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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 1~2 (리커버 특별판 + 박스 세트) - 전2권
미겔 데 세르반테스 사아베드라 지음, 안영옥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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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버린 신의를 찾는 두 남자의 긴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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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문학동네 시인선 135
이원하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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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하지도 덜 하지도 않은, 단단한 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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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도 잘해요 (헝겊책)
애플비 편집부 엮음 / 애플비 / 2011년 4월
24,500원 → 22,050원(10%할인) / 마일리지 1,220원(5% 적립)
2012년 07월 09일에 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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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
조 로지 그림 / 문학동네 / 2004년 1월
7,500원 → 6,750원(10%할인) / 마일리지 37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6월 5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2012년 07월 09일에 저장

얼굴
존 포드햄 그림 / 문학동네 / 2004년 1월
7,500원 → 6,750원(10%할인) / 마일리지 370원(5% 적립)
2012년 07월 09일에 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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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김재혁 옮김 / 이레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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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영화를 보다 잠깐 한눈을 판 사이에 중간 장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 사이, 한나의 머리는 하얘졌고,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게 되었고, 어느새 형량을 다 채워 출감을 가디라고 있었다. 그리고 풋풋한 냄새를 풍기던 소년은 머리가 희끗한 중년 신사가 되어 할머니가 된 한나를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삶에서 선명하게 각인되었던 그때의 시간들은  주인공의  머리 색깔만큼이나 흐릿해져 있었다. 

사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마음이 불편했다. 독일이 배경임에도 불구하고  영어로 대화하는 것이 영 거슬리긴 했지만(사실, 이는 애교로 넘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란 생각이 든다.) 영화 마케팅처럼 케이트 윈슬렛의 정사신은 아름다웠고, 그녀는 아카데미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을 만한 연기를 보여주었다. 과하지도 않은 연기와 복잡한 내면을 담담하게 연기한 윈슬렛의 연기는 군더더기 없었다. 그녀의 출세작 <타이타닉>을 보지는 못했지만, 내가 보기엔 그녀는 그때보다 훨씬 더 뛰어난 내밀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고 생각했다.(내적, 외적 모두 다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내내 찜찜했던 것은 이런 장점들 때문에 정작 분명해야 하는 것들이 흐릿해졌기 때문이다. 물론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를 이 정도로 솔직하면서도 세련되게 보여준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찬사받아 마땅하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평론가들이 그런 찬사를 퍼붓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도 나는 왜, 이들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는 것일까? 왜, 왜, 왜

 영화는 소년과 여인의 사랑을 그리면서 나치와 홀로코스트라는 예민한 문제를 자연스럽게 이들 사랑과 교차시킨다. 그리고 이들 사랑이 단순히 한 소년의 성장통으로 치환되지 않고 여전히 아물지 않는(결코 아물수 없는) 인류의 상처임을 환기시킨다. 이들의 사랑과 나치, 홀로코스트의 문제가 오버랩되는 지점에 한나라는 여인이 서 있다. 그녀는 문맹이지만 지나치게 아름답고, 성실하다. 많은 평론가들이 지적했듯이 영화에서 한나의 '문맹'은 매우 중요하게 작용한다. 즉 그녀는 문맹이기 때문에 나치의 악행과 자신의 행위의 올바름의 판단할 수 없다. 유대인을 '죽음의 문'으로 이끌면서도 그녀는 지나치게 선량한 태도로 그들에게 책을 읽였다. 그리고 그녀는 특유의 성실함으로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교회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영화에서도 잠깐 나온다는 <예수살렘의 아이히만>의 아이히만처럼 한나는 '타인의 관점에서 생각할 능력이 없는 사람', 즉 '사유의 진정한 불능성'에 처해있는 사람이다.    '악의 평범성'으로 대변되는 순전한 무사유는 결국 인간에게 홀로코스트라는 씻을 수 없는 만행을 저지르게 만든 것이다. 한나 아렌트가 직접 예수살렘에 가서 아이히만의 재판을 지켜 본 것은 바로 이런 '순전한 무사유'가 초래하는 비극을 알리고자 한 것이었다. 하지만 아렌트가 아이히만 재판에서 발견한 것은 이런 인간의 어리석음과 무사유가 한낯 개개인의 품성이나 능력으로 환원시키려는 인간의 어리석음뿐이었다. 나치의 만행이 어찌 독일 한 민족과 유대인만의 문제일 수 있는가? 전범재판이 열린다고, 누구가에게 죄를 부여한다고, 자신의 죄를 시인한다고, 이에 관심을 갖고 지켜본다고 홀로코스트에서 어느 누가 자유로울 수 있을까? 법이라는 테두리 안에선 반드시 누군간 책임을 져여 하겠지만 법적 책임이 없다해서 우리의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영화에서 한나의 범죄는 그녀가 문맹이기때문에, 그녀가 선량하기 때문에 용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한나가 자신의 죄를 시인한다고 해서 이 또한 감량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영화속 전범재판은 많은 평론가들의 지적처럼 홀로코스트에 대한 독일인들의 복잡한 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한나에 대한 남자주인공의 태도가 전후 독일지식인의 모습을 대변한다고 말하고 있다. 가령, 첫사랑처럼 떨칠래야 떨칠 수 없는 기억, 즉 이후 주인공의 삶 전체를 옭아매는 한나와의 사랑은 나치에 대한 전후 독일인들의 모습과 닮았고, 감옥에 있는 한나에게 책을 녹음에 주면서도 한나의 편지에 답장하지 않는 주인공의 모습은 진실을 직시하면서도 이에 선뜻 다가가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전후 독일의 모습과 비슷하다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전후 독일의 모습을 유추하기에 남주인공의 태도는 어정쩡하고 두루뭉술하다. 갑자기 떠난 한나에게 화가 났고, 전범재판에서 다시 만난 한나를 어쩔줄 몰라하고, 느닷없이 책을 녹음해주고, '옛날이 좋지 않았느냐'라는 한나의 질문에 나치이야기나 꺼내고..한나에 대한 남자의 이 알수 없는 마음은 영화에서 그다지 세련되게 설명되지 않는다. 남자주인공의 시점에서 영화가 진행된다는 점을 유념한다면 어쩌면 이 영화의 초점은 한나에게가 아니라 남자의 복잡한 내면에 가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연인이면서 범죄자인 한나에 대한 남자주인공의 마음은 복잡할 수 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결코 흐릿하게 처리되어서는 안될 문제이기 때문이다. 한나가 자살했음을 알고 그녀의 유품을 유대인 여인에게 건넸을 때도, 그는 한나의 연인으로서 유대인 여인에게 다가간다. 한나가 죽고, 한나를 자신이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모든게 순조롭게 끝날 것이라 그는 생각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유대인 여인의 단호한 거절에도 불구하고 남자의 감상적이고 지극히 사적인 태도는 별반 달라지지 않는다. 즉 영화속 남자가 보여주는 한나에 대한 태도는 시종일관 남자 개인의 역사에 제한된 지극히 사적인 데 있다. 그렇기에 남자가 영화에서 전후 독일의 복잡한 내면을 대변한다고 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인다.

