시게 하고 우리 삶에 참여하시게 할지를 알기 위해서 성경을 읽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성경을 거꾸로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자 이 텍스트 안으로 들어간다. 성경이 계시하는 세계는 분명한 인격성을 가진 하나님의 세계다. 우리가 끊임없이 저지르는 그러나 결코 행해서는 안되는 잘못은 성경을 우리의 경험에 억지로 끼워 맞추는 것이다.
*독자여 주의하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살기 위하여 성경을 읽는다
렉치오 디비나(거룩한 독서)는 인격적이고 참여적인 주의력을 계발하고 그럼으로써 성경을 바르게 읽는 훈련을 하게 해준다
모든 장마다 성경은 예수님이 하셨던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네가 어떻게 읽느냐?”
기록된 말은 죽은 말이다(고후3:6) 성경은 단지 죽은 말이 아니라 부활을 기다리는 죽은 말이다.
렉치오 디비나는 경건할지는 모르지만 죽은 예수님을 다루고 취급하는 독서방식에서 살아계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함께하고 따르는 친구들의 무리와 교제하는 독서 방식으로 바꾸도록 하는 계획적이고 의도적인 방식이다.
성경은 건조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는 그것에 다시 수분을 공급하기 위해 노력한다.
렉치오 디비나는 기독교공동체가 성경에 수분을 다시 공급하게 해서 그것이 하루 중 가장 더운 때에도 원래 힘과 모양을 지탱하게 하고자 하는 노력이다.
렉치오 디비나의 임무는 잉크로 씌였고 이제는 피로 다시 쓰인 그 말을 사람들이 주의해서 듣게 하는 것이다.
렉치오 디비나의 네 요소
1.렉치오-텍스트를 읽는다
2.메디타티오-텍스트를 묵상한다
3.오라티오-텍스트를 기도한다
4.콘템플라티오-텍스트를 산다
레치오 디비나가 실제로 이루어질 때에는 네 가지 요소가 서로 혼합되고 상호 침투한다
렉치오 디비나는 삶의 방식이 되는 독서 방식이다.
데니스 레버토브의 [신앙의 시학]
요점만 간략하게는
튕겨나갈 수 있고
설득력이 없지만
완곡함과 유비, 비유와 모호함은
배경과 징검다리를 제공해 준다
왜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고 비유와 은유를 쓰는가에 대하여
은유는 정의의 기능을 능가하는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다
메디타티오(묵상)
독서의 행위에서 기억력이 계속해서 활동하게 하는 훈련
묵상은 텍스트에 나오는 말을 바라보는 것을 넘어 텍스트의 세계로 들어간다.
성경의 텍스트는 자신을 계시하는 하나님의 대한 증언
이 텍스트는 하나님을 드러낸다. 창조하시는 하나님, 구원하시는 하나님, 복주시는 하나님이다.
묵상은 우리가 처음에는 놓쳐버린 눈에 즉시 들어오지 않는 거대한 배경 속으로 들어가는 행위다.
묵상은 성경을 영감받은 단편의 모음이 아니라 하나의 연결되고 일관성있는 전체로서 읽도록 훈련하는 영적 독서의 한 측면이다.
성경은 역사 속에서 구체적인 이름을 가진 남녀들의 실제적인 공동체에 주어진 인격적이고 관계적이고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계시다. 성경은 공개된 하늘 아래에서 일하시면서 이세대와 저 세대 사이에 연속성을 갖추신 명료하고 일관된 글, 플롯과 등장인물과 배경이 있는 내러티브를 풀어내신 책이다.
