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부터 알랭 바디우의 <세기>(Le Siecle)을 읽기 시작했다.  

   물론 언어능력의 한계로 불어가 아닌 영어판(The Century)으로. 

   판권이 팔린 책이니 머지않아 번역되어 출간되겠지만, 이 강렬한 문장들을 

   정말 잘 살릴 번역이 될지는 걱정이 조금 된다. 

   각설하고, 강렬했던 문장들 몇 개를 인용한다. 

 

   
  19세기의 헤겔적 관념은 역사의 운동에 의존하는 것, 즉 대상의 삶에 의지하는 것이었다. 20세기의 관념은 역사(History)와 직면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정치적으로 지배하는 것이다.(<세기> 영어판 15쪽)   
   
   
  그러나 이 세기[20세기]가 스스로를 새로운 시대로, 진정한 인류의 유아기로, 하나의 약속으로 사고했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심지어 학살자들조차도 스스로를 [그] 약속과 새로운 시작의 기호를 통해 표상했다.(17쪽)   
   
   
  19세기는 선포하고, 꿈꾸고, 약속했다. [반면] 20세기는 지금 여기에서 [새로운] 인류를 창조할 것이라 선언했다.(32쪽)   
   
   
  19세기의 실증주의가 지식의 힘을 긍정했던 곳에서, 이 세기는 오인의 효과라는 테마를 전개한다. 실증주의를 특징지었던 인식의 낙관주의에 맞서 20세기는 무지의 특별한 힘을, 즉 라캉이 '무지의 열정'이라고 올바르게 부른 특별한 힘을 발견하고, 그것을 무대화한다.(49쪽)   
   

 

위 네 인용문으로 20세기에 대한 바디우의 테제를 간략히 읽어보자.  

바디우는 말한다. 19세기는 미래의 유토피아를 꿈꾸고 기획하는 시대였다고, 

그러나 20세기에는 그 유토피아가 미래의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여기에서 실현되는 것이어야 했다고. 

19세기에 팽배했던 역사주의의 신화(역사적 진보에 대한 믿음)는  

혁명적 영웅주의(혁명적 결단을 내릴 정치적 영웅의 도래를 열망하는 것)로 변모한다. 

이러한 전환의 핵심에 인간의 종적 정체성에 대한 근본적인 실험의식이 자리 잡고 있었다. 

니체의 위버멘쉬 개념이 어떤 것이었든, 그리고 나치의 인종실험을 통해 볼 수 있듯, 

20세기의 도입부를 지배한 감성 중 하나가 기존의 인류와는 다른 인류가  

필요하다는 의식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요컨대, 20세기는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하고자 했던 시대라는 것(두번째와 세번째 인용문).  

아마도 20세기는 그 새로움을 위해 거짓과 왜곡의 베일을 찢는 것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20세기 혁명적 맑스주의자들의 관심사 역시 '이데올로기론'이라는 논제하에  

거짓과 위선의 베일이 무엇이었느냐 하는 것에 맞추어졌다(네번째 인용문).   

 

앎을 통해 무지의 미몽 상태에서 깨어나야 한다고 믿었던 19세기의 지성들과는 달리 

20세기의 지식인들은 우리가 안다고 믿었던 것 자체가 이미 어떤 베일, 어떤 오인 속에서만 가능했다고 생각했다. 

앎을 통해 현재의 문명적 빈곤을 탈피할 수 있을 것이라는 역사주의-실증주의적 낙관론은

지금 여기에서 현재의 거짓과 위선의 껍질을 벗겨내야 한다는 편집증적 혁명론으로 대체되었다.  

이 20세기의 혁명론을 바디우는 라캉의 용어를 사용해 '실재에 대한 열망'(Passion for the Real)이라 부른다.

그래서 라캉의 명제를 빌린 바디우의 첫번째 테제는 이렇다.   

 

"20세기는 19세기가 상상(계)적 관계를 맺었던 것의 실재이다."(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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