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 동안의 고독 - 1982년 노벨문학상 수상작 문학사상 세계문학 6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안정효 옮김, 김욱동 해설 / 문학사상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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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에 교양으로 '라틴 아메리카 문화의 이해'라는 수업을 듣다가 이 소설을 알게 되었다. 마술적 사실주의로 유명하다는 것만 알아두고 덮어두었는데 요새 너무 안 읽은 책들이 많다는 사실을 깨닫고 마침내 이 책을 집어들었다. 456페이지에 달하는 꽤나 두꺼운 책이었고 한 가문의 역사를 다룬 서사시적인 소설인데 주인공의 이름들이 혼동되서 약간 읽기가 힘들었긴 했다.
 

 이 소설은 서사시인데도 불구하고 순차적인 구성이 아닌 것이 특이하다. 이 소설의 묘미는 과거와 현재 미래를 넘나드는 데에 있다. 첫 장면은 부엔디아 가문의 2대인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이 총살 당하기 직전 아버지와 얼음을 보러 갔던 모습으로 시작한다. 그러다 몇 페이지 지나고 나서야 가문의 역사와 함께 마콘도가 창조되는 모습이 그려진다. 이렇게 순차적 구성을 무시하는 부분은 꽤나 많다.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의 간략적인 생애 얘기가 요약되어 제시된 후에 본격적인 아우렐리아노 대령의 생애가 자세하게 묘사된다. 대령의 아내 레메디오스가 죽은 후에야 그 부부의 신혼 얘기가 나오기도 한다.

 이 소설의 또 다른 특징은 메타 픽션이라는 것이다. 메타 픽션은 소설 속의 소설이라는 의미인데 바로 독자들이 읽는 소설 전체가 사실은 멜뀌아데스의 양피지 안의 내용이라는 뜻이다. 이 메타픽션의 다른 예로는 김영하의 '아랑은 왜'를 들 수가 있다. '아랑은 왜'도 이 소설과 비슷하게 끝 부분에 장치를 둔다. 이 소설에서는 멜뀌아데스의 양피지가 그러하다면 '아랑은 왜'에서는 주인공 소설가 박이 소설을 쓰는데 그 소설의 첫 문장이 전체 소설의 첫 문장이라는 것이다. 이런 메타픽션은 독자들에게 참신하게 다가온다. 비록 나는 '백년동안의 고독'의 양피지 이야기를 어디선가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서인지 별 감흥이 없었으나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 읽었다면 뭔가 색다른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이것이 진짜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소설인가? 아니면 멜뀌아데스라는 집시의 양피지를 그대로 기록한 것은 아닌가 라는 혼돈의 늪에 빠지는 것도 그 나름의 묘미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소설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마술적 사실주의'이다. 소설에 환상적인 기교를 넣는데 그 환상이 어색하지 않을 만큼 사실적으로 느껴진다. 이 소설에 환상적인 기교가 들어간다고 해서 판타지 장르라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환타지 문학은 그 환상이 실제로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허구라는 전제 하에 쓰여지지만 마술적 사실주의 속의 환상은 마치 전설과 같은 느낌을 준다. 정말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아니라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라는 느낌. 특히나 '백년 간의 고독'은 한 가문의 서사시를 다루는 내용이기에 이런 환상적 기교가 전혀 겉돌지 않고 잘 섞인 느낌이었다. 우리 나라에서도 왕조 실록을 쓸 때 허구 같은 이야기들이 들어있지 않은가? 소설 속에서 환상적 소재와 묘사들이 이 소설에 뼈대를 실어줬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문학에 판타지적인 요소를 넣으면 안된다." 라는 문학에 대한 선입견은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난 이 소설의 제목이 마음에 들었다. 바로 '고독'이란 단어 때문이었다. 만약에 이 단어 대신에 '외로움'을 넣었다면 작품 자체가 가볍게 느껴졌을 지도 모른다. 외로움과 고독은 비슷해 보이지만 다르다. 외로움은 개인이 느끼는 일시적 감성이지만 고독은 인간 본연이 가지는 뿌리 깊은 감정인 것이다. '백년 동안의 고독' 속의 인물들은 그 '고독'을 잘 보여준다. 그들의 고독은 이름과 함께 대물림된다. 호세 아르카디오 라는 이름을 가진 이들은 건장하고 씩씩하지만 아우렐리아노 라는 이름을 가진 이들은 내면적이고 탐구적인 본성을 지닌다.(하지만 본성이 환경에 따라 바뀌기는 한다.)  쾌활한 이들은 파티를 즐겨하거나 많은 여자를 가까이 하고 내면적인 이들은 멜뀌아데스의 방에 틀어박힌다. 그러나 그들은 고독하다. 그 고독을 피하기 위해 아우렐리아노 세군도는 파티를 열고 흥청망청 살고 레베카는 자신에게 욕정을 준 남자와 결혼하고 아우렐리아노는 아마란타 우르슬라와 근친상간을 한다. 그러나 그들은 고독해진다. 레베카는 남편을 저 세상으로 보내고 혼자 쓸쓸히 늙어서 죽으며 아우렐리아노는 아마란타 우르슬라와 사랑의 결실을 맺지만 그 결실은 개미한테 뜯어먹힌다. 부엔디아 가문 중 진정한 사랑을 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도 그 고독 때문일 것이다. 그나마 아우렐리아노가 금기를 넘어선 열렬한 사랑을 하지만 그들의 아이는 개미 떼한테 잡아먹히고 마니...

 마콘도는 처음에 고독한 곳이었다. 소규모의 사람들이 사는 원시적인 마을이었지만 죽은 사람이 한 명도 없어서 묘지가 없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외국 문물이 들어오면서 자유파와 보수파 간의 싸움이 일어나고 바나나 공장 사건 때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희생당하지만 그 진실은 땅 속으로 묻혀버린다. 이렇게 많은 희생을 감수하며 마콘도는 열린 곳이 되었으나 나중에는 부엔디아 가의 몰락과 함께 고독 속에 묻혀버린다. 고독과 함께 태어나서 고독과 함께 묻힐 지니. 그것이 아마도 인간의 숙명일지도 모른다.

 

 끝으로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이 있었다면 미녀 레메디오스의 승천이었다. 때에 물들지 않은, 인간과는 거리가 먼 초현실적인 미녀가 초현실적인 세계를 가는 모습이 사실상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보여준 마술적 사실주의의 최고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며 리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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