시빌 콤플렉스
고대 그리스 마을 큐메의 여선지 시빌이라는 여인이 동굴입구에 앉아 이상한 주문을 외우며 신의 목소리를 내며 신탁을 전하였는데 주후 4세기 무렵에는 시빌의 신탁이 무려 15권이나 되었다고 한다. 어떤 것들은 상당히 많은 수의 그리스도인들이 퍽 진지하게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래서 성경을 마치 시빌의 신탁모음처럼 말의 배경이나 다른 것과의 연결이 없는 구절이나 문장으로 취급하여 성경을 숫자가 매겨진 장과 절로 나누는 관습을 시빌 콤플렉스라 한다. 성경은 오락이나 이윤을 위해서 점쾌로 보기 위해서 비인격적으로 조작하는 별자리표나 점괘표가 아니다. 즉, 성경을 무작위로 뽑아서 해석하거나 배경이나 역사성 없이 문자 그대로 적용하고자하는 성경읽기법이 바로 시빌 콤플렉스를 불러온다. 묵상은 바로 성경읽기를 분해해서 단절된 신탁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에 대항하는 최고의 방법이다.
묵상은 일관된 하나님의 계시의 세계 속으로 들어간다 묵상은 텍스트와 친구가 되기 위해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상상력을 잘 사용하는 것이다.
기도는 삼위일체의 사귐에서 시작되고 끝나며 그 안에 존재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는 하나님께 다가가는 최고의 규범적인 접근 방법이다.
대부분의 성경은 우리를 향해서 말한다 반면 시편은 우리를 위해서 말한다-아타나시우스-
기도는 하나님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마데테레사 수녀가 한 번은 스페인전역을 여행하면서 소달구지에서 떨어져 진흙투성이 개울에 빠졌는데 하나님을 향해 주먹을 흔들며 말했다 “하나님! 당신이 이런 식으로 친구들을 대하시니 당신에게 친구가 별로 없지요‘
-기도는 대화요, 외침이요 부르짖음이요, 항의요, 구체적인 자기표현이다.
기도는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 통제에서 신비로, 자아에서 영혼으로, 즉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우리는 우리가 읽는 것을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말씀 안에서 계시하신 것에 적극적인 삶으로 반응해야 한다. 기도는 하나님이 성경에서 계시하시는 창조와 구원 그리고 공동체에 참여하는 행위이다.
콘템플라티오(관상)
관상은 지성소에서의 예배와 세상에서의 일을 하나로 묶어주는 고리-발타자르-
관상의 삶은 필연적으로 일상적 삶, 사랑의 정신으로 행하는 작은 성실과 섬김의 삶인데 그 사랑의 정신은 우리의 임무를 가볍게 해주고 그 임무에 따뜻함을 전해준다
“나는 진정한 일상의 신비가는 격리된 채 거룩을 관상하는 사람들, 고요한 침묵가운데 신과 같은 깨달음을 도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소음으로 가득찬 삶, 자신을 소진시키는 다른 사람들의 요구와 끝도 없는 의무들로 가득찬 삶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해 내는 사람들이라고 믿게 된다-노리스-
관상이란 신의 임재가운데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즉, 신이 존재하는 상황 속에서 인간의 존재를 관상하는 것이다.
관상은 성경의 계시에 굴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을 우리 안에 받아들이고 허세를 부리지 않으면 그것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조용하고 사람만나기를 꺼려하고 은둔하고 고요하고 온화한 것을 뜻하지 않는다.
관상은 읽는 바를 살아내는 것을 의미한다.
관상의 삶은 태초에 있었던 그 말씀이 육신이 되셨으며 현재에도 ‘주의 말씀대로 나에게 이루어지이다’라고 반응할 때 계속해서 우리 가운데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삶이다.
