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제왕적 대통령‘을 비판적으로 논의하는 것은강력한 권력을 갖는 대통령의 권력과 권한이 제한되고 견제되지 않아야한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제왕적 대통령론의 담론적형태를 비판하는 것이다. 그것은 민주주의가 발전하지 않아서 만들어진문제의 원인을 특정 대통령, 특정 정부의 책임으로 돌리면서 현직 대통령을 공격하는 데 초점을 맞춤으로써 근본적인 문제가 아닌 표면적인 문제만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자신의 권한을 대폭적으로 분산·위임하면서 새로운 민주적 리더십을 발휘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것은 대통령 제도를 좀 더 잘, 민주적으로 작동하게 하는 차원의 문제로 접근해야지, 파당적 이해관계의 좁은 관점으로 대통령직의 수행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 P182
대통령이 정당의 수장으로서 정당을 사유물처럼 좌지우지할 수 있다면 그것은 대통령이 권위주의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정당이 약하기 때문이다. 정당이 사회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권력의 연원이 그 기반으로부터 나오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내 생각으로는 대통령을 둘러싼 문제의 중심에 정당이 위치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얽힌 인과의 고리들을 풀어나가는 데 있어 정당과 정당 체제를 민주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 된다. 그렇다면 오늘의 한국 정당 체제에 있어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그것은 정당과 사회의 거리를 줄여야 한다는 것, 즉 정당을 사회의 갈등에 뿌리내리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이 책에서 시종일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냉전반공주의가 한국의 정당 체제를 이념적으로 극히 협애한 틀에 가두어 놓았다는 것이다. - P184
안정적인 민주주의는 갈등 또는 균열의 표출을요구한다. 그래서 거기에는 지배적 지위를 획득하고자 하는 투쟁이 있을 것이고, 집권 정당에 대한 도전과 집권하는 정당들의 변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컨센서스-권력의 평화적 경쟁, 권력 안에 있는 사람들이 내린 결정에 대한 권력 밖에있는 사람들의 존중, 권력 밖에 있는 사람을 권력 안에 있는 사람들이 인정할 수있는 정치체제 없이 민주주의란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민주주의를 촉진하는 조건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균열과 컨센서스의 원천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 P185
내가 민주주의발전을 위해 정당을 강조하는 까닭은, 정당이 시민사회의 영역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시민사회를 국가에 매개하는 역할을 갖기 때문이다. 신생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당이 약한 것, 즉 민주주의가 약한 것은 서구 민주주의 정당의 제도화와는 달리 정당이 사회에 깊숙이 뿌리내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회의 균열에 뿌리를 두지 않기 때문에 선거 경쟁에서 정당 간의 차이는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그리고 정당과 사회 균열 사이의연계가 약하기 때문에 선출된 공직자는 투표자에 대해 책임성을 갖지 않는다. 책임성의 원리가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정치인의 말은 유권자와의약속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정치인들은 수사와 공약을 수 없이 토해내지만 그 말에 책임을 지도록 사회와 투표자에 의해 구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정당이 엘리트 이익과 사인적 보스주의에 기반하고 있는 이런 상황은 곧 기득 이익의 헤게모니를 보장해 주는 상황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게된다. 따라서 냉전반공주의와 접맥되어embedded 있는 낡은 정당 체제를해체하는 것, 다시 말해 정당의 기반과 구조 자체를 급속하고도 광범위한사회 변화가 만들어 낸 새로운 갈등 구조에 뿌리내리도록 변화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 P186
노동 배제의 가장 직접적인 효과는 민주화 이후 정당 체제가 지역주의적 특성을 갖는 것으로 조직화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지역주의적 정당 체제는 전통·근대, 우.좌, 사익·공익 간의 대립항에 있어 전통·우·사익적 요소를 강화하는 퇴영적 결과를 초래했다. 이는 사회를 특수 이익들의 수직적 분획으로, 그리고 특수 이익적 연줄 관계의 네트워크로 조직하는 데 기여했다. 바꾸어 말하면 지역주의적 정당체제는 정치 엘리트들의 퇴영적 행태의 결과물이라기보다는 한국 시민신천이 아침 만들어 내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 P241
한국의 정당 체제에서 정당이 대표하는 사회 균열의 범위와 기반은매우 협소한 반면, 정당 간 갈등의 강도는 실로 격렬하다. 역설적이게도이렇게 갈등의 강도가 높은 이유는 갈등의 범위가 매우 좁기 때문이다. 정당들의 이념적 기반이 매우 유사한 조건에서 정당 간 차이를 만들어 낼수 있는 소재란, 내용은 없이 감정을 자극하고 적대적 열정을 동원하는것밖에 없다. - P254
냉전반공주의의 헤게모니를 유지하고자 하는 기득 세력의 욕구는 대단히 강렬한 반면, 민주화 운동 세대와 20~30대의 젊은 세대는 냉전반공주의가 만들어 내는 억압적 의식과 규율에 저항적이다. 따라서 냉전탈냉전의 이슈는 단지 대북한 정책의 내용을 둘러싼 협소한 갈등의 범위를 갖는 것이 아니라 권위주의, 노동 배제, 차별과 특권의 체제, 이견의 억압, 획일주의 등 한국 사회의구조와 하위 체계에 내부화되어 있는 국내 냉전 구조 전반에서 발생한다. - P260
제도를 정치적 무기로 사용한다는 것은, 정치적 갈등과 경쟁을 정치 영역 밖으로 끌고 나가 일반적인 정치의 방법이 아닌제3의 무기로서 법과 제도를 동원하는 현상을 말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법의 해석자와 법의 집행자들의 영향력과, 헌법과 같은 사법적 권위가증대된다. 정치는 정치로되, 정치의 중심이 사회의 갈등과 균열을 대표하는 정당들 간의 경쟁과 타협이 발생하는 정치적 장이 아니라, 그리고 민의의 대표 기구인 의회가 아니라, 언론과 검찰, 사법부로 옮겨가는 것이다. 이런 현상을 우리는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라고 말할 수 있다. 쉐프터·긴스버그가 지적하듯 다른 수단의 정치가 부각된다는 것은, 정치가 정상적으로 작동할 때 정치 영역 내에서 제기되고 해소될 수 있는문제들이, 정치 영역 외부의 힘, 즉 언론이나 검찰 사법부의 힘을 거쳐 외부화되고 이들의 관장사항이 되는 상황이 많아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요한 것은 경쟁하는 정당이나 정치인들 스스로가 이런 상황을 불러들인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민주적 정치과정이 변질되고 약화되고 있다는 징후적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서 제도의 변화를 통해 정치 경쟁의 우위를 점하려는 첫 번째 경우보다, 제도를 정치 경쟁의 무기로 삼는이 두 번째 경우가 더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것이 정치의 경계를 축소하는 결과를 낳으면서 민주주의와 정치에 부정적인 지배적 담론이나정치관을 보다 직접적으로 불러들이기 때문이다. - P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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