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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딸 ㅣ 아니 에르노 컬렉션
아니 에르노 지음, 김도연 옮김 / 1984Books / 2021년 6월
평점 :
다른 딸
아니 에르노 지음, 김도연 옮김
1984북스 펴냄
60년이 지났지만 나는 여전히 '착하다'는 단어에 걸려 넘어지고, 당신, 그리고 부모님과 연결하여 그 의미를 풀어보려 애씁니다. 이 단어의 의미가 번쩍이자마자 나의 위치가 일순간에 바뀌었으니까요. 부모님과 나 사이에 이제는 당신이 있어요. 보이지 않지만 사랑스러운 당신이. 나는 당신에게 자리를 만들어주기 위해 멀찌감치 밀려났습니다. 당신이 영원한 빛에 둘러싸여 하늘 위를 날아다니는 동안 난 그늘로 떠밀려갔지요. 무남독녀라 누구와도 비교당하지 않고 살던 내가 비교의 대상이 된 거에요. 현실은 서로 배척하는 단어들이 만들어냅니다. 더/덜, 또는/그리고, 전/후,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삶이나 죽음 같은 단어들에 의해.
22-23쪽
다큐멘터리 작품을 좋아한다. 과한 액션과 작위적인 표현은 거부감이 들어 몰입을 저하시킨다. 그런 면에서 문학 작품도 덤덤한 문체를 선호하는 편이다. 최근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아니 에르노의 작품을 읽는 중이다. 현재 <다른 딸>과 <한 여자>를 구매했다. 많은 작품 중 굳이 두 작품을 선택한 이유는 한 여성으로서 아니 에르노가 바라본 다른 여성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녀와 가장 밀접한 두 여성이 아니 에르노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도 알고 싶었다. 그 중 먼저 읽은 <다른 딸>은 6살에 디프테리아로 명을 달리한 나(아니 에르노)의 언니에게 보내는 편지다.
나에게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언니가 있다. 언니는 내가 태어나기 이년 반 전에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 나의 부모님은 그녀로 하여금 언니의 존재를 알지 못하게 하려는 듯 했다. 결국 알아버렸지만 말이다.
"쟤는 아무것도 몰라요. 아이가 슬퍼하길 원치 않아요."
(...)
"그 아이는 쟤보다 훨씬 착했어요."
착하지 않은 아이. 그 아이가 바로 나예요.
1950년 어느날 들었던 이야기를 기점으로 아이였던 나는 삶의 곳곳에 언니를 투영한다. 건강하지 않았던 나, 파상풍으로 죽을 뻔 했던 나, 외동을 바랬던 부모님에게 당신이 죽지 않았다면 태어나지 않았을 나. 나는 죽은 언니를 '당신'이라 칭하며 끊임없이 말을 건넨다. "현실은 서로 배척하는 단어들이 만들어낸다", 당신은 착한 소녀이자 성녀처럼 세상을 떠났지만 악마였던 나는 결국 살아남아 지옥같은 삶을 살아낸다. 그것은 당신이 내게 쥐어준 선물이자 고통이며 <다른 딸>과 여타 다른 글을 쓰기 위함이다.
나는 내 자리에 누워있는 당신을 봅니다. 죽은 아이는 나예요.
36쪽
죽을 뻔한 나와 이미 죽어버린 당신의 사이에 남아있는 것은 없다. 이미 당신의 존재를 알아버린 순간부터 나는 당신과 함께할 수도, 존재했던 당신을 부정할 수도 없게 되었다. 6살에 사라진 당신에 대한 부모님의 기억은 좋은 것들 뿐이다. 성스럽고, 착하고, 순종적인 것들이다. 6살의 나이를 훌쩍 넘어버린 나는 남아있다는 이유만으로 불손한, 호기심많은, 성스럽지않은 존재가 된다. 그래서 1950년 그날, 당신의 존재를 알게된 그 날부터 행복하고 건강한 나의 일부는 죽어버린다.
피터 팬은 부모가 자신의 요람 위를 굽어보는 것을 본 후에 열린 창문으로 달아났어요. 어느 날 다시 돌아 오지만 창문은 닫혀 있지요. 요람에는 다른 아이가 있습니다. 그는 다시 달아나버려요. 그는 영원히 자라지 않을 겁니다. 이 버전의 동화에서, 피터팬은 집집마다 다니며 곧 죽을 아이들을 찾아 나섭니다. 당신은 이 이야기를 알지 못했어요. 나도 중학교 2학년 영어 수업 전에는 몰랐으니까요. 나는 그 이야기를 전혀 좋아하지 않았어요.
88쪽
아니 에르노의 <다른 딸>은 만나지 못했지만 한 켠에 영원히 남아있을 언니를 향한 염원과 동시에 1950년 그 날 이후 죽어버린 자신의 일부를 기억하는 작품이다. <다른 딸>을 관통하는 주제는 처음에 남긴 단락이 아닐까 싶었다. 세상이 굴러가기 위해 어느 한 쪽만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것. 만일 아니 에르노에게 남매, 자매가 있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유일한 자녀를 바랬던 그들의 조물주에게 아니 에르노는 "당신"의 대체품이자 영원히 채워질 수 없는 결핍을 가진 존재로 비춰졌을 가능성도 있다. 그래서 아니 에르노는 <다른 딸>로서 보이지 않는 독자들에게 말을 건넨다. 아니 에르노, 그녀가 살아있는 동안 불멸의 존재일 무덤 속 작은 성녀에게도 이 속삭임이 닿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