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자
아니 에르노 지음, 정혜용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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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

아니 에르노 지음, 정혜용 옮김

열린책들 펴냄



그녀는 늘 소통하고 싶은 욕구는 지니고 있었다. 언어 기능은 손상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아귀가 맞는 문장들. 발음은 정확하나, 그저 사물로부터 분리되어 상상의 세계에만 복종하는 단어들. 그녀는 자신이 살고 있는 삶이 아닌 삶을 꾸며 냈다. 파리에 가기도 했고, 금붕어 한 마리를 사기도 했고, 누군가 자신을 남편의 무덤으로 데려다 주기도 했다. 하지만 가끔씩 인식했다. [내 상태가 돌이킬 수 없게 될까봐 두렵구나.] 혹은 기억했다. [나는 내 딸이 행복해지라고 뭐든지 했어.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걔가 더 행복한 것 아니었지.]

102쪽


엄마는 본인이 치매에 걸리기 전에 기도원이나 요양원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말을 했었다.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이기도 하고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 미뤄둔 주제, 엄마의 기억이 옅어짐을 받아들이는 과정. 아니 에르노는 그 과정을 작품으로 내놓으며 어머니, 그녀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그녀의 태어남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한 여자>는 아니 에르노가 그녀의 어머니의 삶에 대해 기록한 단상이다.

아니 에르노의 어머니, 그녀는 이브토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을 여공으로 보냈다. 좀 더 지적이고 싶었던 욕구, 신분 상승의 욕구가 있었던 그녀. 그녀는 욕심이 많은, 주는 것을 좋아하는 여성이였다. 노동자 계층이지만 좀 더 점잖은 집안의 남자와 결혼해 결혼생활을 일구며 폭 넓은 사회의 일원이 된다. 그리고 겉으로 보여지는 어떤 사회적인 용모와 지적 수준을 신경쓰게 되는, 자기답지 않은 모습을 어색해하는 평범한 여성이다.


그녀가 젊은 시절 갈구했던 것은 지금의 그것과 비슷해보이기도 한다. 즐기고 싶은 마음과 동시에 반듯한 처녀 아이로 보이고 싶은, 상충되는 욕구는 지금도 존재한다. 물론 요즘은 개성을 표현하며 어른들이 말하는 "반듯한"의 기준이 많이 완화되었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아직도 통용되는, 보수적인 부분에 부합하고자 하는 성인도 많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아니 에르노 본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사회가 여성에게 요구하는 특정부분은 통시적이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네가 다른 애들에 비해 넉넉하지 못하다고 입에 오르내리는 건 싫어.]

그녀의 가장 깊은 욕망은 자신이 누리지 못했던 것 전부를 내게 주는 것이었다.

51쪽

아니 에르노는 어머니의 삶을 되짚으며 자신에게 했던 모든 표현(폭력, 애정 과잉, 꾸지람)들을 그녀의 개인사, 사회적 신분과 연결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 부분은 세상의 모든 딸들이 엄마를 이해하는 과정인 듯하다. 무조건적인 애정에서 원망으로, 이해와 수용으로 거쳐가는 어머니를 향한 다양한 감정들은 그녀가 떠난 후에야 비로소 정리된다.



어머니는 우리가 생명이 깃드는 순간에 처음 만나는 대상이다. 또한 딸, 여성이라면 언젠가 한 생명이 깃드는 순간 처음 만나게 될 대상이 된다. 그래서 딸이 바라보는 어머니에 대한 시각은 뭐라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하다. 나를 낳아주었기 때문에 따라오는 원망들, 왜 나를 낳은거지? 나를 사랑한다면서 고작 이렇게? 등등. 반면 여성이기 때문에 느끼는 어떤 동질감도 존재한다. 세월의 풍파를 맞으며 그 때는 그랬기 때문에 어머니도 어쩔 수 없음을 체감한다. 그리고 어머니만큼 닳고 닳아 그녀를 고스란히 받아들일 수 있을때 즈음, 이미 늦은 경우가 많다.

아니 에르노의 <한 여자>는 어머니가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이유, 그렇게 사는 것이 최선이었음을 딸의 입장에서 이해해나가는 과정을 적어내려간다. 그리고 본질적으로 우리도 그렇게 될 것임을 암시한다.


앞으로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 못할 것이다. 여자가 된 지금의 나와 아이였던 과거의 나를 이어 줬던 것은 바로 어머니, 그녀의 말, 그녀의 손, 그녀의 몸짓, 그녀만의 웃는 방식, 걷는 방식이다. 나는 내가 태어난 세계와의 마지막 연결고리를 잃어버렸다.

1986년 4월 20일 일요일 ~ 1987년 2월 26일

1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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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딸 아니 에르노 컬렉션
아니 에르노 지음, 김도연 옮김 / 1984Books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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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딸

아니 에르노 지음, 김도연 옮김

1984북스 펴냄


60년이 지났지만 나는 여전히 '착하다'는 단어에 걸려 넘어지고, 당신, 그리고 부모님과 연결하여 그 의미를 풀어보려 애씁니다. 이 단어의 의미가 번쩍이자마자 나의 위치가 일순간에 바뀌었으니까요. 부모님과 나 사이에 이제는 당신이 있어요. 보이지 않지만 사랑스러운 당신이. 나는 당신에게 자리를 만들어주기 위해 멀찌감치 밀려났습니다. 당신이 영원한 빛에 둘러싸여 하늘 위를 날아다니는 동안 난 그늘로 떠밀려갔지요. 무남독녀라 누구와도 비교당하지 않고 살던 내가 비교의 대상이 된 거에요. 현실은 서로 배척하는 단어들이 만들어냅니다. 더/덜, 또는/그리고, 전/후,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삶이나 죽음 같은 단어들에 의해.