사탄은 탈육신의 존재다-예수님은 성육신
사탄은 육신을 입을 수 없는, 생명을 입을 수 없는 존재다 사탄이 이 세상의 일에 끼어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를 ‘매개체’로 사용하는 것이다. 사탄이 자신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육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성경에 계시되고 읽혀진 모든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안에서 잉태되고 태어나기 위해서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육신이 되신 말씀인 그리스도는 우리의 육신에서 육신이 되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번역하는 일에 협력하는 사람들이며 이 텍스트를 읽고 난 다음에는 그것을 살아내는 그책을 먹는 사람들이며 그 다음에는 이 성경을 우리가 살고 있는 거리에서 듣는 있는 그대로의 언어로 옮기는 사람들이다. -맺은말-
저자의 희망으로 기록된 메시지 성경의 탄생 배경
그 무엇 보다도 성경은 하나님의 일과 언어에 참여하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나는 읽는 말씀과 사는 말씀 사이의 유기적인 연관성을 내 친구들이 보도록 돕고 싶었다.
나는 비인격적으로가 아니라 인격적으로 읽는 사람, 단지 자신의 삶의 수준을 높이는 데 사용할 수 있는 정보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정한 자기 자신을 살기 위해서 성경 읽기를 배우는 사람들의 무리를 모으고 싶었다.
나는 성경을 스스로 자기 자신의 신이 될 수 있는 종교적인 자료를 모으는 수단으로 이용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할 준비가 된 태도를 버버리는 소비자의 방식에 대항하고 싶었다.
우리가 자기 자신에게만 몰두하는 것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이 세상의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그 광활한 자유로 들어가게 하고 싶었다.
나는 어떻게든 그 원래의 어조, 자신의 진짜 인생과 연결되게 해주는 아름다움과 소망에 대해 깨어 있도록 우리를 찔러 일깨우는 그 선지자적이고 복음적인 ‘음성’을 회복하고 싶엇다.
유진 피터슨의 [이 책을 먹으라]-퍼온글
렉치오 디비나(영적 읽기)- '성경을 따라서' 발전하는 삶의 방식
1. 렉치오 : 텍스트를 읽는다
2. 메디타티오(meditatio) : 텍스트를 묵상한다
3. 오라티오(oratio) : 텍스트를 기도한다
4. 콘템플라티오(contemplatio) : 텍스트를 산다
* 독서보다 선행 듣고 말하는 것.
읽기의 출발점 은유 고찰 시작.
렉치오(읽는 것)는 선형적 행위이지만 영적(디비나)독서는 그렇지 않다. 네 요소가 다양한 순서와 배치로 반복되는 고리 모양의 나선형과 흡사하다.
예수님은 율법학자의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는 질문에 "네가 어떻게 읽느냐?"(눅 10:26)라고 질문하신다. 율법학자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말하였다(신 6:5, 레 19:18). 예수님은 옳다는 칭찬과 함께 "그대로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강도만난 자와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하시며 "누가 이웃이냐?"는 질문을 다시 율법학자에게 하신다. 율법학자는 자비를 베푼 자라고 대답하는데 예수님은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신다.
이와 같이 성경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네가 어떻게 읽느냐?"라는 예수님의 질문을 하고 있다. 또한 "듣느냐?", "기도하느냐?", "사느냐?"라고 질문하여 올 때 독자는 그에 대한 답을 자신의 삶으로 말하는 것이 렉치오 디비나의 목적이다.
* 기억할 것
성경 번역에 있어서 하향번역과 함께 상향번역(킹 제임스 흠정역, King James Version 1611)에 대해서도 경고를 하고 있다. 그 실례로 옥시린쿠스와 우가리트의 발견을 들고 있다. 참고로 킹제임스 번역은 틴데일 번역을 모태로 하면서도 구어체인 틴데일과는 대조적으로 매끄럽고 위엄있는 번역이다.
ㄱ. 옥시린쿠스(Oxyrhynchus, 1897년 이집트) -
카이로에서 25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나일 강변의 옥시린쿠스 마을의 쓰레기장에서 발굴한 종이 쪽지(파피루스 종이)에는 헬라어가 적혀 있었다. 영국인 버나드 그렌펠(Bernard Grenfell)과 아서 헌트(Arther Hunt)가 본 그 헬라어는 고전헬라어(정부나 도서관 문서, 전문 작가들의 글로 표현된)와는 달리 일상에서 사용되는 헬라어(편지, 청원서, 계산서, 쇼핑 목록, 청구서와 영수증 등)였다. 헬라어 신약 성경은 약 5,000개의 단아를 사용하고 있다. 그중에서 약 500개가 신약 성경에만 고유하게 나오는 것으로 여겨졌는데 일상적인 삶에서 사용되는 헬라어 표현이었던 것이다.
