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자이 오사무 삶의 조각을 단편적으로 보여준 <인간실격>을 통해 그를 처음 접했다. 작품의 주인공 요조는 스스로 부끄럽지 않게 살고 싶어하지만 허송의 덫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삶을 포기하고자 몇 번이고 시도하지만 모두 실패하고 비참한 삶을 보여주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그래서 다자이 오사무를 생각하면 고등유민(高等遊民 : 유복한 집안의 자제로 태어났지만 끊임없이 방황하며 연명하는 인물)의 무기력한 모습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이와 다르게 세계문학전집 <달려라 메로스>에서는 <달려라 메로스>외 <옛이야기>, <축견담> 등 다자이 오사무의 평화롭고 안정된 시기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특히나 <달려라 메로스>는 일본 교과서에 수록되어 전국민적 작품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이니 죽지 못해 살았던 다자이 오사무라도 이 때만큼은 살고 싶지 않았을까 한다.
<옛이야기>는 일본 전래동화에 다자이 오사무의 해학이 섞인 이야기로, 그의 철학과 유머러스함을 발견할 수 있었다. 특히 우라시마 씨(한글 제목 : 용궁에 간 어부 이야기) 작품을 단순히 괴롭힘 당하는 자라를 구해주고 용궁을 다녀오는 전개가 아닌, 다자이 오사무 본인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우라시마를 통해 말하는 듯 했다. 아무래도 부잣집 도련님으로 태어나 가난한 문인의 길을 택하며, 타고난 반골 기질을 발산하였던 그였기에 평생 따라다녔던 비평을 떨쳐내진 못했던 것 같다. 간혹 반성적인 모습을 보이지만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는 없어보였다. 인간과 본인에 대한 혐오, 증오로 차있었기 때문에 자살이라는 도피처를 끊임없이 방문했던 것 같다.
반면 <황금풍경>, <달려라 메로스>에서는 인간에 대한 애정이 담뿍 담겨있었다. 인간에 대한 불신과 염세적인 표현으로 점철된 작품이 더 이상 읽고 싶지 않을 때 찾고 싶은 작품들이다. 어쩌면 그는 인간에 대한 희망을 놓고 싶지 않았을까, 그러나 결국 타인을 통해 갈구할 수 밖에 없는 그 희망을 작품을 통해 승화시킨 것 일지도.
한 번쯤 다자이 오사무의 삶을 살아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겉멋 들었다는 말을 들어도, 무능력하다는 자기혐오에 빠져도 상념에 젖어 느끼는 대로 표현하는, 조금은 제정신이 아닌 사람이 되어보고 싶었다.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은 기분 나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은, 저변의 모습을 들춰낸 것 같아 한편으로는 불편했다.
개는 싫다. 어쩐지 나를 닮은 구석마저 있는 듯한 느낌이라, 더더욱 싫다. 참을 수가 없다. 그 개가 나를 유독 좋아하여 친근감을 표명하기에 이르고 보니, 당혹스럽달까 분하달까 뭐라 말할 수가 없다.
축견담 中, 37쪽
인간은 기쁨 속에서조차 불안을 느끼는 걸까요? 인간의 말은 모두 꾸밈이에요. 잘난 척하는 거죠. 불안이 없는 곳엔 구태여 천박한 꾸밈 따윈 필요 없겠지요.
우라시마 씨 中, 180쪽
세상 사람들이란, 서로 뻣뻣한 인사를 하고 조심하고 그러다 서로 피곤하게 평생을 보내는 걸까요? 나는 사람을 만나는게 싫습니다.
기다리다 中, 122쪽
그는 누구나 가질 법한 동족 기피를 무덤덤하면서 날카롭게 표현했다. 인간사에 죄가 깊었던 다자이 오사무의 삶을 이렇게 간접적으로나마 살아보았으니 그의 삶을 표방해보는 것은 접기로 한다.
삶의 본능은 죽음의 본능을 따르고 있다. 프로이트의 죽음 충동 개념에 의하면, 죽음에 관한 충동은 삶의 충동에 종속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즉, 삶이 있기에 죽음이 있는, 불가분한 양가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다자이 오사무의 죽음의 냄새를 풍기는 문학은 본디 그가 원하는 삶을 살지 못했기 때문에 집필되었다. 다자이 오사무 자신은 그의 작품이 죽지 못해 사는 젊은이들의 표상이 되었음을 알고 있을까.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독자라면 삶과 인간에 대한 마지막 애정이 담긴 <달려라 메로스>를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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