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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산문 산책 - 조선의 문장을 만나다
안대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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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유만주의 '인지동천기'와 조지 오웰 '물속의 달' 엮어 읽기 

 

 

 영국의 조지 오웰과 조선의 유만주. 이 둘은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속의 달’과 ‘인지동천기’는 자신이 꿈꾸는 이상적 장소를 마치 실제 있는 장소인 듯 그려낸 점에서 유사하다. 또한, 이들이 그려낸 이상적 공간에서 당대 사회의 주류였던 문화를 읽어낼 수 있다. 조지 오웰의 글에서는 당대 영국에서 펍 문화가 유행했음을, 그리고 유만주의 글에서는 당대 조선에서 정원을 가꾸는 사람이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지 오웰이 그려낸 물속의 달이란 펍 속에서 우리는 당대 펍들이 어떠했는지 엿볼 수 있으며 인지동천기에서도 역시 조선 후기의 정원 구성 문화를 알 수 있다.

 

 서두에 ‘물속의 달’이나 ‘인지동천’을 찾아가는 길을 알려줘서 마치 실제 있는 장소를 말하는 듯하다. 하지만 길을 제시하면서도 이곳이 환상적 공간이라는 것을 은밀히 말해준다. ‘물속의 달’에서는 “버스 정류장에서 겨우 2분 거리이지만 샛골목에 있어서, 술주정뱅이들이나 무뢰한들이 토요일밤이라 해도 제대로 찾아오지 못하는 것 같다”라고 하며 ‘인지동천기’에서는 “버드나무를 경계로 삼아 지나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신비한 세계의 근원이 어느 곳에 숨어 있는지 찾아내지 못하게 한다.”하며 너스레를 떤다. 100%의 허구보다 1%의 진실과 99%의 거짓이 섞인 허구가 독자로 하여금 더 몰입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준다.

 

 

 이들이 원했던 것은 고즈넉한 문화 공간이었다. 그러나 이런 문화 공간을 설정하는데 있어 둘의 차이가 드러난다.

 

 조지 오웰이 다룬 ‘펍’은 ‘Public house'라는 원칭답게 서민들을 위한 공간이었다. 당연히 시끄러울 수밖에 없고 문화 공간으로서 약간은 부적합한 곳이다. 하지만 조지 오웰은 이런 서민적 공간을 박탈하고 자신만의 문화적 공간으로 만들기 위한 작업을 한다. 일반 바와 살롱 바를 분리시키고 피아노와 라디오를 없앤다. 자신이 원하는 이상향을 위해 원래 있던 기존의 관습을 철저히 파괴하고 변형하는 모습이다. 이는 자신이 살던 세계에 뿌리 깊게 박혀 있던 전체주의와 저항하려는 조지 오웰의 사상이 반영되어있다. 특히 술만 마시는 곳이라는 편견이 박힌 펍을 조용하고 가족이 함께 할 수 있는 문화적이며 다정한 공간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전쟁으로 각박한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쉼터를 원했던 그의 모습이 보인다.

 

 그에 비해 유만주의 인지동천기는 당대 지식인들이 꿈꾸던 정원에 대해 그리고 있다. 정원은 지식인과 상류층이 가질 수 있던 문화라는 점에서 조지 오웰의 ’펍‘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 조지 오웰은 자신만의 이상향을 만들기 위해 기존 문화를 변형했으나 유만주는 그 문화를 받아들이고 거기에 여러 가지를 보태기만 했다. 기존의 유교적 가치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려고 소품문 같은 문체를 받아들였으나 결국은 유교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작가의 한계가 반영되어 있다. 이는 유만주 뿐 아니라 당대 실학자를 비롯한 조선 후기 문학가들의 한계이기도 했다. 우리는 흔히 실학이 혁신적인 사상이라고 오해하는데, 사실 실학은 유학의 한계점을 보완하자는 차원에서 나온 것이지 유학 자체를 부정하거나 바꾸지는 못했다. 누구나 갈 수 있을 것 같은 ’물속의 달‘에 비해 인지동천에 감히 발을 들이기가 힘든 까닭은 철저히 묻어나오는 유학 사상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인지동천‘이라는 이름부터가 공자의 ’논어‘에서 따온 말이다.)

