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돌프의 사랑 문지 스펙트럼
뱅자맹 콩스탕 지음, 김석희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랑이란 무엇일까. 사랑의 대척점에 위치한 감정까지 포함한 것일까 혹은 불순물을 제외한 사랑만이 사랑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흔에 읽는 카네기 - 인간관계 자기관리 그리고 삶의 철학
데일 카네기 지음, 서상원 옮김 / 스타북스 / 202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간관계론과 자기관리론은 전자책으로 갖고 있다. 잊을 때마다 새롭게 다가오는 카네기의 가르침, 핵심을 선별한 이 책도 궁금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납치된 서유럽 - 혹은 중앙 유럽의 비극 쏜살 문고
밀란 쿤데라 지음, 장진영 옮김 / 민음사 / 202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팔라츠키에 따르면, 중앙 유럽은 서로 존중하면서 공동으로 뭉친 강력한 국가의 보호 아래 제각기 다양한 특성을 살릴 평등한 민족들의 중심이 되었어야 했다. 비록 제대로 실현된 적은 없지만 중앙 유럽의 모든 위대한 인물들이 공유했던 이 꿈은, 그럼에도 여전히 강력했고 영향력이 있었다. 중앙 유럽은 유럽과 유럽의 다양한 풍요의 응축된 이미지, 매우 유럽적인 소(小)유럽, 즉 최소의 공간에 최대의 다양성이라는 규칙에 따라 잉태된 민족들의 축소화한 유럽이라는 모델이고자 했다. 그런 중앙 유럽의 코앞에서 최대 공간에 최소 다양성이라는 정반대의 규칙을 내세운 러시아에게 어떻게 중앙 유럽이 공포를 느끼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48쪽


<납치된 서유럽>의 저자 밀란 쿤데라는 본디 체코 태상이다. 그러나 정치적인 이유로 추방되어 프랑스로 망명한, 2019년까지도 프랑스 작가였던 체코 작가이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4년 전 즘 읽은 기억이 있다. 작품 중 Einmal ist Keinmal(한 번은 중요치 않다, 한 번 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이라는 독일 속담이 등장한다. 본디 이 문장은 실수, 역경 등 중요하지 않은 사건을 가볍게 넘길 때 사용하는 어구다. (예 : 사소한 실수를 했을 때, 한 번 정도는 괜찮잖아?) 그러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주인공 토마시는 이 문장을 "한 번만 산다는 것은 전혀 살지 않는 것과 같다"고 비약해, 쾌락을 탐닉하는 자신을 합리화하는 용도로 사용한다. 당시 그런 토마시를 완전히 이해하기는 힘들었다. 그러나 밀란 쿤데라의 <납치된 서유럽>을 읽으며, 밀란 쿤데라 작품의 등장인물들에 스며든 사상적 배경과 허무주의를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었다.

<납치된 서유럽>은 1975년 자국에서 추방당한 밀란 쿤데라가 추방 이전인 1967년에 체코슬로바키아 작가 대회 연설문 [문학과 약소 민족들]과 1981년 프랑스 시민권을 획득한 후, 1983년 프랑스의 지식인 저널 [데바]지에 기고한 시론 [납치된 서유럽]을 한데 묶은 작품이다. 때문에 <납치된 서유럽>에서는 유럽 강대국에 직접적인 압박을 받았던 나라의 자국민으로서, 자국(혹은 집권세력)으로부터 쫓겨나 망명된 이방인으로서 밀란 쿤데라의 입장을 종합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영화 프라하의 봄(The Unbearable Lightness of Being)

[문학과 약소 민족들]에서 등장하는 밀란쿤데라는 체코 문학의 가치와 영향력을 역설하며 체코 작가들의 정신이 곧 체코 민족의 생존을 결정지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문학과 약소 민족들]을 연설한 1967년 당시는 체코의 민주화 운동인 프라하의 봄(1968)이 일어나기 직전이다. 체코는 소련의 협력으로 2차 대전 이후 나치 세력을 성공적으로 소거하였으나 냉전시대가 도래하면서 또 다른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동유럽 소국들을 단일국으로 만들고자 했던 러시아의 입장과 민주화를 갈망했던 체코의 입장이 상충되면서 체코 민족 자체의 근간이 위협받기 시작한다. [문학과 약소 민족들]을 읽으며 자국을 그토록 사랑했던 밀란 쿤데라가 왜 추방되었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정부의 입장으로 대변된 소련의 눈에는 자국의 자유를 추구하는 그가 눈엣가시로 밖에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출처 : greenblog.co.kr

그런데, 공산주의는 러시아 역사에 대한 부정일까, 아니면 오히려 그것의 실현일까?

