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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에 거의 소개되고 있지 않은 독일의 개념사가 라인하르트 코젤렉. 

   얼마전 그가 편집한 [역사의 근본 개념들](Geschichtliche Grundbegriffe)의 아주 일부가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이라는 이름으로 번역 출간되기도 했다. 

   <지나간 미래>(문학동네, 1998)는 그의 눈부신 역작 중 하나. 

   비교적 번역도 좋은 듯하여 읽어 본다면, 우리가 때론 쉽게 또 때로는  

너무 헐겁고 상투적으로 '근대'(Neuzeit, modern)라 부르는 시대상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어떤 역사적 인식의 패러다임을 갖게 되는지를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특히 , '근대'라 번역되곤 하는 독일어 'Neuzeit', 역사로 번역되곤 하는 'Geschichte'가  

19세기 독일에서 탄생되는 맥락을 짚어내는 과정은 가히 압권이라 할 만하다.  

위 이미지는 영어권에서 코젤렉의 주요 논문들만 편집해서 엮은 책의 표지로,  

번역한다면 <개념사 실천>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독어판 단행본으로는 존재 하지 않는데, 여러 책에 실린 글들을 엮은 듯하다.   

 

그중, <유토피아의 시간화>(Temporalizing of Utopia)라는 글을 읽었다.  

18세기 중반을 경유하며, 비유럽 대륙의 탐사를 거의 완료한 유럽인들. 유토피아(utopia)란  

'없는-장소'(u-topia)라는 뜻하는데, 그 전까지 유럽인들은 신대륙의 삶을 자신들이  

잃어버린 낙원의 삶과 동일시하곤 했다. 그리하여 탐사(여행)를 다녀 온 이들은 본국으로  

돌아와 신대륙에서 봤던 삶을 낭만화하며 자신들의 사회에는 '없는 장소'를 말하곤 했다는데.  

 

결정적인 단절은 18세기 중반 전 지구의 영토를 탐사한 유럽인들에게 더 이상  

낭만화할 '없는 장소'가 없게 되었다는 데에서 비롯된다.  

그 전까지 유토피아는 발견의 대상이었던 데 반해(신대륙의 발견),  

이제 유토피아는 발견될 수 없는 무엇이 되었다는 것. 

그리하여 이제 유토피아는 상상되고 창조되기 시작한다.  

작가의 정신 속에서, 하나의 내러티브를 동반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관건은 여기에 있다. 동시대적 공간 속에서 발견되지 않는다면,  

이제 시간 속에서 발견되어야지 않겠는가. 

 

19세기 유럽인들의 정신을 사로잡은 하나의 단어가 있다. 이른바 '역사'(Geschichte)라는 것.  

맑스를 읽은 이들이라면 이 단어가 얼마나 강렬한 함의를 갖는지 알 것이다.  

모든 것이 허공으로 용해되듯이,  

역사는 지나간 낡은 것들을 용해시키며 새로운 미래를 창출한다. 

 

그리하여 19세기를 전후로 하여 등장한 정치학 용어들에는 무언가에 대한 정향성을  

표방하는  '-주의'(-ism)라는 접미사가 붙기 시작한다.  

근대의 정치학은 존재하지 않았던 무언가를 향한 하나의 이행,  

즉 역사의 진보를 향한 이행의 운동이었다. 

 

요컨대, 18세기 중반을 넘어서며 유토피아는 시간화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시간화 과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역사'라는 개념이다.  

역사가 인류의 노동과 실천을 통해 창조되어야 하듯,  

유토피아는 작가의 상상 속에서 생산되어야 했다.  

'작가'(author)라는 존재는 이 역사의 위대함을 통해 그 권위(author)를 부여받는다.   

여기까지 보면, 아마도 많은 이들이 근대 정치사상의 핵심적 특징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유토피아의 시간화를 통해 세계사 혹은 세계인의 삶이  

작가의 상상 속에서 재구성되기 시작했고, 

이 제구성된 삶에서 19세기는  자신의 시대적 과제를 발견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사실 <유토피안의 시간화>는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논지를 전개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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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전부터 알랭 바디우의 <세기>(Le Siecle)을 읽기 시작했다.  

   물론 언어능력의 한계로 불어가 아닌 영어판(The Century)으로. 

   판권이 팔린 책이니 머지않아 번역되어 출간되겠지만, 이 강렬한 문장들을 

   정말 잘 살릴 번역이 될지는 걱정이 조금 된다. 

   각설하고, 강렬했던 문장들 몇 개를 인용한다. 