22-23쪽


다큐멘터리 작품을 좋아한다. 과한 액션과 작위적인 표현은 거부감이 들어 몰입을 저하시킨다. 그런 면에서 문학 작품도 덤덤한 문체를 선호하는 편이다. 최근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아니 에르노의 작품을 읽는 중이다. 현재 <다른 딸>과 <한 여자>를 구매했다. 많은 작품 중 굳이 두 작품을 선택한 이유는 한 여성으로서 아니 에르노가 바라본 다른 여성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녀와 가장 밀접한 두 여성이 아니 에르노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도 알고 싶었다. 그 중 먼저 읽은 <다른 딸>은 6살에 디프테리아로 명을 달리한 나(아니 에르노)의 언니에게 보내는 편지다.




나에게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언니가 있다. 언니는 내가 태어나기 이년 반 전에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 나의 부모님은 그녀로 하여금 언니의 존재를 알지 못하게 하려는 듯 했다. 결국 알아버렸지만 말이다.





 

"쟤는 아무것도 몰라요. 아이가 슬퍼하길 원치 않아요."

(...)

"그 아이는 쟤보다 훨씬 착했어요."

착하지 않은 아이. 그 아이가 바로 나예요.

1950년 어느날 들었던 이야기를 기점으로 아이였던 나는 삶의 곳곳에 언니를 투영한다. 건강하지 않았던 나, 파상풍으로 죽을 뻔 했던 나, 외동을 바랬던 부모님에게 당신이 죽지 않았다면 태어나지 않았을 나. 나는 죽은 언니를 '당신'이라 칭하며 끊임없이 말을 건넨다. "현실은 서로 배척하는 단어들이 만들어낸다", 당신은 착한 소녀이자 성녀처럼 세상을 떠났지만 악마였던 나는 결국 살아남아 지옥같은 삶을 살아낸다. 그것은 당신이 내게 쥐어준 선물이자 고통이며 <다른 딸>과 여타 다른 글을 쓰기 위함이다.




나는 내 자리에 누워있는 당신을 봅니다. 죽은 아이는 나예요.

36쪽

죽을 뻔한 나와 이미 죽어버린 당신의 사이에 남아있는 것은 없다. 이미 당신의 존재를 알아버린 순간부터 나는 당신과 함께할 수도, 존재했던 당신을 부정할 수도 없게 되었다. 6살에 사라진 당신에 대한 부모님의 기억은 좋은 것들 뿐이다. 성스럽고, 착하고, 순종적인 것들이다. 6살의 나이를 훌쩍 넘어버린 나는 남아있다는 이유만으로 불손한, 호기심많은, 성스럽지않은 존재가 된다. 그래서 1950년 그날, 당신의 존재를 알게된 그 날부터 행복하고 건강한 나의 일부는 죽어버린다.





피터 팬은 부모가 자신의 요람 위를 굽어보는 것을 본 후에 열린 창문으로 달아났어요. 어느 날 다시 돌아 오지만 창문은 닫혀 있지요. 요람에는 다른 아이가 있습니다. 그는 다시 달아나버려요. 그는 영원히 자라지 않을 겁니다. 이 버전의 동화에서, 피터팬은 집집마다 다니며 곧 죽을 아이들을 찾아 나섭니다. 당신은 이 이야기를 알지 못했어요. 나도 중학교 2학년 영어 수업 전에는 몰랐으니까요. 나는 그 이야기를 전혀 좋아하지 않았어요.

88쪽


아니 에르노의 <다른 딸>은 만나지 못했지만 한 켠에 영원히 남아있을 언니를 향한 염원과 동시에 1950년 그 날 이후 죽어버린 자신의 일부를 기억하는 작품이다. <다른 딸>을 관통하는 주제는 처음에 남긴 단락이 아닐까 싶었다. 세상이 굴러가기 위해 어느 한 쪽만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것. 만일 아니 에르노에게 남매, 자매가 있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유일한 자녀를 바랬던 그들의 조물주에게 아니 에르노는 "당신"의 대체품이자 영원히 채워질 수 없는 결핍을 가진 존재로 비춰졌을 가능성도 있다. 그래서 아니 에르노는 <다른 딸>로서 보이지 않는 독자들에게 말을 건넨다. 아니 에르노, 그녀가 살아있는 동안 불멸의 존재일 무덤 속 작은 성녀에게도 이 속삭임이 닿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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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계열 합격 끝판왕 세트 - 전6권 - ‘고교학점제’부터 ‘학생부종합전형’까지 120% 활용 필독서 EBS 대표강사, 입시전문가들의 시크릿 컨설팅 끝판왕 시리즈
정동완 외 지음 / 꿈구두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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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 해 조금씩 변하는 입시를 다각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책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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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신예찬 - 라틴어 원전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45
에라스무스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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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의 위치가 가장 정점일 때, 우신예찬은 등장했다. 에라스무스의 목숨을 건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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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보이지 않는 지도책 - 세상을 읽는 데이터 지리학
제임스 체셔.올리버 우버티 지음, 송예슬 옮김 / 윌북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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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란 역사의 가장 최신버전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런 역사를 통시적으로 펼처놓은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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