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의 폭력만 파괴적인 것이 아니다. 타자의 추방은 아주 다른 파괴 과정을, 즉 자기파괴를 작동시킨다. 타자의 부정성을 거부하는 시스템은 자기파괴적인 특징을나타낸다. - P8

오늘날에는 지각 자체도 "빈지 워칭 Binge Watching, 즉혼수상태에 이르도록 뚫어지게 보기의 형태를 취한다. 이는 어떠한 시간 제한도 없이 비디오와 영화를 소비하는 것을 말한다. 소비자들의 취향에 아주 잘 맞는, 그래서 그들의 마음에 드는 영화와 시리즈 들이 지속적으로 소비자들에게제공된다. 소비자들은 언제나 새로운 같은 것을 섭취하고소비가축처럼 살이 찐다. 혼수상태에 이르도록 뚫어지게 보기는 오늘날의 지각 방식 전반으로 일반화될 수 있다. 같은 것의 창궐은 악성종양이 아니라 혼수상태처럼 작동한다. - P8

동일자는 언제나 타자와 쌍을 이루어등장한다. 이에 반해 같은 것에는 이것을 제한하고 이것에형태를 부여해줄 변증법적인 상대방이 없다. 그래서 같은것은 형태 없는 덩어리로 창궐한다. 동일자는 타자에 대한차이 덕분에 형태와 내적 밀도, 내면성을 지닌다. 이에 반해 같은 것은 형태가 없다. 같은 것에는 변증법적인 긴장이 없기 때문에 서로 무관심한 병존, 서로 구별되지 않는창궐하는 덩어리가 생겨난다. "차이를 생각할 때만 동일자에 대해 말할 수 있다. - P9

신자유주의는 자신을 자유로 내세우지만, 이 자유는 광고다. 세계적인 것은 오늘날 보편적 가치들까지 잠식하고 있다. 그 결과 자유 자체가 착취당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실현한다는 망상에 빠져 자발적으로스스로를 착취한다. 자유의 억압이 아니라 자유의 착취가생산성과 효율성을 극대화한다. 이것이 신자유주의의 비열한 기본 논리다. - P29

니체Friedrich Nietzsche는 환대가 "너무나 풍요로운 영
"의 표현이라고 했다. 이런 영혼은 모든 단독적인 것들을 자신 안에 머물게 할 수 있다. "그리고 모든 생성 중인것, 떠도는 것, 추구하는 것, 덧없는 것을 나는 여기서 환영한다! 이제 환대는 나의 유일한 친교관계다."20 환대는화해를 약속한다. - P32

결국 우리는 언제나 낯선 것에 대한 우리의 선의와 인내심과 공평함과 온유함에 대한 보상을 받게 된다. 이 보상은 낯선 것이 천천히 자신의 베일을 벗고, 새롭고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이루어진다이것이 우리의 환대에 대한 그의 감사다."21 아름다움의 정치는 환대의 정치다. 이방인에 대한 적대성은 증오이며 추하다. 이 적대성은 보편적 이성의 결여를, 사회가 여전히 화해되지 않은 상태에 있음을 보여주는 징후다. 한사회의 문명화 정도를 보여주는 척도는 바로 이 사회의 환대, 나아가 친절함이다. 화해는 친절함을 뜻한다. - P33

오늘날에는 새로운 형태의 소외가 생기고 있다. 그것은더 이상 세계나 노동으로부터의 소외가 아니라, 파괴적인자기소외, 즉 자신으로부터의 소외다. 이 자기소외는 다름아닌 자기최적화 및 자기실현과 더불어 생겨난다. 성과주체가 자신을, 예컨대 자신의 몸을 최적화해야 할 기능적 객체로 지각하는 순간, 이 주체는 자신으로부터 서서히 소외된다. - P62