그것은 분명 러시아 역사에 대한 부정(가령 러시아가 지닌 종교적 심성에 대한 부정)인 동시에 실현(러시아의 중앙집권적 성향과 제국주의적 꿈의 실현)이다.

러시아 국내로만 보자면, 첫 번째 양상인 불연속성이 더 눈에 띈다. 예속된 국가들의 관점에서보자면 두 번째 양상인 연속성이 더욱 뚜렷하게 느껴진다.

48-49쪽

[납치된 서유럽]은 현재 러시아와 동유럽 세력간의 팽팽한 긴장을 서술했다고 봐도 무방한 작품이다. 1983년 [납치된 서유럽]이 집필될 당시 체코는 민주화로 향하는 걸음을 떼기 위해 꿈틀거리고 있었다. 독일은 나치 집권시절 러시아의 앙숙이었다. 체코는 지리적으로 가까운 독일민족의 영향을 받아왔다. 중앙 유럽 국가들은 유럽내에서 이방인이자 약소민족으로 여겨져왔다. 게르만 혹은 슬라브라는 단일 미족을 꿈꾸는 세력들에 의해 그들의 독립성은 철저히 묵살되어왔으며 체코는 민족 소멸의 기로에 놓여있었다. 밀란 쿤데라는 다양성의 소멸이 곧 서유럽의 위기로 이어질 것이라 경고한다. 한 민족의 정체성이 사라지는 순간 전체주의의 공포가 다시 유럽대륙을 덮을 것임을 기억해야한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Es muss sein!" 이라는 문장이 생각난다. 필시 그래야만 한다는 독일어 문장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제목과 대비된 꼭 그래야만 한다는 첫 문장이 아이러니 했다 응당 그래야만 하는 "의무"는 강제성을 띠고 있기 때문에 "참아야 함"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밀란 쿤데라의 <납치된 서유럽>을 읽으며 그가 왜 작품에서 무의미와 가벼움을 다룰 수 밖에 없었는지 통감했다. 언제든 뿔뿔히 흩어져 사라질 수 있는 먼지같은 나라들,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결국엔 "통용"이라 불리는 강제적인 가치관을 주입 시켰던 세력들. 밀란 쿤데라는 선택만을 해야만 했던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는 자유를 침해받는 일체의 행위를 거부하면서도 압박과 굴욕에 엉킨 인물들을 등장시키지 않았을까. <납치된 서유럽>을 읽으며 한 때 가장 좋아했던 작가인 밀란 쿤데라라는 사람의 의연함을 다시 한 번 느껴본다.


리딩투데이 지원도서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눈에 보이지 않는 지도책 - 세상을 읽는 데이터 지리학
제임스 체셔.올리버 우버티 지음, 송예슬 옮김 / 윌북 / 202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눈에 보이지 않는 지도책

제임스 체셔, 올리버 우버티 지음 / 송예슬 옮김

윌북 펴냄




단순히 작아서 무언가가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한눈에 들어오지 않아 놓치게 된다. 계속 자라나는 도시들, 머리 위에 떠다니는 오염 물질, 발아래서 데워지는 토양 같은 것들. 어떤 보이지 않는 것들은 긴 세월에 걸쳐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다. 이를테면 젠트리피케이션이나 녹아내리는 빙하 같은 것들. 역사를 돌아보면 한 세대가 사라지면서 보이던 것들이 보이지 않게 되기도 한다. 데이터는 특정 순간을 포착해 보존하는 힘을 지녔다. 네거티브 필름을 보려면 현상 과장을 거쳐야 하듯, 데이터 세트에 감춰진 패턴은 지도와 그래픽을 통해 바로 볼 수 있다. 눈으로 보아야 확대하고, 비교하고, 기억할 수 있다.