 

 

 글 속 시선의 방향에서도 둘의 차이가 드러난다. 조지 오웰의 시선은 주로 한 공간의 내부에서만 존재하며 나중에서야 뜰로 잠시 시선을 돌린다. 특이하게도 펍의 외관에 대한 묘사는 찾아볼 수 없다. 묘사하기를 즐겨했던 조지 오웰답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펍 문화 자체가 바깥 보다는 그 안에서의 대화를 중심으로 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주막은 어떠했는가? 안에서 술을 마시기보단 바깥마당에 놓인 상에서 술을 마셨다. 열린 공간인 것이다. 그에 비해 펍은 술집 ‘안’에서 마시는 닫힌 문화이다. 아마 이는 영국의 고립된 섬 문화와 열려 있는 반도 문화의 차이일지도 모른다.

 

 인지동천기는 밖에서 안으로 시선이 들어가고 있다. 마치 저자가 직접 그 정원에 걸어 들어가는 모습을 묘사한 것처럼 말이다. 폭포를 거슬러 올라가 결국엔 그 물의 근원인 연못에까지 도달하는 과정에서 다른 세부 사항까지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다. 이로 인해 ‘물속의 달’보다 글이 산만한 느낌이 들긴 하지만 직접 저자를 따라 정원으로 안내되는 실감을 느낄 수 있다. 성리학은 인간이 살고 있는 현실을 넘어 인간답게 살기 위한 형이상학적 논쟁을 펼쳤다. 밖에서 안으로 수그러드는, 점강법적 사상인 것이다. 인지동천기의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시선은 인간의 근원을 탐구했던 성리학적 사상의 반영이라고 여겨진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공간을 꿈꾼다. 그리고 그 이상향은 자신이 살고 있는 현실과 그 시대 사상을 기반으로 만들어진다. 같은 이상향인데도 무릉도원과 유토피아가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은 그들이 기반으로 한 사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둘의 글을 엮어 읽어 보니 하나 일치하는 느낌이 있었다.

‘실제로 이런 공간이 있었으면.’

그 모습이 어떠하든 이상향은 우리에게 꿈을 심어준다. 각박한 현실에서 숨 좀 돌리라고 우리를 손짓한다. 그곳이 어디든 간에, 한 번 가봐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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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 동안의 고독 - 1982년 노벨문학상 수상작 문학사상 세계문학 6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안정효 옮김, 김욱동 해설 / 문학사상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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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에 교양으로 '라틴 아메리카 문화의 이해'라는 수업을 듣다가 이 소설을 알게 되었다. 마술적 사실주의로 유명하다는 것만 알아두고 덮어두었는데 요새 너무 안 읽은 책들이 많다는 사실을 깨닫고 마침내 이 책을 집어들었다. 456페이지에 달하는 꽤나 두꺼운 책이었고 한 가문의 역사를 다룬 서사시적인 소설인데 주인공의 이름들이 혼동되서 약간 읽기가 힘들었긴 했다.
 

 이 소설은 서사시인데도 불구하고 순차적인 구성이 아닌 것이 특이하다. 이 소설의 묘미는 과거와 현재 미래를 넘나드는 데에 있다. 첫 장면은 부엔디아 가문의 2대인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이 총살 당하기 직전 아버지와 얼음을 보러 갔던 모습으로 시작한다. 그러다 몇 페이지 지나고 나서야 가문의 역사와 함께 마콘도가 창조되는 모습이 그려진다. 이렇게 순차적 구성을 무시하는 부분은 꽤나 많다.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의 간략적인 생애 얘기가 요약되어 제시된 후에 본격적인 아우렐리아노 대령의 생애가 자세하게 묘사된다. 대령의 아내 레메디오스가 죽은 후에야 그 부부의 신혼 얘기가 나오기도 한다.

