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과학으로 설명되지 않는 일들이 있다. 사랑을 하고, 무모한 도전을 하고, 희생을 한다. 인류가 문명을 꽃피우며 과학은 이러한 인류의 행동 양상을 분석하고 원인과 결과를 규명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지를 연구하며 스스로의 존재를 자명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인과관계가 우리 존재를 증명하는데 필수 요소가 아니라면 어떨까? 정말 우리가 특별한 이유 없이 이 세상에 등장해 언젠가는, 애초에 없었던 존재처럼 사라진다면 정말 우리 존재는 아무 것도 아닌 걸까?
카롤릭에서는 이 세계를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창조론적 관점에서 바라본다. 그들의 시선에서 세상은 특정한 기원, 거대한 폭발로 인해 생겨난 지구가 아닌, 이 땅은 "그분이 바라보시기 좋았던" 곳이다. 과거 종교(창조론)와 과학(진화론)은 팽팽하게 대립했던 시절이 있었다. <모든 것의 시작과 끝에 대한 사색>에서 신이 창조한 영역을 인간이 해석하는 것은 오만하다는 자들과 개연성 없는 창조 신화를 비과학적이라 비난하던 것과는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저자는 이 개연성 없음, 즉 무질서가 과학에 필수 불가결하다고 언급한다. 과학이라함은 관찰과 증명을 통해 보편적인 법칙과 원리를 발견하는 학문 아닌가? 그러나 저자는 질서와 체계, 분류가 따라오는 이 학문이 자연의 무질서와 예측 불가능한 존재들로 인해 발전하고 번성한다고 설명한다. 무질서와 질서는 불가분의 존재라는 것. 덕분에 이분법적으로 자리 잡았던 과학에 대한 개념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자연이 규칙적이지 않기 때문에 규칙적인 과학 법칙이 등장한다는 사실은, 작지 않은 충격을 안겨주었다.
마음이 복잡하고 삶이 고되다고 느껴지는 시기가 있다. 그럴 때 우울감에 깊숙히 빠져들기 보다 다른 생각을 하며 마음의 고됨을 옅게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하는 방법 중 하나는 우주에 관련된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작고도 작은지 받아들이는 것이다.
비슷한 맥락으로 저자 앨런 라이트먼은 어린시절 무(無)에 대한 경험을 공유한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그는 육체에서 벗어나 전 우주적인 경험, 희노애락을 뛰어넘은 미미한 존재로써의 감각을 기억하고 있다. 과학자인 저자가 이런 영적인 경험을 함으로써 과학을 사색으로써 집필할 수 있었으리라. 그래서 언젠가 생명을 잃고 자연으로 돌아가는 유한한 존재인 인간은, 현실의 슬픔보다는 기쁨과 충만함에 집중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다보니 언젠가 닥칠 고통도 조금은 경감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