 

   
  19세기의 헤겔적 관념은 역사의 운동에 의존하는 것, 즉 대상의 삶에 의지하는 것이었다. 20세기의 관념은 역사(History)와 직면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정치적으로 지배하는 것이다.(<세기> 영어판 15쪽)   
   
   
  그러나 이 세기[20세기]가 스스로를 새로운 시대로, 진정한 인류의 유아기로, 하나의 약속으로 사고했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심지어 학살자들조차도 스스로를 [그] 약속과 새로운 시작의 기호를 통해 표상했다.(17쪽)   
   
   
  19세기는 선포하고, 꿈꾸고, 약속했다. [반면] 20세기는 지금 여기에서 [새로운] 인류를 창조할 것이라 선언했다.(32쪽)   
   
   
  19세기의 실증주의가 지식의 힘을 긍정했던 곳에서, 이 세기는 오인의 효과라는 테마를 전개한다. 실증주의를 특징지었던 인식의 낙관주의에 맞서 20세기는 무지의 특별한 힘을, 즉 라캉이 '무지의 열정'이라고 올바르게 부른 특별한 힘을 발견하고, 그것을 무대화한다.(49쪽)   
   

 

위 네 인용문으로 20세기에 대한 바디우의 테제를 간략히 읽어보자.  

바디우는 말한다. 19세기는 미래의 유토피아를 꿈꾸고 기획하는 시대였다고, 

그러나 20세기에는 그 유토피아가 미래의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여기에서 실현되는 것이어야 했다고. 

19세기에 팽배했던 역사주의의 신화(역사적 진보에 대한 믿음)는  

혁명적 영웅주의(혁명적 결단을 내릴 정치적 영웅의 도래를 열망하는 것)로 변모한다. 

이러한 전환의 핵심에 인간의 종적 정체성에 대한 근본적인 실험의식이 자리 잡고 있었다. 

니체의 위버멘쉬 개념이 어떤 것이었든, 그리고 나치의 인종실험을 통해 볼 수 있듯, 

20세기의 도입부를 지배한 감성 중 하나가 기존의 인류와는 다른 인류가  

필요하다는 의식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요컨대, 20세기는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하고자 했던 시대라는 것(두번째와 세번째 인용문).  

아마도 20세기는 그 새로움을 위해 거짓과 왜곡의 베일을 찢는 것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20세기 혁명적 맑스주의자들의 관심사 역시 '이데올로기론'이라는 논제하에  

거짓과 위선의 베일이 무엇이었느냐 하는 것에 맞추어졌다(네번째 인용문).   

 

앎을 통해 무지의 미몽 상태에서 깨어나야 한다고 믿었던 19세기의 지성들과는 달리 

20세기의 지식인들은 우리가 안다고 믿었던 것 자체가 이미 어떤 베일, 어떤 오인 속에서만 가능했다고 생각했다. 

앎을 통해 현재의 문명적 빈곤을 탈피할 수 있을 것이라는 역사주의-실증주의적 낙관론은

지금 여기에서 현재의 거짓과 위선의 껍질을 벗겨내야 한다는 편집증적 혁명론으로 대체되었다.  

이 20세기의 혁명론을 바디우는 라캉의 용어를 사용해 '실재에 대한 열망'(Passion for the Real)이라 부른다.

그래서 라캉의 명제를 빌린 바디우의 첫번째 테제는 이렇다.   

 

"20세기는 19세기가 상상(계)적 관계를 맺었던 것의 실재이다."(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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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schichte ist wie ein Text, in den die Vergangenheit wie auf einer lichtempfindlichen Platte Bilder eingelagert hat. Erst die Zukunft besitzt die Chemikalien, die nötig sind, um dieses Bild in aller Schärfe zu entwickeln.

 - Walter Benjamin, Gesammelte Schriften vol. I, 3, ed. Rolf Tiedemann, Frankfurt am Main, 1980, p.1238.
 
 

"역사란 과거가 마치 감광성을 띤 판처럼 이미지를 저장해 놓는 텍스트와 같다. 무엇보다 미래는 이러한 이미지들을 완전하게 인화하는 데 필요한 화학약품을 갖는다." - 벤야민

→ 그러므로 벤야민에게 있어서 미래(未來)란 오지(來) 않은(未) 시간이 아니라, 이미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어둠에 쌓여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 섬광처럼 드러나는 순간을 말한다. 미래는 망막을 비껴갔던 빛이 돌아오는 순간, 망막을 가리고 있던 어둠의 장막이 찢겨지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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