라지게 하는 것으로부터 이 문을 구해낸다."49 한트케는 시장으로 가서 반체로서의 사물들을 마음속에 그려낸다. 이사물들은 모두 다 무겁고 견고하다. 그것들은 자기 안에서고요히 존재한다. "숲처럼 어둡고 견고한 꿀단지, 칠면조처럼 커다란 스프용 닭, 특이한 노란색의 둥지 스파게티*혹은 왕관 스파게티, ** 때로는 맹수처럼 뾰족한 입을 가진,
때로는 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비대한 민물고기들이 그런 사물들이다.
디지털 질서는 점점 더 세계를 탈물체화한다. 오늘날에는 물체들 사이의 소통이 갈수록 줄어든다. 디지털 질서는 사물들로부터 그 물질적 묵직함과 질량, 고유한 무게, 고유한 삶, 고유한 시간을 빼앗고, 사물들을 언제든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며, 그럼으로써 반체 또한 제거한다. - P67

타자를 너로서 호출하는 것에는 위험이 없지 않다. 우리는 타자의 다름과 낯섦에 자신을 내맡길 각오를 해야 한다. 타자의 "너계기"에는 어떠한 안전장치도 없다. 그것은
"우리를 잡아채 위험한 극단으로 몰아가고, 검증된 연관을느슨하게 풀고, 만족보다는 의문을 더 많이 남겨놓으며,
안전을 뒤흔들고, 그래서 섬뜩하고, 그래서 불가결하다."96오늘날의 소통은 타자로부터 너-계기를 제거하고, 타자를
"그것ES"으로, 즉 같은 것으로 획일화하려고 한다. - P101

사랑은 언제나 다름을 전제로 한다. 타자의 다름뿐만 아니라 나 자신의 다름도 사랑의 전제다. 사람의 이원성은자신에 대한 사랑에 필수적이다. "다른 한 사람이 우리와다른, 우리와 대립되는 방식으로 살고 활동하고 느낀다는것을 이해하고 그것에 대해 기뻐하는 것 말고 무엇이 사랑이겠는가? 대립하는 것들을 기쁨으로 연결하려면 사랑은이 대립하는 것들을 제거해서도, 부정해서도 안 된다. 심지어 자기애도 한 사람 속에 있는, 서로 뒤섞을 수 없는 이원성(혹은 다원성)을 전제로 한다."" - P106

이다. 알랭 바디우Alain Badiou도 사랑을 "둘의 무대"10"라고부른다. 사랑은 세상을 타자의 시선으로 새롭게 창조하고익숙한 것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준다. 사랑은 전적으로다른 것이 시작되게 하는 사건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하나의 무대에서 살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생산관계가 의도적으로 사육하여 생산성을 증대시키기 위해 착취하는 에고는 병적으로 비대해져있다. 그래서 우리는 삶을 다시 타자로부터, 타자에 대한관계로부터 새롭게 보고, 타자에게 윤리적인 우선권을 인정해주어야 한다. 나아가 타자를 경청하고 타자에게 대답하는 책임의 언어를 다시 배워야 한다. 레비나스는 "말하기dire"로서의 언어를 다름 아닌 "한 사람의 다른 사람에 대한 책임" 10‘이라고 보았다. 오늘날에는 타자의 언어로서의저 "가장 근원적인 언어"가 과잉소통의 소음에 파묻히고있다. - P107

경청은 선사하는 것, 주는 것, 선물이다. 경청은 타자가 비로소 말을 시작하도록 돕는다. 경청은 타자의 말을수동적으로 좇아가지 않는다. 어떤 면에서 경청은 말하기에 선행한다. 경청은 타자로 하여금 비로소 말을 하게 한다. 나는 타자가 말을 하기 전에 이미 경청한다. 혹은 나는타자가 말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 경청한다. 경청은 타자를말하기로 초대하고, 타자가 그의 다름을 드러내도록 풀어준다. 경청은 타자가 자유롭게 말하는 공명의 공간이다. 그래서 경청은 치유할 수 있다. -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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