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티에 라탱
사토 겐이치 지음, 김미란 옮김 / 문학동네 / 200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작가, 참 재미있는 사람이다. 예전에 <왕비의 이혼>을 읽었을 때도 그랬는데,
<왕비의 이혼>이 어렵고 무게 있는 소설인가 하고 읽어나가다 드문드문 만화 같은 인상을 받게 된다면,
<카르티에 라탱>은 시작부터 만화같은 이야기인가 하고 읽어나가다보면 드문드문 만만치 않은 소설이구나 하는 인상을 받게 된다.
말하자면 이 사람, (일본의) 대중적인 코드에 자신의 지식을 어떻게 섞어넣어야 할지 아는 사람이다.
1536년 파리의 골목이 어떻게 생겼고 그때 칼뱅이 뭘 하고 있었고 예수회가 어떻게 만들어졌고를 구구절절 설명하고 있어도 막힘없이 '재미있게' 읽힌다는 것,
이 소설 또는 이 작가가 아니면 쉽지 않거나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굳이 시대나 개인의 폐부나 심연을 건드려야만 소설이 되는 건 아니다. 굳이 독자를 압도하는 독보적인 스타일이 있어야만 소설이 되는 건 아니다.
정말,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에서 이런 소설을 본 지 무척 오래된 것 같다. 내가 과문해서일지도 모르지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1분
파울로 코엘료 지음, 이상해 옮김 / 문학동네 / 200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자신이 섹스에 대해 잘 모른다고 생각하거나 자신은 섹스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한 소설. 사실 어느 쪽도 아니더라도 마음을 열고 읽으면 깨우침의 실마리가 보인다.

마리아와 랄프와 테렌스가 너무 비현실적인 인물인 것이 약간 불만스럽기도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럴 것도 없다. 말하자면 <11분>은 여성을 위한 성적/영적 판타지 우화다. 그걸로 충분하다.

대신 <11분>을 읽고 난 후에 든 생각은, 내용과는 상관없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소설에게 우화는 항상 매력적인 대상이다. 그러나 소설은 그 시작부터 우화에서 계속 멀어지고 있었을 것인데, 코엘료는 진기하게도 역으로 소설을 우화에 접근시킨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우화를 소설화한다. 그것도 누구나 경탄할 만큼 탁월한 기술로. 그 결과 코엘료는 우화의 소설화가 대중적으로도 상업적으로도 유의미한 일이라는 사실을 훌륭하게 증명해냈다. 그런데 혹, 이것으로 우화가 소설에게 넘겨준 역사성을 다시 우화에게 되돌려줄 수 있다는 것일까? 글쎄, 그거야말로 정확히 코엘료스러운 해피엔딩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달에 울다
마루야마 겐지 / 예문 / 1995년 9월
평점 :
절판


지금까지 마루야마 겐지의 소설을 여럿 읽었지만, 단연 <달에 울다>가 최고다. 품절이라니,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두 번 산 이 책을 여태 잃어버리지 않은 건 천만다행이다.

<달에 울다>에는 이후 작품들에서 보이는 다소 지루한 묘사와 관념적인 과장이 없다. 대신 서사시에 가까운 압축된 문장이, 눈이 아플 정도로 선명한 이미지가 가득하다. 어쩔 수 없는 번역의 구차함에도 불구하고 그러하다. 말하자면, <달에 울다>는 마루야마 겐지의 응축된 씨앗이라고 해도 된다. 조금 과격하게 말하자면, 이후의 마루야마 겐지는 이 <달에 울다>의 확장에 불과하다.

조금 다른 얘기로, 이때 마루야마 겐지의 문장은 여러 모로 김훈의 문장을 연상시키는 면이 있다. 또는 김훈의 문장은 여러 모로 마루야마 겐지의 문장을 연상시키는 면이 있다. 작가의 캐릭터 역시 마찬가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단지 서로 닮았다는 얘기는 아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에세이스트의 책상
배수아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이제 배수아의 자의식은 문장 너머의 것을 보려 하고 있는 듯하다.
그리 꼼꼼히 챙겨읽은 것은 아니었지만, 어렴풋한 기억에 의하면 배수아의 초기 문장은 문체라기보다는 독특한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배수아의 문체라고 불러도 괜찮을 것 같다. 배수아는 더이상 후기자본주의의 온갖 문화적 도상들을 경유할 필요 없이, M이라는 인물과 언어(모국어나 외국어가 아닌), 그리고 음악을 통해 자신의 진정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매우 비역사적인 방식인 만큼 공소하기도 쉬운 태도이지만, 한편으로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 같은 작품에서와 같은 시선이 그것과 병행된다면(나는 그렇게 믿는다) 그다지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그래서, 배수아의 '본격적인' 다음 작품이 기다려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왕비의 이혼
사토 겐이치 지음, 이정환 옮김 / 열림원 / 2001년 2월
평점 :
품절


소설에는 '읽히는' 소설과 '읽히지 않는' 소설이 있다. <왕비의 이혼>은 기본적으로 잘 '읽히는' 소설이다. 잘 읽히지 않은 소설을 앞에 두고 머리를 싸매며, 또는 가슴을 짓누르며 고통스러워하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잘 읽히는 소설을 읽으며 그 이유를 생각해보는 것도 흥미있는 일이다.

<왕비의 이혼>이 비교적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시대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쉽게 읽히는 것은, 아마도 이야기의 주제와 인물의 성격이 완전히 '현대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은 시종 그 시대의 인물과 지리, 사건과 사회질서의 디테일들을 친절하게 해설하고 있지만, 그 속에서 움직이는 인물들은 현대를 무대로 한 소설로 그대로 옮겨놓아도 아무 무리가 없다. 15세기 말 프랑스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당시의 학생들과 교수들, 재판관들의 캐릭터가 현대의 학생들과 교수들, 재판관들의 그것과 이 소설만큼 비슷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생각건데, 이 소설의 큰 틀은 15세기 중국을 배경으로 하든, 20세기 미국을 배경으로 하든 크게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이 소설의 재미는 상당 부분 희석될 것이 분명한데, 이는 이 소설의 현대적인(즉 허구적인) 부분을 제외한 '완전히 역사와 일치하는' 사실들을 이해하는 재미가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사실 허구적인 현대와 사실적인 역사를 기능적으로 분리하는 <왕비의 이혼>의 방식은 이 소설이 깊이 있는 역사소설이 되는 것을 막는 요인이다. 아마 사토 겐이치는 그런 깊이 있는 방식을 의도적으로 버렸거나, 또는 그것이 가능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신 이런 방법으로 이야기의 '익숙한 재미'를 선택했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 그런 선택이 가능한 것은 이것이 '일본 소설'이기 때문이다. 역사를 단지 소설의 소재로만 이용할 수 있다는 것, 좋고 싫고를 떠나 이것이 일본의 특징이다. (자신들의 역사가 아닌 중세 유럽의 역사를, 그것도 이념이나 철학이나 텍스트로서가 아니라 단지 이야기의 '소재'로 쓸 수 있다는 것도 우리로서는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덕분에 이런 신기한 소설이 나올 수 있는 것이겠지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