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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산 - 김훈 장편소설
김훈 지음 / 학고재 / 2011년 10월
평점 :
구성에 입각하여 본 흑산
다른 김훈의 소설과 다르게 이 소설은 피카레스크식 구성을 지닌다. 독립된 이야기의 주인공들로 존재하던 주인공들이 얽히고 얽혀 결국엔 하나의 스토리로 엮인다. 보는 내내 케빈 베이컨 게임을 하는 기분이었는데, (여기서 케빈 베이컨 게임은 건너 건너 아는 사람을 연결하다 보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6단계 안으로 아는 사이라는 일종의 법칙이다.) 특히 마노리와 정약전의 관계가 그러하다. 마노리와 정약전은 전혀 상관 없는 인물처럼 보인다. 일단, 신분의 차이와 거리의 떨어짐 그리고 배교와 순교의 차이까지. 하지만 '마노리-이한직-황사영-정약전' 이렇게 둘은 세 단계로 아는 사이이며 이런 관계는 마노리와 황사영의 직접 대면으로 2단계로까지 좁혀진다. 아리, 강사녀, 길갈녀 등 전혀 관계 없어 보이던 사람들도 한데 엮이는데 옹기 가게 최 노인의 인맥이 교인들을 통해 가능했던 것처럼 천주교 안에서 이 관계가 이루어진다. '박차돌'이라는 존재는 소설 내에서 숨어 있던 관계들을 얽어내는 일종의 장치가 된다. 독자가 직접 소설 안에 들어갈 수 없는만큼 독자의 역할을 대리 수행해 주는 존재가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갑자기 왜 이런 시도를 한 것일까? 물론, 여러 인물을 다룰 때 피카레스크 구성만큼 편리한 장치도 없다. 대표적인 예로 조정래의 한강이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천주교의 교리를 잘 드러내기 위해 도입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느님 앞에서 만인은 평등하고 하나가 된다. 신분이 높든 낮든 각 챕터의 주인공이 되는 것은 만인의 평등을 의미하며, 결국 순교자로 다 같이 사형 당하는 것은 신 앞에서 하나가 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런 얽어짐 속에서 소외되는 인물이 정약전, 박차돌 같은 대립되는 입장이라는 점은 이 생각을 상당히 뒷받침한다.
그러나 이 구성에 큰 오류가 있다.
이 구성을 취하려면 작가의 치밀한 개연성이 필요했으나 이 소설에 큰 오류가 있었다. 바로 황사영의 죽음에 대한 것이다. 첫 번째는 황사영의 죽음을 정약전이 언제 알았냐 하는 것이며 두 번째는 그의 죽음의 방식이다.
a. 정약전은 언제 황사영의 죽음을 알았는가?
13페이지를 보면 "함께 매를 맞았던 동생 정약종, 막냇동생 정약용, 젊은 조카 사위 황사영이 무어라 진술을 하는지도 들리지 않았다." 라고 나와있다. 그렇다면 이 때 정약전은 황사영과 같이 잡혔으며 그의 죽음도 알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17페이지에서는 "정약종이 숨어버린 주문모 신부와 조카 사위 황사영의 이름과 은신처를 대지 않고...." 라는 문장이 있다. 여기서 보면 황사영은 잡히지 않고 숨어 있었다는 진술이 나오며 엇갈린다. 141 페이지를 보면 "정약종의 시체는 두 토막이었고 황사영은 여섯 토막이었다." 라는 구절로 보아 정약전은 이미 알고 있었던 듯 보인다. 만약 이것이 작가의 서술이었다 해도 이 부분에 집어넣어 혼란을 야기한 것은 상당한 문제점이다. 380페이지를 보면 정약전은 황사영이 죽은 지 삼 년 후에야 알게 되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앞의 진술은 나와서 안 된다.
b. 황사영은 어떻게 죽었는가?
다시 141 페이지를 보면 황사영은 능지처참 당해 죽었다고 나온다. 특히 시체가 여섯 토막이었다는 것을 강조할 정도로 강한 사실로 독자에게 다가온다. 그러나 정작 마지막에 황사영이 사형 당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참수형으로 끝난다. 이렇게 되면 황사영의 시체는 두 토막일 뿐이다. 이 부분 역시 정정할 필요가 있다.
왜 이런 오류가 생긴 것일까?
작가는 피카레스크식 구성을 사용하며 시간도 마음대로 넘나들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피카레스크 구성은 여러 인물의 행동을 보여줄 수 있으나 치밀한 플롯에 기반해야 한다. 이런 오류가 생겼다는 것은 아마 추측이지만 처음부터 피카레스크 구성을 갈 생각이 아니지 않았나 싶었다. 원래는 정약전을 주인공으로 '흑산'에 대한 얘기를 하려다 더 거대한 소재인 천주교 박해를 다두려고 했거나 황사영이라는 인물에 대한 애정이 생긴 탓에 급작스럽게 바꾼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생겼다. 천주교 박해를 다루기 위해선 황사영 외에도 순교자를 여럿 다뤄야 할 테고 그로 인해 피카레스크 구성을 취하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이 책을 읽은 사람들 중 의견이 '허무하다.'라는 것이 꽤 있었다. 여러가지 벌려 놓은 그물을 너무 급작스럽게 끌여당겼다는 느낌이 필자도 들었다. 아마 이 소설이 피카레스크 구성을 소화하기에는 분량이 짧지 않았나 싶다. 분량은 짧은데 여러 사람의 이야기가 나오는 탓에 어느 한 인물에게도 몰입하기가 쉽지 않았고 이 방대한 이야기를 서서히 매듭 짓기에도 분량은 턱 없이 부족했다. 차라리 이 소설이 두 권 분량이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끝으로
비록 구성 상의 모험적 시도로 오류를 범했고 그것이 몰입에 방해되기도 했지만 역시 문체만큼은 최고였다. 강약 조절이 잘 되는 문체였다. 강렬할 땐 굵게 낭만적일 땐 시처럼 여유롭게 그 조절은 이런 오류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책을 읽을 수 있게 했다.
또한, 우리는 배교자를 욕하는 입장에 서 왔다. 특히 종교를 가진 사람들 입장에서는 배교자는 지옥에나 떨어질 종자들이었다. 순교자는 숭고한 영웅들이었고. 그러나 김훈의 흑산은 어느 입장이든 결국 인간의 삶이라며 포용해 준다. 정약전이 흑산을 자산으로 고친 일이나 창대의
-자리가 있으면 사는 게 있지요.
라는 대사 등은 결국 순교자와 배교자는 현재냐 아니면 피안의 세계냐 하는 선택의 차일 뿐이지 옳고 그름이 아니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역시나 거대 담론보다 인간을 다루기 좋아하는 김훈의 소설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