 이 소설의 또 다른 특징은 메타 픽션이라는 것이다. 메타 픽션은 소설 속의 소설이라는 의미인데 바로 독자들이 읽는 소설 전체가 사실은 멜뀌아데스의 양피지 안의 내용이라는 뜻이다. 이 메타픽션의 다른 예로는 김영하의 '아랑은 왜'를 들 수가 있다. '아랑은 왜'도 이 소설과 비슷하게 끝 부분에 장치를 둔다. 이 소설에서는 멜뀌아데스의 양피지가 그러하다면 '아랑은 왜'에서는 주인공 소설가 박이 소설을 쓰는데 그 소설의 첫 문장이 전체 소설의 첫 문장이라는 것이다. 이런 메타픽션은 독자들에게 참신하게 다가온다. 비록 나는 '백년동안의 고독'의 양피지 이야기를 어디선가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서인지 별 감흥이 없었으나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 읽었다면 뭔가 색다른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이것이 진짜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소설인가? 아니면 멜뀌아데스라는 집시의 양피지를 그대로 기록한 것은 아닌가 라는 혼돈의 늪에 빠지는 것도 그 나름의 묘미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소설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마술적 사실주의'이다. 소설에 환상적인 기교를 넣는데 그 환상이 어색하지 않을 만큼 사실적으로 느껴진다. 이 소설에 환상적인 기교가 들어간다고 해서 판타지 장르라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환타지 문학은 그 환상이 실제로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허구라는 전제 하에 쓰여지지만 마술적 사실주의 속의 환상은 마치 전설과 같은 느낌을 준다. 정말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아니라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라는 느낌. 특히나 '백년 간의 고독'은 한 가문의 서사시를 다루는 내용이기에 이런 환상적 기교가 전혀 겉돌지 않고 잘 섞인 느낌이었다. 우리 나라에서도 왕조 실록을 쓸 때 허구 같은 이야기들이 들어있지 않은가? 소설 속에서 환상적 소재와 묘사들이 이 소설에 뼈대를 실어줬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문학에 판타지적인 요소를 넣으면 안된다." 라는 문학에 대한 선입견은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난 이 소설의 제목이 마음에 들었다. 바로 '고독'이란 단어 때문이었다. 만약에 이 단어 대신에 '외로움'을 넣었다면 작품 자체가 가볍게 느껴졌을 지도 모른다. 외로움과 고독은 비슷해 보이지만 다르다. 외로움은 개인이 느끼는 일시적 감성이지만 고독은 인간 본연이 가지는 뿌리 깊은 감정인 것이다. '백년 동안의 고독' 속의 인물들은 그 '고독'을 잘 보여준다. 그들의 고독은 이름과 함께 대물림된다. 호세 아르카디오 라는 이름을 가진 이들은 건장하고 씩씩하지만 아우렐리아노 라는 이름을 가진 이들은 내면적이고 탐구적인 본성을 지닌다.(하지만 본성이 환경에 따라 바뀌기는 한다.)  쾌활한 이들은 파티를 즐겨하거나 많은 여자를 가까이 하고 내면적인 이들은 멜뀌아데스의 방에 틀어박힌다. 그러나 그들은 고독하다. 그 고독을 피하기 위해 아우렐리아노 세군도는 파티를 열고 흥청망청 살고 레베카는 자신에게 욕정을 준 남자와 결혼하고 아우렐리아노는 아마란타 우르슬라와 근친상간을 한다. 그러나 그들은 고독해진다. 레베카는 남편을 저 세상으로 보내고 혼자 쓸쓸히 늙어서 죽으며 아우렐리아노는 아마란타 우르슬라와 사랑의 결실을 맺지만 그 결실은 개미한테 뜯어먹힌다. 부엔디아 가문 중 진정한 사랑을 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도 그 고독 때문일 것이다. 그나마 아우렐리아노가 금기를 넘어선 열렬한 사랑을 하지만 그들의 아이는 개미 떼한테 잡아먹히고 마니...