 사실 이런 남자의 사적이고 감상적인 태도가 바로 영화가 흐릿해지는 지점이다. 영화는 홀호코스트라는 인류 전체의 범죄를 한나와 소년이라는 한 개인의 영역으로 국한시켜 해결하려고 한다. 한나가 문맹을 깨우치고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자살한다고 해서, 남자가 딸래미에게 자신의 은밀한 사랑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소년과 한나의 사랑이 아름다운 기억 저편으로 가는 것은 아니다. 독일 원작이 할리우드로 건너오면서 이런 정치적 희석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민족은 과거의 행위와 과실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떠맡는다'라는 한나 아렌트의 말처럼 우리가 인간의 존엄성을 가지고 지구에서 살아가고 있다면 홀로코스트 같은 인류범죄는(여긴엔 숱한 민간인 학살, 팔레스타인 문제 등이 모두 포함된다.이놈의 인류범죄는 아직도 여기저기서 들끓고 있다. 애석하게도.) 결코 흐릿하게 처리되어서는 보여져서는 안된다. 

 물론 정치적으로 올바르다고 해서 좋은 영화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때론 지나친 올바름이 영화의 미적 아름다움을 방해하는게 사실이다. 영화가 예술인 이상 영화적 미적 기준이 제 일 원칙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많은 한국평론가들이 이런 정치적 올바름에 너무도 후한 점수를 주고 있다. 하지만 역사를 다루는 데 있어 분명하게 다루어야 하는 사실이 윤색되거나 희석되어 보여지는 것은 정치적 올바름을 떠나 분명 영화 미적으로도 적절하지 못하다. <더 리더>가 불편했던 점은 바로 이 지점이 아니었을까 하다. 

<여담>
 어느 평론가는 케이트 윈슬렛이라는 지나치게 아름다운 여배우때문에 한나의 범죄행위가 다소 아름답게 미화되고, 이것이 너그럽게 용서된다며 사려깊지 못한 캐스팅이라며 볼멘 소리를 했다. 하지만 난 이 의견에 다소 생각이 다르다. 사실 인간은 아름다운 인간에 대해 상당히 너그럽다. 실제 재판과정에서 피고의 외모는 형량결정에 상당한 영향을 비친다는 연구결과도 있듯이 아름다움은 인간의 분별력을 흐릿하게 만드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영화에서 지나치게 아름다운 한나의 모습은 관객의 분별력을 흐릿하게 만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런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늘 분명하고도 단호한 판단을 견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역설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김태희같은 여인네가 용서해달라고 하면 어느 누가 그녀를 쉽게 뿌리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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