일용할(에피우시온, epiousion, 마 6:11, 눅 11:3) 양식(아르톤, arton): 이것은 그날의 양식, 충분히 먹을 양식을 의미한다. 그 당시의 일반 성도들이나 독자들은 쉽게 알고 사용하던 단어였다.
목자장(아르키포이멘, archiphoimen) - 'arche'(아르케, 장)와 'poimen'(포이멘, 목자)의 복합어로 그 당시의 두세 명의 목자들을 감독하는 농부, 감독, 요즘 말로 십장 정도로 부를 만한 사람을 가리킨다.
ㄴ. 우가리트(Ugarit, 1923년, 시리아의 고대 왕국) 점토판 -
히브리인들의 이웃, 그들과 함께 살았던 사람들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 주었고 , 이스라엘이 어떻게 가나안 문화 '속에 있되 거기에 속하지 않으면서' 살아 남아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킬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더 잘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해주었다. 성경 번역과 관련해서 특별히 관심을 갖는 부분은 두 가지다. 하나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의 언어와 문화에 제압당하지 않으면서 그것을 공유했다는 것이다. 가나안의 언어를 사용했고, 가나안의 문체와 리듬으로 시를 썼으며, 가나안에 사는 신에 대한 용어(엘)를 사용했다. 그러나 그들은 가나안의 문화를 가져다가 독특하고 고유하게 그들만의 것을 만들었다. 둘째는 그들이 가나안과 비슷한 문학 형식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그 내용은 근본적으로 달랐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신들에 대한 화려한 신화를 만들어 낸 가나안 사람들과는 달리 자기 조상들의 가족 이야기(내러티브)를 성실하게 기록했다.
서양 고대문명 비밀 풀리나 -옥시린쿠스 파피루스
“유레카(Eureka· 알아냈다)! 고대 비밀의 신비가 드디어 풀렸다.”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는 18일 옥스퍼드대학 연구진이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의 걸작들이 담긴 파피루스 문서를 해독해냈다고 보도했다. 신문은 “고전학 연구의 큰 성과”라며 서양 고대 문명의 지도를 다시 쓰는 제2의 르네상스를 맞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파피루스 뭉치의 소유권을 가진 이집트 탐사회는 다음달 중 해독이 끝난 원고들을 1차로 발간할 계획이다.
신문에 따르면 ‘옥시린쿠스 파피리(Oxyrhynchus Papyri)’라고 불리는 이 파피루스 뭉치는 19세기 말 이집트 중부 옥시린쿠스 마을의 쓰레기더미에서 발견됐다. 워낙 심하게 훼손돼 해독이 불가능한 탓에 이 문서들은 상자 800여개에 담긴 채 옥스퍼드대 새클러도서관에 100여년 동안 잠들어 있었다.
최근 옥스퍼드대 연구진은 미국 브리검영대학 적외선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해독에 착수한 지 나흘 만에 여기에 수록된 40여만개의 작품들을 밝혀내는 데 성공했다.
수록된 작품들은 놀랍게도 기원전 5세기 희곡작가인 소포클레스의 ‘에피고노이’를 비롯해 에우리피데스와 헤시오도스 같은 고대문학 최고 작가의 극본과 서사시들이다.
연구진은 신약성서와 같은 시기에 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사라진 기독교 복음서들을 발견할 가능성도 높은 것으로 내다봤다. 고전학자들도 이번 해독으로 지금까지 발견된 그리스·로마 작품의 20% 정도가 더 늘어날 것이라며 환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