 마콘도는 처음에 고독한 곳이었다. 소규모의 사람들이 사는 원시적인 마을이었지만 죽은 사람이 한 명도 없어서 묘지가 없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외국 문물이 들어오면서 자유파와 보수파 간의 싸움이 일어나고 바나나 공장 사건 때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희생당하지만 그 진실은 땅 속으로 묻혀버린다. 이렇게 많은 희생을 감수하며 마콘도는 열린 곳이 되었으나 나중에는 부엔디아 가의 몰락과 함께 고독 속에 묻혀버린다. 고독과 함께 태어나서 고독과 함께 묻힐 지니. 그것이 아마도 인간의 숙명일지도 모른다.

 

 끝으로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이 있었다면 미녀 레메디오스의 승천이었다. 때에 물들지 않은, 인간과는 거리가 먼 초현실적인 미녀가 초현실적인 세계를 가는 모습이 사실상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보여준 마술적 사실주의의 최고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며 리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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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산 - 김훈 장편소설
김훈 지음 / 학고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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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에 입각하여 본 흑산 

 

 다른 김훈의 소설과 다르게 이 소설은 피카레스크식 구성을 지닌다. 독립된 이야기의 주인공들로 존재하던 주인공들이 얽히고 얽혀 결국엔 하나의 스토리로 엮인다. 보는 내내 케빈 베이컨 게임을 하는 기분이었는데, (여기서 케빈 베이컨 게임은 건너 건너 아는 사람을 연결하다 보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6단계 안으로 아는 사이라는 일종의 법칙이다.) 특히 마노리와 정약전의 관계가 그러하다. 마노리와 정약전은 전혀 상관 없는 인물처럼 보인다. 일단, 신분의 차이와 거리의 떨어짐 그리고 배교와 순교의 차이까지. 하지만 '마노리-이한직-황사영-정약전' 이렇게 둘은 세 단계로 아는 사이이며 이런 관계는 마노리와 황사영의 직접 대면으로 2단계로까지 좁혀진다. 아리, 강사녀, 길갈녀 등 전혀 관계 없어 보이던 사람들도 한데 엮이는데 옹기 가게 최 노인의 인맥이 교인들을 통해 가능했던 것처럼 천주교 안에서 이 관계가 이루어진다. '박차돌'이라는 존재는 소설 내에서 숨어 있던 관계들을 얽어내는 일종의 장치가 된다. 독자가 직접 소설 안에 들어갈 수 없는만큼 독자의 역할을 대리 수행해 주는 존재가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갑자기 왜 이런 시도를 한 것일까? 물론, 여러 인물을 다룰 때 피카레스크 구성만큼 편리한 장치도 없다. 대표적인 예로 조정래의 한강이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천주교의 교리를 잘 드러내기 위해 도입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느님 앞에서 만인은 평등하고 하나가 된다. 신분이 높든 낮든 각 챕터의 주인공이 되는 것은 만인의 평등을 의미하며, 결국 순교자로 다 같이 사형 당하는 것은 신 앞에서 하나가 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런 얽어짐 속에서 소외되는 인물이 정약전, 박차돌 같은 대립되는 입장이라는 점은 이 생각을 상당히 뒷받침한다. 

  그러나 이 구성에 큰 오류가 있다.  

  이 구성을 취하려면 작가의 치밀한 개연성이 필요했으나 이 소설에 큰 오류가 있었다. 바로 황사영의 죽음에 대한 것이다. 첫 번째는 황사영의 죽음을 정약전이 언제 알았냐 하는 것이며 두 번째는 그의 죽음의 방식이다.  

 a. 정약전은 언제 황사영의 죽음을 알았는가? 