- 17쪽, 서문


<비주얼 박물관>이라는 책을 아는 사람이 있을까? 책을 잘 버리지 않는 편이지만, <비주얼 박물관>은 그 중 6살 때부터 보며 지금까지 갖고 있는 책이다. 어릴 적부터 겪어보지 못했던 세상에 호기심이 많았다. 그래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사진들이나 세계 곳곳을 압축해두었던 그 책을 가장 좋아했다. 그런데 이 <비주얼 박물관>에 버금가는 책을 발견했다. 바로 <눈에 보이지 않는 지도책>이다. 팝업북의 느낌과 더불어 화려한 삽화, 지도에 대한 자세한 설명까지 무엇 하나 거를 부분이 없는 책은 오랜만이다. 어른이 된 지금, <눈에 보이지 않는 책>을 몇번이고 들춰본다. 아마 어린 시절에 만났다면 이 책을 끼고 살았을 것이 분명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지도책

<눈에 보이지 않는 지도책>을 아이와 함께 읽어야 하는 몇가지 이유를 정리해보았다.

1. 다채로운 색상의 삽화와 활자



<눈에 보이지 않는 지도책>은 화려한 색상의 활자와 삽화가 이목을 끌기 때문에 글을 읽기 싫어하는 아이들도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지도는 지리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매체지만 단순히 "땅그림" 이 아니다. 목적에 따라 도면 안에 표현할 수 있는 것이 다른데, <눈에 보이지 않는 지도책>은 그 점을 다채롭게 살려냈다. 단순히 그림으로 표현한 부분도 있는가 하는 반면, 위 그림처럼 글씨체의 크고 작음과 그 색깔로 대륙과 나라를 단순하게 표현하기도 한다. 그래서 같은 지상의 각기 다른 정보를 다채롭게 찾아볼 수 있다.

2. 최근 데이터 기반 지도

2020년대 초반이지만 종종 2010년대 기반 정보로 작성된 자료를 접한다. 2010년대 자료라고 해서 신빙성이 아주 떨어지는 것은 아니나, <눈에 보이지 않는 지도책>처럼 최대한 현재와 가까운 시점의 정보를 기반으로 작성된 데이터는 신뢰성이 상대적으로 높다. 2020년대의 자료가 집계되지 않은 부분을 제외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지도책>은 최신 정보를 책에 담기 위해, 2020년대 자료를 사용했다. 특히 빠른 변화를 보이는 자료는 대부분 5년 내 자료를 사용했다는 점이 인상깊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지도책> 처럼 방대한 자료를 한꺼번에 다루는 서적의 경우 기존에 있었던 자료를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3. 흥미로운 구성


자칫 지루할 수 있을 수 있는 지도책을 조작북 형식으로 구성했다. 넓은 범위의 대륙을 다루는 부분은 한 번, 많게는 두 번 접힌 쪽부터 세로로 구성되어있는 쪽까지, 호기심이 많은 학생들이라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부분들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지도책>의 이런 구성은 아이뿐만 아니라 어른들의 시선도 사로잡는다. 만일 어릴적 교과서 <사회과부도> 책이 이런 형식이었다면 보다 다양한 학생들이 지리에 관심을 갖지 않았을까? 어릴적 책에 담긴 작은 지도의 도시들을 가까이 보아야했던 기억이 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지도책>의 조작북 형식은 비단 흥미를 이끌어낼 뿐만 아니라 독자가 작은 부분을 조금 더 세밀하게 관찰할 수 있도록 읽는 이를 배려한 구성임을 느낄 수 있었다.

4.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지도


신문, 책자 등을 통해 수도 없이 많은 지도과 도표를 접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지도책>은 독자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사실을 보다 선명한 지도와 도표로 제공한다. 우리가 자료를 지도와 도표, 그래프 등으로 표현하는 이유 중 하나는 가시성이다. 자료를 글로 풀어서 설명하는 것 보다 한 눈에 들어오는 그림이 더욱 효과적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알고 있지만 글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그 어려운 일을 <눈에 보이지 않는 지도책>이 해냈다. 글로도 만나기 어려운 생소한 자료들을 독자가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간단한 그림과 설명을 덧붙였다. <눈에 보이지 않는 지도책>은 지도로써 기능 뿐만 아니라 정보를 효과적으로 전달해주는 서적이다.


어릴 적, 학기가 시작하기 전 교과서를 수령하며 어떤 교과서에 어떤 그림이 들어있을까? 궁금해했던 기억이 난다. 처음부터 책을 좋아하는 사람도 많지만, 책과 가깝지 않은 독자일수록 다채로운 삽화에 조금 더 눈이 가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간혹 다채로운 삽화에 혹해 후회하는 책 소비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지도책>은 다르다. 단단한 표지와 신비로운 삽화가 이목을 끌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매력은 상상 이상이다. 아이와 어른이 함께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책이면서, 집에 두고 언제든 읽을 수 있는 그런 책, <눈에 보이지 않는 지도책>을 추천한다.