13페이지를 보면 "함께 매를 맞았던 동생 정약종, 막냇동생 정약용, 젊은 조카 사위 황사영이 무어라 진술을 하는지도 들리지 않았다." 라고 나와있다. 그렇다면 이 때 정약전은 황사영과 같이 잡혔으며 그의 죽음도 알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17페이지에서는 "정약종이 숨어버린 주문모 신부와 조카 사위 황사영의 이름과 은신처를 대지 않고...." 라는 문장이 있다. 여기서 보면 황사영은 잡히지 않고 숨어 있었다는 진술이 나오며 엇갈린다. 141 페이지를 보면 "정약종의 시체는 두 토막이었고 황사영은 여섯 토막이었다." 라는 구절로 보아 정약전은 이미 알고 있었던 듯 보인다. 만약 이것이 작가의 서술이었다 해도 이 부분에 집어넣어 혼란을 야기한 것은 상당한 문제점이다.  380페이지를 보면 정약전은 황사영이 죽은 지 삼 년 후에야 알게 되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앞의 진술은 나와서 안 된다.

  b. 황사영은 어떻게 죽었는가? 

 다시 141 페이지를 보면 황사영은 능지처참 당해 죽었다고 나온다. 특히 시체가 여섯 토막이었다는 것을 강조할 정도로 강한 사실로 독자에게 다가온다. 그러나 정작 마지막에 황사영이 사형 당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참수형으로 끝난다. 이렇게 되면 황사영의 시체는 두 토막일 뿐이다. 이 부분 역시 정정할 필요가 있다. 

 왜 이런 오류가 생긴 것일까?  

 작가는 피카레스크식 구성을 사용하며 시간도 마음대로 넘나들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피카레스크 구성은 여러 인물의 행동을 보여줄 수 있으나 치밀한 플롯에 기반해야 한다. 이런 오류가 생겼다는 것은 아마 추측이지만 처음부터 피카레스크 구성을 갈 생각이 아니지 않았나 싶었다. 원래는 정약전을 주인공으로 '흑산'에 대한 얘기를 하려다 더 거대한 소재인 천주교 박해를 다두려고 했거나 황사영이라는 인물에 대한 애정이 생긴 탓에 급작스럽게 바꾼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생겼다. 천주교 박해를 다루기 위해선 황사영 외에도 순교자를 여럿 다뤄야 할 테고 그로 인해 피카레스크 구성을 취하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이 책을 읽은 사람들 중 의견이 '허무하다.'라는 것이 꽤 있었다. 여러가지 벌려 놓은 그물을 너무 급작스럽게 끌여당겼다는 느낌이 필자도 들었다. 아마 이 소설이 피카레스크 구성을 소화하기에는 분량이 짧지 않았나 싶다. 분량은 짧은데 여러 사람의 이야기가 나오는 탓에 어느 한 인물에게도 몰입하기가 쉽지 않았고 이 방대한 이야기를 서서히 매듭 짓기에도 분량은 턱 없이 부족했다. 차라리 이 소설이 두 권 분량이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끝으로

  비록 구성 상의 모험적 시도로 오류를 범했고 그것이 몰입에 방해되기도 했지만 역시 문체만큼은 최고였다. 강약 조절이 잘 되는 문체였다. 강렬할 땐 굵게 낭만적일 땐 시처럼 여유롭게 그 조절은 이런 오류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책을 읽을 수 있게 했다. 

 또한, 우리는 배교자를 욕하는 입장에 서 왔다. 특히 종교를 가진 사람들 입장에서는 배교자는 지옥에나 떨어질 종자들이었다. 순교자는 숭고한 영웅들이었고. 그러나 김훈의 흑산은 어느 입장이든 결국 인간의 삶이라며 포용해 준다. 정약전이 흑산을 자산으로 고친 일이나 창대의  

-자리가 있으면 사는 게 있지요. 

라는 대사 등은 결국 순교자와 배교자는 현재냐 아니면 피안의 세계냐 하는 선택의 차일 뿐이지 옳고 그름이 아니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역시나 거대 담론보다 인간을 다루기 좋아하는 김훈의 소설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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