📚 출판사 지원도서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신예찬 - 라틴어 원전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45
에라스무스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2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신예찬

에라스무스 지음, 박문제 옮김

현대지성 펴냄


(...) 모든 친밀한 관계의 원천이자 아버지인 쿠피도는 어떻습니따? 정작 그는 앞을 전혀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의 눈에는 '아무리 못생긴 사람도 아름다워' 보입니다. 그는 여러분이 각자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아름답다고 여기게 만들어 청춘 남녀가 사랑에 빠지듯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사랑에 빠질 수 있게 합니다. 이런 일들은 흔하게 일어나고 있으며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곤 하지만, 사실 인생을 즐겁게 만들고 인간 사회를 하나로 묶어주는 것은 이런 우스꽝스러운 일들이랍니다.

66-67쪽


<우신예찬>, 미뤄둔 숙제같았던 이 책을 드디어 읽었다. 미뤄둔 숙제라고 표현하기가 웃기지만, 좋아하지 않았던 윤리 선생님의 수업시간마다 <우신예찬>을 들으며 곧 죽어도 저 책만은 읽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었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읽을 기회가 생겼지만 기를 쓰고 피했던 이 책, <우신예찬>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다시 만난 <우신예찬>은 오히려 반갑기까지했다.

저자 에라스무스는 부모를 여의고 수도원에서 어린시절을 보내며 엄격한 규율을 지켜야하는 생활을 보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규칙과 관례를 지켜야할 수도원은 타락과 부패로 가득했다. 에라스무스 본인 또한 성직자의 사생아로 태어났기 때문에 이같은 사실은 그의 사상에 많은 영향을 끼쳤으리라 추측한다. 당시 교회는 청빈한 삶을 지향했던 예수 그리스도와 달리, 종교를 고착시키고 유지하기 위해서 돈과 명예를 추구해야했다. 그런 모순적인 배경과 인간에 대한 고찰을 풍자와 해학으로 풀어낸 작품이 바로 <우신예찬>이다.


현자 = AI ?

(...) 스토아 철학자였던 세네카는 모름지기 현자라면 모든 감정에서 자유로워야한다고 역설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인간 자체를 제거하고,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고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새로운 신을 '창조'해냈습니다.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의 모든 감정이 결여된 대리석 조각상을 만들어 놓고는 이것을 현자라고 이름붙였습니다.

(...) 하지만 다른 모든 사람들은 그런 현자를 본다면 마치 괴물이라도 본 듯이 무서워하며 도망치고 말 것입니다.

(...) 스토아 철학자들이 말하는 완벽한 현자란 인간이 아니라 짐승입니다. 만일 투표를 한다면 그런 사람을 어느 국가가 관리로 선출하겠으며, 어느 군대가 사령관으로 뽑겠습니까? 또한 어떤 여자가 그런 남편을 원할 것이며, 어떤 사람이 그를 손님으로 초대하겠으며, 어떤 노예가 그를 주인으로 모시려 하겠습니까? 그보다는 누구든 수많은 어리석은 자들 중에서한 명을 선출해 자신들을 다스릴 자로 세우지 않겠습니까? 자기 자신이 어리석기에 어리석은 자들을 다룰 줄 알고, 어리석은 자들의 말을 들을 줄도 알아 자기와 같은 대부분의 사람을 기쁘게 해불수 있는 사람 말입니다.

- 30장 현자는 사람이 아니다 中

우신(愚神)이라 해서 '어리석음'에 대한 이야기만 다룰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에라스무스는 ‘어리석음'을 다양한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에라스무스는 인문주의 철학에 한 획을 그은 위대한 학자로, 신이 아니라 인간이 중심될 것을 역설한다. 그래서 명목만 있는 스토아 철학을 전면으로 비판해 '어리석음' 또한 인간이 갖추고 있어야할 결함이자 덕목으로 지적하고 있다. 에라스무스가 정말 직관적이라고 느끼는 부분 중 하나는 스토아 학자가 주장한 '현자'의 존재는 인간이라기보다는 대리석에 가깝다고 발언한 부분이다. 스토아 학자들이 원했던 현자는 현시대 AI와 비슷한 존재가 아니었을까? 축적된 데이터와 다양한 변수들과 상호작용 하면서 예외성을 배제한, 그런 존재 말이다.

<우신예찬>의 30장 [현자는 사람이 아니다]를 읽고 어느 인간이 AI가 인간을 통치할 수 있도록 독려할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현재 스토아 학자들이 훌륭한 현자의 표본으로 원했던 존재가 우리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시대임에도 아무도 그를 현자라고 부르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감정이 만들어내는 부스러기에 번뇌를 느끼는 사람들은 AI의 삶을 부러워할수도 있겠다. 그러나 인간이 'AI'가 된다는 것, 즉 <우신예찬>에서 언급했듯 '현자'를 추앙하고 그렇게 되는 것을 원하는 것은 현실성없는 우상에 가깝다는 것이 에라스무스의 입장이다.


어리석음으로 하여금 온전해지는 삶?

(...) 열렬한 사랑에 빠진 사람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이 아니라 자기가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살아갑니다. 자신에게서 벗어나 사랑하는 대상 속으로 들어갈수록 행복과 기쁨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영혼이 육체에서 벗어나려 하고 자신의 신체 기관을 적절히 사용하려 하지 않는 상태란 의심할 여지 없이 미친 것이고 광기이며, 또한 그렇게 부르는 것이 맞습니다.

(...) 그렇다면 기독교인들의 영혼이 그토록 갈망하는 천국의 삶이란 어떤 것입니까? 그곳에서는 영혼이 더욱 힘이 세져 육체를 집어삼키고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 (...) 이 세상에서살아갈 때부터 천국에서일어날 변화에 대비해 육체를 정화하고 약화시켰왔기 때문에 그런 일을 쉽게 해낼 것입니다.

(...) 기독교인이 되어 삶이 변해도 우신인 나의 영역은 제거되지 않고 도리어 완전해집니다. 이런 삶의 변화를 아주 조금이라도 경험한 사람들은 일종의 광기 비슷한 것을 겪기 때문에, 앞뒤가 맞지 않거나 인간의 관습에 어긋난 말을 하고 정신나간 소리를 하는가 하면 표정이 수시로 바뀝니다.

(...) 그렇게 광기에 빠져있는 동안 자신이 가장 행복했다는 것만 압니다. 그래서 제정신으로 돌아온 것을 한탄하며 그런 광기 가운데서 영원히 살아가게 되기만을 소원합니다. 미래의 행복을 살짝 맛보기만 해도 이렇습니다.

- 67장 기독교인이 받을 최고의 상은 광기다 中

르네상스 시대에 금서로 지정된 <우신예찬>의 '우신'의 연장선에 그들이 믿었던 '신'이 존재하고 있다?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종교가 있었고, 지금은 잘 참석하지 않지만 종종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느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종교인 분들도 계시기에 일반화하기엔 어렵지만, 대부분의 이론은 현생은 죽음 뒤의 삶을 위한 준비 과정 정도로 보는 것이 보통이다. 현생을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천국과 지옥으로 제2의 삶이 완전히 갈리기 때문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신은 자애로우며, 온전히 우리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생명이 붙어있는 지금의 삶보다 영혼이 떠난 뒤를 약속하며 절제하고, 순종적인 믿음을 요구하고 있다니. 에라스무스가 언급한 "제정신"은 "현실감각"이 아닐까 싶었다. 신의 요구대로라면 삶의 제한이 많아진다. 삶을 꾸려나가기 위해서 꼭 필요한 재화를 밝혀서는 안 되고, 교리를 어길 수도 있는 과학적 지식을 추구하는 행위를 해서도 안 된다. 그렇게 신은 우리에게 부지불식간에 어리석음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어리석은 자들만이 천국의 단 맛을 볼 수 있다는 점은 나도 모르게 비소가 지어졌다.


<우신예찬>이 딱딱하기만 할 것이라 생각한 것과 달리, 지금도 통용되는 부분이 있어 흥미로웠다. 에라스무스는 "우신"이라는 존재 외에도 철학자, 수도사, 교황 등 당대 최고의 권력을 가졌던 이들 모두를 아주 시원하게 비틀고, 품격있게 꼬집어 비판했다. 에라스무스의 의도가 파악되지 않았을 시절, <우신예찬>을 처음 읽었을 때는 그저 신에 빗댄 세상 이야기 정도로 읽혔을 수도 있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용 대부분이 직접적인 단어는 피하며 은유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신예찬>이 요지경인 세상을 비꼰 작품의 대표격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 읽으니, 에라스무스의 표현들이 예술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역시, 고전은 언제나 독자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출판사 지원도서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